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제 2 강 - 성례전과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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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제 2강
성령과 성례전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인에게 적용되어 예수의 생명이 그에게 전달되면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들어가게 되는 관문이 바로 세례식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가지 성만찬의 공동체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만찬식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살펴본다.
a. 세례와 성령
세례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자연인들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가르쳐 그들을 삼위일체 안으로 집어넣는 사건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poreuqevnte" ou\\n maqhteuvsate pavnta ta; e[qnh, baptivzonte" aujtou;" eij" to; o[noma tou' patro;" kai; tou' uiJou' kai; tou' aJgivou pneuvmato",)
여기 “이름으로”(eij" to; o[noma)는 자연인이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스웨트는 이런 사실을 주목했다: “만일 이 말이 단순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 속으로”고 씌어져 있었다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세례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삼위일체와 단순히 친교의 관계를 수립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세례받은 자는 삼위일체와 하나가 되었을 뿐아니라 그는 이 삼위일체를 위해 헌신되었기 때문에 구별된다” 이 삼위일체와 교제를 가지는 상태로 들어간 모든 무리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자연인이 복음을 받고 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은 어떤 역할을 했나 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받는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1) 세례식 배후에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있었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문제는 롬 6장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세례가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가져옴을 보여준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 구절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 성령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성령의 사역을 본다. 그는 기독교 강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8)”
바울의 이런 발언은 골로새서의 발언과 일치한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분명히 성령의 사역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2)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빌립의 전도 사역에 잘 나타난다.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또 그가 구스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것도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 8:37) (없 음) (행 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이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이 역사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이 믿음이 예수를 붙잡음을 통해 예수와 연합된 것이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이와 같은 構圖에서(말씀 전함→ 성령받음 →믿음) 일어났으나 단지 다른 것은 사도들이나 빌립의 경우 예수의 대리인이 복음을 전한 것이라며 여기는 예수 자신이 죄인에게 직접 말씀하신 데 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예수의 말씀하심 → 아나니아의 전달 → 성령충만→ 세례 → 강건해짐.
-3) 복음을 전함 →듣고 믿음 → 세례를 베품 → 안수 → 성령의 임하고, 방언, 예언의 은사가 나타남. 즉 세례를 받은 다음 특별한 은사가 나타남.
“(행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4)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5)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세례를 베품: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던 사건
① 말씀을 전함 ② 성령이 임함 ③ 성령의 은사 믿음 ④ 세례를 베품
“(행 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행 11: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세례를 받음 → 그리스도로 옷입음
-6) 세례식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원된다. 칼빈은 이런 구조를 잘 설명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 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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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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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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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성령◎
▤▤▤ 거룩케함 ◎◎◎◎
칼빈은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Inst III,15,6).
-세례때 성령은 어떻게 역사할까? Davies는 세례를 중생인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수단방편으로 정의하고 할례의 개념을 이용하여 해석한다. 그는 말하기를 “마음의 할례는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문자 안에서 일어나는 할례가 아니다(롬 2:28)” 즉 세례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Davies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마음의 할례를 세 가지 표시로 설명한다: 물뿌림, 영, 사랑. “(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Davies는 세례에서도 이런 세 가지 표시를 발견한다. 먼저 세례는 물과 더불어 일어난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성령을 받은 것은 세례의 결과이다.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부어졌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세례와 성령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는 어떤 것일까? 우선 던질 질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역사할까?’이다. Davies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세례 때 받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여 속사람이 변한다.” 이 말은 고전 12:13을 인용하여 말한 다음과 같은 Davies의 말과 일치한다: “세례는 개인을 성령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하는 수단이다”(Davies, 107).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즉 성령의 사역이 먼저일까 세례 사건이 먼저일까? 성경의 대부분의 구절들은 동시사건임을 암시한다.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때 성령을 받고 살다가 육신적인 방법으로 끝을 내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Davies의 발언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세례는 성령 안에서 중생과 새롭게 함의 목욕이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개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았다.(108) 세례는 개인에게 특별한 은사를 나누어주는데 필요한 수단방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령은 그 사람을 분리된 것으로부터 하나됨으로 인도한다. 즉 성령은 개인을 하나님과 내면적인 관계를 지니게 하여 이 관계 속에서 세워지도록 만든다(108).
-세례의 목적
세례는 개인을 살아있는 유기체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거나 접붙이는 수단이다. 롬 6:3이하에 의하면,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되게 하는 사건이다(108). 세례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죄의 몸을 죽이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으로 살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109)
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을 통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113).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와 함께 신적인 실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앉혔기 때문이다(엡 2: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성령 안에서 중생의 목욕과 새롭게 함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114).
-산모의 아기 잉태와 세례의 비교
세례와 중생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Davies는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는 것을 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연관시켜 중생을 설명했다. “육체적인 출생에 있어서 어미의 태는 인간의 정자를 잉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그를 경륜에 따라 몸으로 형체를 만드신다. 마찬가지로 세례에서 물은 태어날 자의 태이다. 중생에서는 성령의 은혜가 세례를 받는 자를 형성시키신다. 그리고 그를 완전한 새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115).
Davies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그리스도인들의 중생을 비교하면서 세례와 중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령께서 이런 중생을 일으키시므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속에서 주님의 인성이 성육신하심의 재창조를 세례의 물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재창조되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병행이 있음”(115)을 지적했다.
-신약성경에서는 세례의 중생이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로 옷입으로 표현된다. 첫 창조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니 빛이 창조된 것처럼 세례를 받는 순간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일은 ‘첫 창조’때 성령께서 수면 위로 운행하는 것처럼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운행하여 중생했다고 한다.
세례를 통한 중생은 ‘그리스도로 옷 입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로 옷입음’은 두 번 나온다: 롬 13:14; 갈 3:27. 후자(갈 3:27)에서 이 ‘옷입음’과 세례가 연관되어 있다(117). ‘그리스도 옷입음’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입을을 의미하며 이것은 세례 때 일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례 때, 우리 인간의 본성을 “물과 성령으로 인한 중생을 통해” 새롭게 각인하셨다(117). 이 말은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세례 때 성령을 통해 중생되는 것이다.” Davies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이 새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새사람의 장본인이다.”라고 말했다. “세례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선하심 곧 그의 구원하는 행위의 열매들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다. 따라서 세례란 우리가 메시아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단이며 성령의 은사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접붙여지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는 사건이며 중생하고 새롭게 되며 죄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도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역사가 동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b. 성찬식과 성령
세례와 성만찬의 관계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서 우리를 중생시키신 후에 교회라는 그의 공동체에 접붙이시며 택함을 받은 그의 권속으로 만드신다. 그와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서 생명을 가지게 하시고, 우리의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양식을 주심으로서 지혜있는 家長의 책임을 다하신다”(Inst IV,17,1).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령이 항상 역사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성만찬식 때 또는 성만찬 공동체의 삶을 살 때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謝禮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 눅 22:19)
고전 11:24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요 6:32-35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 자체는 성만찬식 때 성령이 어떻게 참여자들에게 역사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줄 사이에서 성령의 역사를 간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이미 바쳐진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Inst IV,17,1). 칼빈의 이 말 속에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이 효력을 나타내게 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칼빈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되는 신비를 체험하는 것에서도 엿보인다.
-칼빈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Inst IV,17,2)을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로 보는데 그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Inst IV,17,2). 이 교환이 일어나게 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먹는다(Inst IV,17,5)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가 그 떡을 끊임없이 먹을 때에 그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고 그 떡의 힘을 느낀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 떡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하라고 가르치지만(엡 3:17),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마음 속에 계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사도의 말을 믿음의 현저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믿음에 의해 신자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심으로써(요 6:48z0,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존할 뿐 아니라 떡을 먹으면 몸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 7-13)
§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례는 공문서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과 같은 것인데 대적들은 그의 뜻을 확증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을 조롱하며 비웃는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러 성례식 때 말씀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요 믿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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ꠐ자비와 ꠐ ꠛ (떡, 포도주) ꠛ←← │ 나 ←←믿음
ꠐ은혜의 약속 ꠐ→→ꠛ성례 ꠛ→→ │ │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ꠗ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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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印章과 같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하나님의 은총 →→ 나에게 →→ 믿음이 지탱성장
확증
§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행 8:37). 여기 ‘온전히’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칼빈은 여기서 믿는 자의 마음의 방향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시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38: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칼빈은 이것은 ‘두 마음으로 말하는 것’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한다.
-대적들의 이해: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부언한다.” 칼빈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 세 가지를 인정한다: “①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②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③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 앞에 나타날 뿐, 마움 속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내적 교사인 성령이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 역사하는 힘, 성례: 임무. 성령이 없으면 성례는 무의미하다.
성령 →→→ 마음, 감정→→→→ 성례속으로
에 침투 ←←←← 들어온다.
성령→→→→경건한 마음에 →→→→→→ 강한 믿음
믿음을 잉태, ↑
유지, 성장, 확립 ↑
성례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 可視的
------------
□□□□□□□ 마음속
§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강화된다” 칼빈은 이런 마음의 준비작업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의지의 역할을 언급한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설득할 때과 같은 일을 하신다. 설득을 할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①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②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교훈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있어야 하고, ③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의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있어야 한다.
-⑴ 성령께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⑵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⑶ 순종해야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 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신지식 →→믿음 강화,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중간적인 광명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신다.
§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말씀이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말씀 사역(전도)에 성령이 역사해야(조명, 감동) 열매가 있듯이 성례도 그러하다. 농부가 아무리 일해도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지 않으면 무용하듯이 말이다.
§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이를테면 영생의 은사를 빼앗을 때는 생명 나무를 제거하심. (창 3:22)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약속의 상징이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고 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성례의 한 가지 기능: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눈앞에 놓고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 13. 사크라맨툼(Sacramentum)이라는 말
-군인이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 이 때 충성심을 약속하고 군대복무를 고백하는 것 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軍旗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Illo sacramento fidem suam obstringunt Imperatori).
-우리가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례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토가를 입고 희랍인들은 팔리움을 입었다 등등.
-“주께서는 ‘사크라멘타’(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즉 이것은 우리의 고백을 확인한다. 고대인들은 사크라멘툼은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으로 이해함.
성례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 14-17
§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여기서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진 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①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함, 칼빈은 이들을 믿음과 관계없는 義를 약속함으로써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하면서 마귀적이라고 단정한다. ② 성례를 義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성례가 반드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印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
§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옯겨서는 안된다.”
▥▥▥▥▥▥▥ 외형, 표징
□□□□□□□ 진상, 본체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관계와 같다. 둘은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동시에 혼합되지 않는다.
-어거스틴 曰: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 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유다에게는 독이 되었다.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이다. 성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롬바르드는 잘못이다.
-칼빈은 성례를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하는 수단으로 표현한다.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변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견고하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례는 그 진상과 분리하면 무가치한 것이 되고 또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함.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인 양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전적으로 말살되고 마는 것이다.
§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이런 성례는 두껑을 여는 역할을 하는 믿음으로 받아야 함을 말한다.
하늘원형 성령
↓ ↓
↓ 나
↓ ↙
↓ ↙
성례→→→→→ 은혜알림, 확증
(使者, 담보)
-칼빈은 미신적 이해를 경고한다: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기쁜 소식을 전하는 使者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으나 부요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 확증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이 성령은 은혜를 가져오는데 이때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靈의 능력이 임재한다. 성례의 효과를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한다.
-목사의 가시적 집행 ◁◁◁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
-모세의 가시적 사역 ◁◁◁ ▶▶▶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심, 보이지 않는 은혜의 성화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 18-20
§ 18. 광의의 성례
-성례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① 생명나무: 영생의 보증,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함(창 2:9; 3:22)
② 무지개: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표(창 9:13-16)
하나님의 약속
↙ ↙
◐◐◐◐ ↙
(무지개) ↙
↖↘ ↙
↖↘ ↙
인식↖↘↙
나
③ 아브라함에게 연기나는 풀무를 보이심(창 15:17)
④ 기드온의 양털 이슬(삿 6:37-40)
⑤ 히스기야 일영표(왕하 20:9-11; 사 38:8)
칼빈이 성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유가증권이 가장 유명하다. 은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전자는 자연상태에 있으나 후자는 官印이 찍히어 새로운 평가를 받는 것이다.
§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주께서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主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게 하기 위한 것임.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 이 사실을 확증한다: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뭉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 사탄은 이런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 이를테면 통일교의 피가름 합동결혼식, 은혜파의 성만찬.
-성례식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
-칼빈은 성례식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상호 협약이 게제 됨을 지적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킨다. 우리 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
-칼빈은 성례식 속에서 성화 과정을 본다.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킨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 8-10
§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그리스도의 신분
-생명의 말씀(요 1:1): 생명을 주는, 생명의 원천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속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그들에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힘을 불어 넣으셨다”
-육이 되심: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받으려면 교제에 영접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가득함. “생명의 그 원천이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동참하리란 것을 알려 주신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이실 뿐 아니라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취하신 육신에 그의 힘을 부으셔서 거기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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꠳ 생명이신 그리스도가꠳ 영원한 생명에 ꠗ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ꠙ
꠳ 우리가운데 오심 ꠳ 대한 소망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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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상태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어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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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
↓
↓
☆☆☆☆☆ .◐◐◐◐◐ 복 ▤▤▤▤▤
☆그리스☆→→→→◐떡과◐◐→→→→▤▤▤▤▤
☆도의☆☆ .◐포도주◐ ▤▤나▤▤
☆생명☆☆←←←←◐◐◐◐◐←←←←▤▤▤▤▤
☆☆☆☆☆ .◐◐◐◐◐ 믿음 ▤▤▤▤▤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킨다
Inst IV,17,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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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뜻
-그리스도의 살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힘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거기에 우리에게 전달할 생명이 충만하므로 생명을 준다고 이해한다. 칼빈은 여기서 요 5:26에 대한 키릴의 말을 인용하여 성부가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그리스도인에게 나누어 주게했다고 한다. “그의 인성에도 생명이 충만해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한 사람은 동시에 생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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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 그리스도인
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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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생명이 내려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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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안에 계시던 생명이 내려오심
↓
↓
☆☆☆☆☆ 생명
☆▣▣▣☆→→→→ ▤▤▤
☆▣▣▣☆ ▤나▤ 내게 믿음을 주신 분은 성령이다
☆▣▣▣☆←←←← ▤▤▤ 이 믿음으로 생명의 떡에 참여함
☆☆☆☆☆ 믿음
육신의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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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포도주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요 6:48,51,55). “신자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가슴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칼빈은 샘의 비유로 ‘생명을 준다’를 설명한다. 샘물의 원천이 되시는 성부로부터 물이 수로를 통해(그리스도) 흘러 나와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살과 피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의 지체인 교회와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을 통해 생명의 전달에 대해 설명한다.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칼빈은 이 비밀이 크도다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연관시켜 해석했다.
§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칼빈은 신비한 연합 이론에 근거하여 성찬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가를 보여 준다. 그는 떡과 포도주가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는 것 사이의 유추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멀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칼빈이 인간 지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의 생명을 우리의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시키듯이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성찬에서도 증거하시고 印을 치신다”. 칼빈은 성찬의 이런 효험이 발생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고전 10:16. 성찬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표징을 보여줌으로써 보인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본체와 우리가 관계한다는 말이다.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 32-34
§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비밀을 인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언급한다.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하기보다 경험한다” H. Boehmer에 의하면, 루터는 ‘그의 선생이신 主와의 개인적인 친교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찬에 의해서 실지로 체험하고자 하는 내면적 요구를 느꼈다. 쯔빙글리는 이 요구를 전연 이해하지 못했다. 칼빈은 루터가 간파한 바와 같이 이 요구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느꼈다’.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나와의 상호관계 차원에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 6:53). 나는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 먹게한다”
-“몸의 임재는 이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임재인데, 이 임재는 강력한 권능과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부동의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도 영생 불사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칼빈은 이 때 믿음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칼빈은 범신론적인 견해를 배척한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혼과 혼합된다느니 우리의 영혼에 주입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말하기를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의 본질에서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으신다면 --참으로 그의 생명 자체를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어 둔다” 칼빈은 이들이 문제의 본질을 간과했음을 지적한다. “일찌기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가, 또 일찌기 흘리신 그의 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소유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우리도 즐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는 방법: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둠으로써 육적 방법으로 먹고,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라고 함으로써 영적 방법으로 먹는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 ...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서 얻어갈 뿐이다.”
성령과 성례전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인에게 적용되어 예수의 생명이 그에게 전달되면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들어가게 되는 관문이 바로 세례식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가지 성만찬의 공동체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만찬식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살펴본다.
a. 세례와 성령
세례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자연인들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가르쳐 그들을 삼위일체 안으로 집어넣는 사건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poreuqevnte" ou\\n maqhteuvsate pavnta ta; e[qnh, baptivzonte" aujtou;" eij" to; o[noma tou' patro;" kai; tou' uiJou' kai; tou' aJgivou pneuvmato",)
여기 “이름으로”(eij" to; o[noma)는 자연인이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스웨트는 이런 사실을 주목했다: “만일 이 말이 단순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 속으로”고 씌어져 있었다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세례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삼위일체와 단순히 친교의 관계를 수립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세례받은 자는 삼위일체와 하나가 되었을 뿐아니라 그는 이 삼위일체를 위해 헌신되었기 때문에 구별된다” 이 삼위일체와 교제를 가지는 상태로 들어간 모든 무리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자연인이 복음을 받고 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은 어떤 역할을 했나 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받는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1) 세례식 배후에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있었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문제는 롬 6장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세례가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가져옴을 보여준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 구절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 성령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성령의 사역을 본다. 그는 기독교 강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8)”
바울의 이런 발언은 골로새서의 발언과 일치한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분명히 성령의 사역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2)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빌립의 전도 사역에 잘 나타난다.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또 그가 구스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것도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행 8:37) (없 음) (행 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이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이 역사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이 믿음이 예수를 붙잡음을 통해 예수와 연합된 것이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이와 같은 構圖에서(말씀 전함→ 성령받음 →믿음) 일어났으나 단지 다른 것은 사도들이나 빌립의 경우 예수의 대리인이 복음을 전한 것이라며 여기는 예수 자신이 죄인에게 직접 말씀하신 데 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예수의 말씀하심 → 아나니아의 전달 → 성령충만→ 세례 → 강건해짐.
-3) 복음을 전함 →듣고 믿음 → 세례를 베품 → 안수 → 성령의 임하고, 방언, 예언의 은사가 나타남. 즉 세례를 받은 다음 특별한 은사가 나타남.
“(행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행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4)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5)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세례를 베품: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던 사건
① 말씀을 전함 ② 성령이 임함 ③ 성령의 은사 믿음 ④ 세례를 베품
“(행 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행 11: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세례를 받음 → 그리스도로 옷입음
-6) 세례식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원된다. 칼빈은 이런 구조를 잘 설명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 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 한다”
▣▣▣▣▣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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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중보자◈
↑↓ ◈◈◈◈◈
↗↙
▤▤▤ ◎◎◎◎
▤나▤←←←←←. ◎성령◎
▤▤▤ 거룩케함 ◎◎◎◎
칼빈은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Inst III,15,6).
-세례때 성령은 어떻게 역사할까? Davies는 세례를 중생인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수단방편으로 정의하고 할례의 개념을 이용하여 해석한다. 그는 말하기를 “마음의 할례는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문자 안에서 일어나는 할례가 아니다(롬 2:28)” 즉 세례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Davies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마음의 할례를 세 가지 표시로 설명한다: 물뿌림, 영, 사랑. “(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Davies는 세례에서도 이런 세 가지 표시를 발견한다. 먼저 세례는 물과 더불어 일어난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성령을 받은 것은 세례의 결과이다.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부어졌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세례와 성령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는 어떤 것일까? 우선 던질 질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역사할까?’이다. Davies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세례 때 받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여 속사람이 변한다.” 이 말은 고전 12:13을 인용하여 말한 다음과 같은 Davies의 말과 일치한다: “세례는 개인을 성령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하는 수단이다”(Davies, 107).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즉 성령의 사역이 먼저일까 세례 사건이 먼저일까? 성경의 대부분의 구절들은 동시사건임을 암시한다.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때 성령을 받고 살다가 육신적인 방법으로 끝을 내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Davies의 발언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세례는 성령 안에서 중생과 새롭게 함의 목욕이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개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았다.(108) 세례는 개인에게 특별한 은사를 나누어주는데 필요한 수단방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령은 그 사람을 분리된 것으로부터 하나됨으로 인도한다. 즉 성령은 개인을 하나님과 내면적인 관계를 지니게 하여 이 관계 속에서 세워지도록 만든다(108).
-세례의 목적
세례는 개인을 살아있는 유기체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거나 접붙이는 수단이다. 롬 6:3이하에 의하면,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되게 하는 사건이다(108). 세례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죄의 몸을 죽이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으로 살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109)
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을 통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113).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와 함께 신적인 실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앉혔기 때문이다(엡 2: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 성령 안에서 중생의 목욕과 새롭게 함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114).
-산모의 아기 잉태와 세례의 비교
세례와 중생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Davies는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는 것을 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연관시켜 중생을 설명했다. “육체적인 출생에 있어서 어미의 태는 인간의 정자를 잉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그를 경륜에 따라 몸으로 형체를 만드신다. 마찬가지로 세례에서 물은 태어날 자의 태이다. 중생에서는 성령의 은혜가 세례를 받는 자를 형성시키신다. 그리고 그를 완전한 새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115).
Davies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그리스도인들의 중생을 비교하면서 세례와 중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령께서 이런 중생을 일으키시므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속에서 주님의 인성이 성육신하심의 재창조를 세례의 물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재창조되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병행이 있음”(115)을 지적했다.
-신약성경에서는 세례의 중생이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로 옷입으로 표현된다. 첫 창조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니 빛이 창조된 것처럼 세례를 받는 순간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일은 ‘첫 창조’때 성령께서 수면 위로 운행하는 것처럼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운행하여 중생했다고 한다.
세례를 통한 중생은 ‘그리스도로 옷 입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로 옷입음’은 두 번 나온다: 롬 13:14; 갈 3:27. 후자(갈 3:27)에서 이 ‘옷입음’과 세례가 연관되어 있다(117). ‘그리스도 옷입음’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입을을 의미하며 이것은 세례 때 일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례 때, 우리 인간의 본성을 “물과 성령으로 인한 중생을 통해” 새롭게 각인하셨다(117). 이 말은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세례 때 성령을 통해 중생되는 것이다.” Davies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이 새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새사람의 장본인이다.”라고 말했다. “세례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선하심 곧 그의 구원하는 행위의 열매들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다. 따라서 세례란 우리가 메시아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단이며 성령의 은사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접붙여지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는 사건이며 중생하고 새롭게 되며 죄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도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역사가 동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b. 성찬식과 성령
세례와 성만찬의 관계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서 우리를 중생시키신 후에 교회라는 그의 공동체에 접붙이시며 택함을 받은 그의 권속으로 만드신다. 그와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서 생명을 가지게 하시고, 우리의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양식을 주심으로서 지혜있는 家長의 책임을 다하신다”(Inst IV,17,1).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령이 항상 역사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성만찬식 때 또는 성만찬 공동체의 삶을 살 때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謝禮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 눅 22:19)
고전 11:24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요 6:32-35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 자체는 성만찬식 때 성령이 어떻게 참여자들에게 역사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줄 사이에서 성령의 역사를 간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이미 바쳐진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Inst IV,17,1). 칼빈의 이 말 속에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이 효력을 나타내게 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칼빈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되는 신비를 체험하는 것에서도 엿보인다.
-칼빈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Inst IV,17,2)을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로 보는데 그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Inst IV,17,2). 이 교환이 일어나게 하는데 성령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먹는다(Inst IV,17,5)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가 그 떡을 끊임없이 먹을 때에 그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고 그 떡의 힘을 느낀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 떡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하라고 가르치지만(엡 3:17),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마음 속에 계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사도의 말을 믿음의 현저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믿음에 의해 신자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심으로써(요 6:48z0,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존할 뿐 아니라 떡을 먹으면 몸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 7-13)
§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례는 공문서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과 같은 것인데 대적들은 그의 뜻을 확증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을 조롱하며 비웃는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러 성례식 때 말씀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요 믿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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ꠐ자비와 ꠐ ꠛ (떡, 포도주) ꠛ←← │ 나 ←←믿음
ꠐ은혜의 약속 ꠐ→→ꠛ성례 ꠛ→→ │ │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ꠗ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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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印章과 같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하나님의 은총 →→ 나에게 →→ 믿음이 지탱성장
확증
§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행 8:37). 여기 ‘온전히’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칼빈은 여기서 믿는 자의 마음의 방향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시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38: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칼빈은 이것은 ‘두 마음으로 말하는 것’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한다.
-대적들의 이해: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부언한다.” 칼빈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 세 가지를 인정한다: “①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②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③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 앞에 나타날 뿐, 마움 속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내적 교사인 성령이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 역사하는 힘, 성례: 임무. 성령이 없으면 성례는 무의미하다.
성령 →→→ 마음, 감정→→→→ 성례속으로
에 침투 ←←←← 들어온다.
성령→→→→경건한 마음에 →→→→→→ 강한 믿음
믿음을 잉태, ↑
유지, 성장, 확립 ↑
성례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 可視的
------------
□□□□□□□ 마음속
§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강화된다” 칼빈은 이런 마음의 준비작업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의지의 역할을 언급한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설득할 때과 같은 일을 하신다. 설득을 할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①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②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교훈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있어야 하고, ③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의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있어야 한다.
-⑴ 성령께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⑵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⑶ 순종해야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 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신지식 →→믿음 강화,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중간적인 광명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신다.
§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말씀이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말씀 사역(전도)에 성령이 역사해야(조명, 감동) 열매가 있듯이 성례도 그러하다. 농부가 아무리 일해도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지 않으면 무용하듯이 말이다.
§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이를테면 영생의 은사를 빼앗을 때는 생명 나무를 제거하심. (창 3:22)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약속의 상징이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고 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성례의 한 가지 기능: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눈앞에 놓고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 13. 사크라맨툼(Sacramentum)이라는 말
-군인이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 이 때 충성심을 약속하고 군대복무를 고백하는 것 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軍旗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Illo sacramento fidem suam obstringunt Imperatori).
-우리가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례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토가를 입고 희랍인들은 팔리움을 입었다 등등.
-“주께서는 ‘사크라멘타’(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즉 이것은 우리의 고백을 확인한다. 고대인들은 사크라멘툼은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으로 이해함.
성례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 14-17
§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여기서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진 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들은 ①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주장함, 칼빈은 이들을 믿음과 관계없는 義를 약속함으로써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하면서 마귀적이라고 단정한다. ② 성례를 義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성례가 반드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印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
§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옯겨서는 안된다.”
▥▥▥▥▥▥▥ 외형, 표징
□□□□□□□ 진상, 본체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사이의 관계와 같다. 둘은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동시에 혼합되지 않는다.
-어거스틴 曰: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 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유다에게는 독이 되었다.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이다. 성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롬바르드는 잘못이다.
-칼빈은 성례를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하는 수단으로 표현한다.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변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견고하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례는 그 진상과 분리하면 무가치한 것이 되고 또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함.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인 양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전적으로 말살되고 마는 것이다.
§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이런 성례는 두껑을 여는 역할을 하는 믿음으로 받아야 함을 말한다.
하늘원형 성령
↓ ↓
↓ 나
↓ ↙
↓ ↙
성례→→→→→ 은혜알림, 확증
(使者, 담보)
-칼빈은 미신적 이해를 경고한다: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기쁜 소식을 전하는 使者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으나 부요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 확증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이 성령은 은혜를 가져오는데 이때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靈의 능력이 임재한다. 성례의 효과를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한다.
-목사의 가시적 집행 ◁◁◁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
-모세의 가시적 사역 ◁◁◁ ▶▶▶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심, 보이지 않는 은혜의 성화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 18-20
§ 18. 광의의 성례
-성례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① 생명나무: 영생의 보증,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함(창 2:9; 3:22)
② 무지개: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표(창 9:13-16)
하나님의 약속
↙ ↙
◐◐◐◐ ↙
(무지개) ↙
↖↘ ↙
↖↘ ↙
인식↖↘↙
나
③ 아브라함에게 연기나는 풀무를 보이심(창 15:17)
④ 기드온의 양털 이슬(삿 6:37-40)
⑤ 히스기야 일영표(왕하 20:9-11; 사 38:8)
칼빈이 성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유가증권이 가장 유명하다. 은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전자는 자연상태에 있으나 후자는 官印이 찍히어 새로운 평가를 받는 것이다.
§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주께서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主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게 하기 위한 것임.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 이 사실을 확증한다: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뭉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 사탄은 이런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 이를테면 통일교의 피가름 합동결혼식, 은혜파의 성만찬.
-성례식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
-칼빈은 성례식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상호 협약이 게제 됨을 지적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킨다. 우리 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
-칼빈은 성례식 속에서 성화 과정을 본다.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킨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 8-10
§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그리스도의 신분
-생명의 말씀(요 1:1): 생명을 주는, 생명의 원천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속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그들에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힘을 불어 넣으셨다”
-육이 되심: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받으려면 교제에 영접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가득함. “생명의 그 원천이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동참하리란 것을 알려 주신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이실 뿐 아니라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취하신 육신에 그의 힘을 부으셔서 거기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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꠳ 생명이신 그리스도가꠳ 영원한 생명에 ꠗ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ꠙ
꠳ 우리가운데 오심 ꠳ 대한 소망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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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상태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어 가짐
▣▣▣▣
▣성령▣
▣▣▣▣
▣▣▣▣
↓
↓
☆☆☆☆☆ .◐◐◐◐◐ 복 ▤▤▤▤▤
☆그리스☆→→→→◐떡과◐◐→→→→▤▤▤▤▤
☆도의☆☆ .◐포도주◐ ▤▤나▤▤
☆생명☆☆←←←←◐◐◐◐◐←←←←▤▤▤▤▤
☆☆☆☆☆ .◐◐◐◐◐ 믿음 ▤▤▤▤▤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킨다
Inst IV,17,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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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뜻
-그리스도의 살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힘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거기에 우리에게 전달할 생명이 충만하므로 생명을 준다고 이해한다. 칼빈은 여기서 요 5:26에 대한 키릴의 말을 인용하여 성부가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그리스도인에게 나누어 주게했다고 한다. “그의 인성에도 생명이 충만해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한 사람은 동시에 생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
○■■■■○ ■■■■ ꠑꠚꠚꠚꠚꠚ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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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ꠗꠚꠚꠚꠚꠚꠙ
○○○○○○ 성자 그리스도인
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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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생명이 내려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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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안에 계시던 생명이 내려오심
↓
↓
☆☆☆☆☆ 생명
☆▣▣▣☆→→→→ ▤▤▤
☆▣▣▣☆ ▤나▤ 내게 믿음을 주신 분은 성령이다
☆▣▣▣☆←←←← ▤▤▤ 이 믿음으로 생명의 떡에 참여함
☆☆☆☆☆ 믿음
육신의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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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포도주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요 6:48,51,55). “신자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가슴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칼빈은 샘의 비유로 ‘생명을 준다’를 설명한다. 샘물의 원천이 되시는 성부로부터 물이 수로를 통해(그리스도) 흘러 나와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살과 피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의 지체인 교회와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을 통해 생명의 전달에 대해 설명한다.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칼빈은 이 비밀이 크도다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연관시켜 해석했다.
§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칼빈은 신비한 연합 이론에 근거하여 성찬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가를 보여 준다. 그는 떡과 포도주가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는 것 사이의 유추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멀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칼빈이 인간 지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의 생명을 우리의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시키듯이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성찬에서도 증거하시고 印을 치신다”. 칼빈은 성찬의 이런 효험이 발생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고전 10:16. 성찬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표징을 보여줌으로써 보인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본체와 우리가 관계한다는 말이다.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 32-34
§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비밀을 인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언급한다.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하기보다 경험한다” H. Boehmer에 의하면, 루터는 ‘그의 선생이신 主와의 개인적인 친교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찬에 의해서 실지로 체험하고자 하는 내면적 요구를 느꼈다. 쯔빙글리는 이 요구를 전연 이해하지 못했다. 칼빈은 루터가 간파한 바와 같이 이 요구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느꼈다’.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나와의 상호관계 차원에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 6:53). 나는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 먹게한다”
-“몸의 임재는 이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임재인데, 이 임재는 강력한 권능과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부동의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도 영생 불사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칼빈은 이 때 믿음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칼빈은 범신론적인 견해를 배척한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혼과 혼합된다느니 우리의 영혼에 주입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말하기를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의 본질에서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으신다면 --참으로 그의 생명 자체를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어 둔다” 칼빈은 이들이 문제의 본질을 간과했음을 지적한다. “일찌기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가, 또 일찌기 흘리신 그의 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소유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우리도 즐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는 방법: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둠으로써 육적 방법으로 먹고,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라고 함으로써 영적 방법으로 먹는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 ...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서 얻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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