성령론제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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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제 1강
0. 서론
스가랴 4장 6b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저희가 앞으로 스가랴서를 공부하게 되는데 금요 모임에서 4주 동안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제 1 부 성령은 누구인가?
A. 성령의 명칭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 성령의 명칭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단어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pneuma 라틴어 animus, anima, spiritus 등은 공기의 움직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바람’, ‘폭풍’, ‘산들바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단어들은 「호흡으로 인한 공기의 움직임」을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의 의미는 ‘생명의 원리’, ‘생동적임’, ‘호흡’ 등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성경에는 짐승도 호흡이 있고 사람도 호흡이 있다고 했으며 놀랍게도 하나님께도 루아흐가 있다고 말합니다(14). 성경이 하나님은 호흡하시며, 생명이 있으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창조 사역의 위대한 기적은 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에게 특별히 인간에게 자기의 루아흐를 주셨다는 데서 보여집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바람이 역사합니다. 그 이유는 이 루아흐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14).
헬라어 프뉴마는 근본적으로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동일합니다. 프뉴마는 호흡(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동감의 표시인 동시에 원리입니다(14).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 중에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누우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론적인 능력의 원리, 이를테면 이성, 오성, 지성 등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 하나는 프뉴마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역동적인 원리를 표현하며 인간의 생동과 활동의 중심으로 특징지웁니다(14f.).
신약에 사용된 이 프뉴마는 구약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로 보건대 ‘영’이란 말은 성경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그는 자기의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인간의 루아흐란 살아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사인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 은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 무엇입니다(15).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정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인리히 헨드리쿠스: 영은 생기를 주는 하나님의 호흡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다(150)
-F.W. Dillistone: 인간의 생명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Alan Richardson: 한 인간의 프뉴마는 그의 역동성, 활동 속에 있는 그의 영이다. 즉 성령은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이시다.
루아흐와 프뉴마는 성령의 명칭에 대한 기초가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름을 알게 되면 성령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집니다.
1. 구약성경
a. 엘로힘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신(창 1:2). 하나님의 기운(욥 27:30). 성령을 엘로힘과 연관시키는 성령의 여러 가지 명칭들은 성령의 신적인 본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b. 여호와로서의 성령: 여호와의 기운(사 40:7), 여호와의 신(삿 3:10), 주 여호와의 신(사 40:7), 여호와의 소리(시 29:3-9). 성령의 본질에 관한 명칭이 여호와와 관련되어져 있을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상기하게 됩니다. 바로 그 명칭은 그의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때 사사들에게 반복적으로 임한 것이 주의 성령이었습니다(삿 3:10; 6:34; 11:29; 13:25; 14:6,19; 15:14).(104).
c. 쉐키나로서의 성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성막에서 이스라엘최초의 성전에서 나타난 영광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105). 이런 사실은 신약 속에서 주의 영과, 영광의 영 등에서 나타납니다.
d. 샤다이(전능자)로서의 성령: ‘샤다이’라는 말은 ‘안식’ 또는 ‘부양자’를 의미합니다. 전능자의 기운(욥 32:8; 33:4), 전능자의 음성(겔 1:24).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자족하시는 하나님이며, 힘이라는 특성과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능력의 의미를 지닙니다(106).
e. 엘 엘룐(지존하신 자로)로서의 성령: 엘 엘룐은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모든 거짓된 신들보다 뛰어나시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창 14:22). 성령을 엘 엘룐과 연결한 성령의 본질에 관한 명칭은 피조물에 대한 성령의 권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06f.). 신약에서 예수께서 잉태되셨을 때, 성령을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라고 묘사했습니다(눅 1:35).
f. 사 11:2에 나타난 성령의 일곱가지 명칭
-여호와의 신: 성령의 본질을 밝혀주는 명칭이며 그가 누구인지를 묘사해 주고 있다.
-지혜의 신: 성령은 사람들과 그 동기를 구별할 수 있다.
-총명의 신: 성령은 진짜와 모조품을 구별할 수 있다.
-모략의 신: 성령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재능의 신: 성령은 그의 결정과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
-지식의 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알고 계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성령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2. 신약성경
a. 예수와 관련된 명칭
-그 아들의 영(갈 4:6): 예수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
-예수의 영(행 16:7): 예수라는 말은 원래 ‘여호와는 구원자시다’이다. 따라서 ‘예수의 영’이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영(롬 8:9): 성자의 세 가지 기름부으심을 받은 직무를 도와 주신다. 성령의 이 사역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134).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 1:19): 바울은 기독인으로서 생활과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완전한 공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135).
b. 보혜사
-1) 회개전: 책망(요 16:7-10), 억제(살후 2:7)
-2) 회개시: 중생(딛 3:5), 내주(고전 6:19), 인치심(엡 4:30)
-3) 회개후: 충만함(엡 5:8), 성화(고후 3:18), 조명(고전 2:12), 기도(롬 8:26f.)
c. 성령의 성격에 관한 명칭
-1) 하나님에게만 있는 독특한 성품: ① 생기: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② 영원하신 성령: 영생을 주는 역할 ③ 심판하는 영: 분별하는 역할
-2) 신자에게서 재생되어지는 성품: ① 자원하는 심령: 후히 주시는 속성 ②선한 신: 그의 선한 속성 ③거룩한 영 ④은혜의 영:용서하고 축복하시는 성격 ⑤ 진리의 영: 진실하신 성격 ⑥지혜의 영: 전지하심 ⑦ 견고한 영: 불변성.
d. 성경 기록과 관련된 명칭들: ① 계시의 영(엡 1:17) ②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함(벧후 1:21) ③예언하는 자들의 영(고전 14:32) ④ 예언의 영(요 16:14; 계 19:10) ⑤진리의 영(요 16;13)
e. 창조에 관한 명칭
-1) 알을 품는 비둘기: 창조에 관해 끊임없이 주목하신다. 창 1;2; 마 3:16. ‘수면에 운행한다’는 말은 비둘기가 알을 부드럽게 품고 그것이 부화할 때까지 따뜻하게 보존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끼들이 날아다니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새끼 위를 날아 다니는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181). 마 1:18.
-2) 하나님의 손: 아름다움에 대한 창조적 표현. ‘하나님의 손’(눅 11:20),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시 8:3),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시 8:6). ‘하나님의 손’(대하 30:12), ‘여호와의 손’(욥 12:9), ‘주 여호와의 손’(겔 8:1).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 때에 손이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가락 또는 하나님의 손은 세상에다가 아름다움과 범위와 차원을 추가시켜 성령의 창조적 본성과 관련되어져 있다. 즉 성령께서는 피조물을, 인간에게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182).
-3) 여호와의 소리: 창조에 있어서 그의 권능. 성경에는 소리라는 단어가 포함된 성령의 명칭들이 자주 자연의 출현과 관련되어져 있다(시 18:13; 29:3-9; 77:18). 그의 음성이 날마다 우리의 생활을 인도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반역이 아니라 순종의 반응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시 95:7; 히 3:7).
-4) 생기: 창조에 있어서 그의 생명. 성령은 생기(겔 37:9), 전능자의 기운(욥 33;4), 하나님의 기운(욥 27:3), 생명의 생기(계 11:11), 여호와의 기운(사 40:7), 콧김(시 18:15), 생명의 성령(롬 8:2). 이 단어는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다.
제 2 부 성령의 사역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각기 따로 자기에게 해당하는 기간에만 사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태론과는 다르지만 우익삼신론적인 신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을 알고 나면 이 세분은 그 사역에서 결코 나뉘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 오웬의 지적대로, “모든 신적인 사역은 본성적으로, 모든 은혜 면에서 살펴볼 때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진다. 따라서 각각의 위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장본인인 것이다.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똑같이 나눌 수 없는 일이다. 삼위신의 인격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이 있고, 연관이 있으며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 각각의 신적인 사역도 분명히 구별되나 놀라운 것은 그 사역이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세 분이 따로 역사하는데 그 결과는 항상 하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성부는 원천으로서 밖으로 발출하고 성자는 만물의 질서대로 조성하며 성령은 마무리한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과 긴밀히 관계를 지니면서 사역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자의 사역 다음에 성령의 사역이 어떻게 뒤따르는가는 잘 말하고 있습니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근원이 되는 사역은 성부에게 돌려집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나 만물을 존재하게 하고 붙드시고 세우시는 일은 성자에게 돌려집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령은 이 모든 일을 끝맺으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A. 창조 사역
성경은 성령께서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는데 함께 역사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 사역의 어떤 부분에 역사했을까요?
1. 자연 창조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창세기 초두 부분은 성령께서 형체가 뚜렷이 이루어지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한 피조물 위로 성령이 어떤 사역을 하심을 보여줍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 지구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텅빈 둥근 공모양이었습니다. 다만 땅과 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2절에 나오는 “공허와 혼돈”의 모습입니다. 이런 표현은 (토후보후) 텅비고 혼돈된 어떤 것이나 헛되고 무가치한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됩니다. 마치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별들의 황량한 모습과 같았을 것입니다.
만일 성령의 사역이 없었다면 모든 바다는 사해일 수밖에 없고 원시적이고 혼란할 수밖에 없고, 어두움으로 뒤덮여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로 운행하심으로 혼돈하던 지구는 질서를 가지게 되었고 생명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은 피조물의 모양을 형성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령은 하늘을 장식하였고 그의 손으로 은하수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신비스럽게 만들어진 달과 별들을 하늘에 배열하였고 또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십니다.
2. 인간 창조
우리는 여기서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연관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1) 인간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2) 창조된 인간은 어떤 존재이었는가?
1) 인간은 어떻게 창조되었나?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이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① 인간의 죽은 몸은 땅의 먼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② 인간은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이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시고 거기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존 오웬은 욥 33:4을 근거로 하여 이 구절의 사역을 성령과 연관시킵니다. “(욥 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의 몸과 영을 창조하신 일은 모두 성령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웬은 인간이 이렇게 창조된 의의를 헌신과 연관시킨다. “이와 같이 사람은 성령에 의해 조성되었고 온전히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81).
2) 창조된 인간은 어떤 존재이었는가?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들은 사람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사람 자신 안에 그로부터 하나님이 참으로 계신다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혜로우시고, 선하시며,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순수하시고 순결하시며, 자유롭고, 그 무엇의 통제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불의나 거짓, 또는 순결하지 않음과 같은 그의 성품에 반하는 모든 무질서에 대해 그냥 계실 수 없으시며,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에 반하는 이런 무질서에 대해 심판을 하시고 쓸어버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6).
아담이 성령을 지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멜랑히톤은 타락 이후와 타락 이전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그들은 성령과 이전에 가졌던 놀라운 덕들을 상실한 것이다”(179)라는 말이나 “타락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의 의지와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과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셨고, 따라서 사람의 모든 성향과 윤리가 제대로 되었었는데, 타락 이후에는 성령이 떠나시므로 사람의 의지와 마음 가운데 거짓된 불길과 악성 종양이 자라게 되었고 잘못된 사랑과 분노, 두려움과 불안이 마음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180).
B. 보존과 완성의 사역
1. 자연만물 보존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심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자연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상관하시며 다스린다는 이 사실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원론적인 삶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평일에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듯이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만물과 인간을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外飾者들이라고 칭한다.
* 과학 연구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등)
* 환경보존 운동
2. 인간의 보존
-잉태와 자연의 황폐로 인한 고난
-죽음으로 생명이 단축됨
-자연적 신인식에 대한 책임
-도덕적 무능력
멜란히톤은 그의 저서 ‘신학총론’에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 성령이 그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소위 자연인은 성령과 무관한 듯이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짐승이나 사탄처럼 되었는가? 성경은 인간은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가르칩니다. 문제는 원래 창조함을 받았을 때 주어진 능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런 인간을 보존하시기 위해 성령은 어떤 사역을 하시는가?
문제는 타락 후에도 아직 인간에게 약간이나마 남아 있는 자연적 능력을 멜란히톤이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에로 떨어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거두셨고, 인간의 자연적 능력도 아주 약화되었다. 그의 이해력이 남아있기는 하나 그 빛이 아주 약해졌다. 그래서 사람이 수를 사용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알 수는 있으나, 그 힘이 아주 약해진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도 비관적이다: “사람의 마음과 의지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선한 덕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 경외가 모두 상실되었다.”
멜란히톤은 타락 후의 이런 인간을 가리켜 “비록 그들이 아직 중생되지 않았고, 성령을 통해서 성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몸의 외적인 지체들을 움직이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149f.). 멜란히톤은 인간이 아직 이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150). 그러면 멜란히톤은 이 자유의지를 성령의 은사로 보는가?
타락한 인간을 성령께서 보존하고 계신다는 내용은 칼빈의 발언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 2권에서 타락한 인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도 모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있으며(II,1,2).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켰음을 주목하고(II,1,9), 제 2권 2장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노예처럼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은 남아 있음과(II,2,12), 인간의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여(II,2,14-16) 인류의 문화 내지 문명도 성령의 보존 사역과 연관됨을 암시합니다.
0. 서론
스가랴 4장 6b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저희가 앞으로 스가랴서를 공부하게 되는데 금요 모임에서 4주 동안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제 1 부 성령은 누구인가?
A. 성령의 명칭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 성령의 명칭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단어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pneuma 라틴어 animus, anima, spiritus 등은 공기의 움직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바람’, ‘폭풍’, ‘산들바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단어들은 「호흡으로 인한 공기의 움직임」을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의 의미는 ‘생명의 원리’, ‘생동적임’, ‘호흡’ 등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성경에는 짐승도 호흡이 있고 사람도 호흡이 있다고 했으며 놀랍게도 하나님께도 루아흐가 있다고 말합니다(14). 성경이 하나님은 호흡하시며, 생명이 있으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창조 사역의 위대한 기적은 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에게 특별히 인간에게 자기의 루아흐를 주셨다는 데서 보여집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바람이 역사합니다. 그 이유는 이 루아흐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14).
헬라어 프뉴마는 근본적으로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동일합니다. 프뉴마는 호흡(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는 인간의 생동감의 표시인 동시에 원리입니다(14).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 중에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누우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론적인 능력의 원리, 이를테면 이성, 오성, 지성 등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 하나는 프뉴마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역동적인 원리를 표현하며 인간의 생동과 활동의 중심으로 특징지웁니다(14f.).
신약에 사용된 이 프뉴마는 구약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로 보건대 ‘영’이란 말은 성경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그는 자기의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인간의 루아흐란 살아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사인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 은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 무엇입니다(15).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정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인리히 헨드리쿠스: 영은 생기를 주는 하나님의 호흡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다(150)
-F.W. Dillistone: 인간의 생명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Alan Richardson: 한 인간의 프뉴마는 그의 역동성, 활동 속에 있는 그의 영이다. 즉 성령은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이시다.
루아흐와 프뉴마는 성령의 명칭에 대한 기초가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름을 알게 되면 성령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집니다.
1. 구약성경
a. 엘로힘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신(창 1:2). 하나님의 기운(욥 27:30). 성령을 엘로힘과 연관시키는 성령의 여러 가지 명칭들은 성령의 신적인 본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b. 여호와로서의 성령: 여호와의 기운(사 40:7), 여호와의 신(삿 3:10), 주 여호와의 신(사 40:7), 여호와의 소리(시 29:3-9). 성령의 본질에 관한 명칭이 여호와와 관련되어져 있을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상기하게 됩니다. 바로 그 명칭은 그의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때 사사들에게 반복적으로 임한 것이 주의 성령이었습니다(삿 3:10; 6:34; 11:29; 13:25; 14:6,19; 15:14).(104).
c. 쉐키나로서의 성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성막에서 이스라엘최초의 성전에서 나타난 영광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105). 이런 사실은 신약 속에서 주의 영과, 영광의 영 등에서 나타납니다.
d. 샤다이(전능자)로서의 성령: ‘샤다이’라는 말은 ‘안식’ 또는 ‘부양자’를 의미합니다. 전능자의 기운(욥 32:8; 33:4), 전능자의 음성(겔 1:24).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자족하시는 하나님이며, 힘이라는 특성과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능력의 의미를 지닙니다(106).
e. 엘 엘룐(지존하신 자로)로서의 성령: 엘 엘룐은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모든 거짓된 신들보다 뛰어나시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창 14:22). 성령을 엘 엘룐과 연결한 성령의 본질에 관한 명칭은 피조물에 대한 성령의 권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06f.). 신약에서 예수께서 잉태되셨을 때, 성령을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라고 묘사했습니다(눅 1:35).
f. 사 11:2에 나타난 성령의 일곱가지 명칭
-여호와의 신: 성령의 본질을 밝혀주는 명칭이며 그가 누구인지를 묘사해 주고 있다.
-지혜의 신: 성령은 사람들과 그 동기를 구별할 수 있다.
-총명의 신: 성령은 진짜와 모조품을 구별할 수 있다.
-모략의 신: 성령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재능의 신: 성령은 그의 결정과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
-지식의 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알고 계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성령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2. 신약성경
a. 예수와 관련된 명칭
-그 아들의 영(갈 4:6): 예수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
-예수의 영(행 16:7): 예수라는 말은 원래 ‘여호와는 구원자시다’이다. 따라서 ‘예수의 영’이란 성령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영(롬 8:9): 성자의 세 가지 기름부으심을 받은 직무를 도와 주신다. 성령의 이 사역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134).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 1:19): 바울은 기독인으로서 생활과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완전한 공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135).
b. 보혜사
-1) 회개전: 책망(요 16:7-10), 억제(살후 2:7)
-2) 회개시: 중생(딛 3:5), 내주(고전 6:19), 인치심(엡 4:30)
-3) 회개후: 충만함(엡 5:8), 성화(고후 3:18), 조명(고전 2:12), 기도(롬 8:26f.)
c. 성령의 성격에 관한 명칭
-1) 하나님에게만 있는 독특한 성품: ① 생기: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② 영원하신 성령: 영생을 주는 역할 ③ 심판하는 영: 분별하는 역할
-2) 신자에게서 재생되어지는 성품: ① 자원하는 심령: 후히 주시는 속성 ②선한 신: 그의 선한 속성 ③거룩한 영 ④은혜의 영:용서하고 축복하시는 성격 ⑤ 진리의 영: 진실하신 성격 ⑥지혜의 영: 전지하심 ⑦ 견고한 영: 불변성.
d. 성경 기록과 관련된 명칭들: ① 계시의 영(엡 1:17) ②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함(벧후 1:21) ③예언하는 자들의 영(고전 14:32) ④ 예언의 영(요 16:14; 계 19:10) ⑤진리의 영(요 16;13)
e. 창조에 관한 명칭
-1) 알을 품는 비둘기: 창조에 관해 끊임없이 주목하신다. 창 1;2; 마 3:16. ‘수면에 운행한다’는 말은 비둘기가 알을 부드럽게 품고 그것이 부화할 때까지 따뜻하게 보존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끼들이 날아다니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새끼 위를 날아 다니는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181). 마 1:18.
-2) 하나님의 손: 아름다움에 대한 창조적 표현. ‘하나님의 손’(눅 11:20),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시 8:3),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시 8:6). ‘하나님의 손’(대하 30:12), ‘여호와의 손’(욥 12:9), ‘주 여호와의 손’(겔 8:1).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 때에 손이나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가락 또는 하나님의 손은 세상에다가 아름다움과 범위와 차원을 추가시켜 성령의 창조적 본성과 관련되어져 있다. 즉 성령께서는 피조물을, 인간에게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182).
-3) 여호와의 소리: 창조에 있어서 그의 권능. 성경에는 소리라는 단어가 포함된 성령의 명칭들이 자주 자연의 출현과 관련되어져 있다(시 18:13; 29:3-9; 77:18). 그의 음성이 날마다 우리의 생활을 인도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반역이 아니라 순종의 반응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시 95:7; 히 3:7).
-4) 생기: 창조에 있어서 그의 생명. 성령은 생기(겔 37:9), 전능자의 기운(욥 33;4), 하나님의 기운(욥 27:3), 생명의 생기(계 11:11), 여호와의 기운(사 40:7), 콧김(시 18:15), 생명의 성령(롬 8:2). 이 단어는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다.
제 2 부 성령의 사역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각기 따로 자기에게 해당하는 기간에만 사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태론과는 다르지만 우익삼신론적인 신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을 알고 나면 이 세분은 그 사역에서 결코 나뉘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 오웬의 지적대로, “모든 신적인 사역은 본성적으로, 모든 은혜 면에서 살펴볼 때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진다. 따라서 각각의 위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장본인인 것이다.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똑같이 나눌 수 없는 일이다. 삼위신의 인격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는 방식은 구별이 있고, 연관이 있으며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 각각의 신적인 사역도 분명히 구별되나 놀라운 것은 그 사역이 하나가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세 분이 따로 역사하는데 그 결과는 항상 하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성부는 원천으로서 밖으로 발출하고 성자는 만물의 질서대로 조성하며 성령은 마무리한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과 긴밀히 관계를 지니면서 사역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자의 사역 다음에 성령의 사역이 어떻게 뒤따르는가는 잘 말하고 있습니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근원이 되는 사역은 성부에게 돌려집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나 만물을 존재하게 하고 붙드시고 세우시는 일은 성자에게 돌려집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령은 이 모든 일을 끝맺으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A. 창조 사역
성경은 성령께서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는데 함께 역사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 사역의 어떤 부분에 역사했을까요?
1. 자연 창조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창세기 초두 부분은 성령께서 형체가 뚜렷이 이루어지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한 피조물 위로 성령이 어떤 사역을 하심을 보여줍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 지구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텅빈 둥근 공모양이었습니다. 다만 땅과 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2절에 나오는 “공허와 혼돈”의 모습입니다. 이런 표현은 (토후보후) 텅비고 혼돈된 어떤 것이나 헛되고 무가치한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됩니다. 마치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별들의 황량한 모습과 같았을 것입니다.
만일 성령의 사역이 없었다면 모든 바다는 사해일 수밖에 없고 원시적이고 혼란할 수밖에 없고, 어두움으로 뒤덮여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로 운행하심으로 혼돈하던 지구는 질서를 가지게 되었고 생명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은 피조물의 모양을 형성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령은 하늘을 장식하였고 그의 손으로 은하수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신비스럽게 만들어진 달과 별들을 하늘에 배열하였고 또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십니다.
2. 인간 창조
우리는 여기서 인간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연관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1) 인간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2) 창조된 인간은 어떤 존재이었는가?
1) 인간은 어떻게 창조되었나?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이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① 인간의 죽은 몸은 땅의 먼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② 인간은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이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시고 거기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존 오웬은 욥 33:4을 근거로 하여 이 구절의 사역을 성령과 연관시킵니다. “(욥 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의 몸과 영을 창조하신 일은 모두 성령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웬은 인간이 이렇게 창조된 의의를 헌신과 연관시킨다. “이와 같이 사람은 성령에 의해 조성되었고 온전히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81).
2) 창조된 인간은 어떤 존재이었는가?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들은 사람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사람 자신 안에 그로부터 하나님이 참으로 계신다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혜로우시고, 선하시며,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순수하시고 순결하시며, 자유롭고, 그 무엇의 통제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불의나 거짓, 또는 순결하지 않음과 같은 그의 성품에 반하는 모든 무질서에 대해 그냥 계실 수 없으시며,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에 반하는 이런 무질서에 대해 심판을 하시고 쓸어버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6).
아담이 성령을 지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멜랑히톤은 타락 이후와 타락 이전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그들은 성령과 이전에 가졌던 놀라운 덕들을 상실한 것이다”(179)라는 말이나 “타락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의 의지와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과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셨고, 따라서 사람의 모든 성향과 윤리가 제대로 되었었는데, 타락 이후에는 성령이 떠나시므로 사람의 의지와 마음 가운데 거짓된 불길과 악성 종양이 자라게 되었고 잘못된 사랑과 분노, 두려움과 불안이 마음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180).
B. 보존과 완성의 사역
1. 자연만물 보존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심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자연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상관하시며 다스린다는 이 사실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원론적인 삶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평일에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듯이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만물과 인간을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外飾者들이라고 칭한다.
* 과학 연구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등)
* 환경보존 운동
2. 인간의 보존
-잉태와 자연의 황폐로 인한 고난
-죽음으로 생명이 단축됨
-자연적 신인식에 대한 책임
-도덕적 무능력
멜란히톤은 그의 저서 ‘신학총론’에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 성령이 그를 완전히 떠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소위 자연인은 성령과 무관한 듯이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짐승이나 사탄처럼 되었는가? 성경은 인간은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가르칩니다. 문제는 원래 창조함을 받았을 때 주어진 능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런 인간을 보존하시기 위해 성령은 어떤 사역을 하시는가?
문제는 타락 후에도 아직 인간에게 약간이나마 남아 있는 자연적 능력을 멜란히톤이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에로 떨어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거두셨고, 인간의 자연적 능력도 아주 약화되었다. 그의 이해력이 남아있기는 하나 그 빛이 아주 약해졌다. 그래서 사람이 수를 사용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알 수는 있으나, 그 힘이 아주 약해진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도 비관적이다: “사람의 마음과 의지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선한 덕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 경외가 모두 상실되었다.”
멜란히톤은 타락 후의 이런 인간을 가리켜 “비록 그들이 아직 중생되지 않았고, 성령을 통해서 성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몸의 외적인 지체들을 움직이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149f.). 멜란히톤은 인간이 아직 이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150). 그러면 멜란히톤은 이 자유의지를 성령의 은사로 보는가?
타락한 인간을 성령께서 보존하고 계신다는 내용은 칼빈의 발언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 2권에서 타락한 인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도 모르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있으며(II,1,2).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켰음을 주목하고(II,1,9), 제 2권 2장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노예처럼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은 남아 있음과(II,2,12), 인간의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여(II,2,14-16) 인류의 문화 내지 문명도 성령의 보존 사역과 연관됨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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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회 다운로드 | DATE : 2003-11-13 09: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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