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출8강(15:22-16:36)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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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출애굽기 8 강
말씀 | 출애굽기 15:22-16:36
요절 | 출애굽기 16:4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광야는 ‘텅 비고 아득하게 너른 들’로서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끝도 없이 넓지만 텅 비어 있어서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또한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땅인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주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즉 광야의 위력이 대단할지라도 광야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쁨의 장소가 됩니다. 선교사님들이 처음 그 나라에 갔을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학생들도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 광야는 죽음으로 몰아가는 불신과 불순종과 배반의 길을 가든지, 반대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밀월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는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리시는 힘을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15:22-27).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기쁨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으면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먹는 것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어느 정도 충당이 되었지만 물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탐욕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을 때 물을 발견했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 이름을 마라 즉 ‘쓰다’, ‘괴롭다’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바로가 왕이었을 때 괴롭고 쓰디쓴 상황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가 물에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로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법도와 율례를 정하여 주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 이 말씀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만들기 위해서 던져 넣었던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사건은 쓴 인생이 단 인생으로 바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 인생길에도 견디기 힘든 쓴 물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힘을 다해서 섬겼는데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질병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 대해서 쓴 뿌리가 생깁니다. 화가 납니다.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생깁니다. 원망의 말을 쏟아내게 됩니다. 죽도록 달려왔는데 내 인생에 남은 것은 가난과 사람들의 무시, 인간 갈등뿐일 때가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는데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때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이런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그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쓴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쓴 물을 주신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쓴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묘약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 대신에 내 이름을 넣어 보면 내가 사랑의 사람인가 아닌가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랑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을 넣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의 쓴 물이 달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배울 때 그는 우리의 쓴 마음을 단 마음으로 점차 바꾸어 가십니다. 광야에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날로 새롭게 변해가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는 주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에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사병의 실수로 수류탄 사고를 당해 한 쪽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대학에 다닐 대 사귀던 여자 친구가 병원으로 병문안을 온다고 해서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와서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았습니다. 이 남자는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여자 친구에게 “팔이 없는 나를 지금도 좋아하느냐?”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물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묻는 질문에 여자 친구는 “나는 너의 팔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팔이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얻었을 때 정말로 천지를 다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큰 파도처럼 밀어닥쳤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는 그때부터 병원 근방에 방을 얻어놓고 병원에 드나들면서 간호에 간호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한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야 하는 딸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의 딸에게 그 남자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아버지가 한 팔을 잃으신다면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아버지도 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제대하여 한 팔이 없는 것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하여 린스와 샴푸를 합친 효과를 내는 하나로를 개발했고 20세부터 80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2080 치약을 개발하고,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한 앱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워 통신사의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서환 전 KTF 부사장, 전 애경산업 이사, 현재 세라잼헬스앤뷰티 대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 사건을 지나고 나니 풍성한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먼저 마라라는 결핍으로 인도하시고 그 후에 풍성한 엘림으로 인도하실까요? 인생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풍성한 엘림보다는 결핍이 있는 마라에 거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결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할 삶을 살 때에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축복을 도구 삼아 묵묵히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엘림을 사막이라는 광야에서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규례와 계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마라에서 얻은 단물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공급하실 책임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 훈련(16:1-2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입니다. 이제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굶주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들여보내시는 광야는 결코 세상의 것을 먹으며 완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결핍은 당연한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 그들은 종살이의 고통을 겪으며 겨우 먹고 살던 시절이 호화롭게 보일 정도로 현재 광야 생활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종살이를 하는 고통 속에서라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광야의 자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굶주림도 굶주림이지만 아이들의 주림으로 인한 울부짖음을 들을 때 쉽게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재 없이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 속에는 질책이 아닌 책임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4,5).”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두게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이를 통해 율법 준수를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즉 먹는 것만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시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구원이 끝이 아니라 책임과 소명으로의 부르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는 것은 목표가 있고,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이루어야 할 소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통해 율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세상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뭐지?” 히브리어로 ‘만후’, 영어로는 ‘만나(manna)’인데 신비한 양식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만나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먹거리입니다. 메추라기는 지중해를 통과하여 이동하는 철새인데 신 광야 쯤 날아오면 지쳐서 날지 못하므로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메추라기를 몰고 오시는 자연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 땅에는 메뚜기가 날아와 땅을 덮어 먹을 것을 빼앗아갔는데, 이스라엘이 거하는 광야에는 메추라기로 진을 덮어 먹을 것이 가득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습니다(민 11:8). 그러나 만족도에 있어서는 이집트의 음식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내려지는 하늘 양식이요 비상식량이기 때문입니다. 비상식량은 모자라면 모자랐지 풍요롭게 남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다음날의 모자람을 대비해서 욕심을 부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극도의 비상시기에 모자람이 없이 알맞게 제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상시기에는 풍요로움을 기대하기보다는 적당함 속에서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런 비상시기가 끝나면 만나 또한 그칠 것이고 또 다른 풍요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을 만나와 함께 잘 헤쳐 나가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시기에 비상식량을 무시하고 비난한다면 또 다른 무슨 희망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16-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게 된 것은 만나가 저절로 분배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이 거둔 자가 적게 거둔 자에게 나누는 삶을 통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적게 거둔 자가 많이 거두게 되면 전에는 많이 거두었으나 지금은 적어서 부족하게 된 사람에게 나눔으로서 서로를 돕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고 희망이 넘치고 남녀노소 모두가 달콤한 인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이런 세상에 대한 비전을 이루기를 소망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직장상사로부터 세금을 탈루할 수 있게 이중장부를 작성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 법으로도 불법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거절하게 되면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은 해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한 집안의 가장이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면 수많은 갈등이 오고갈 것입니다. 이런 고민의 순간에 이 사람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신앙공동체가 있다면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 가족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공동체에서 자신의 아픔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설사 그가 해고되는 지경에 갈지라도 신앙공동체가 부족함을 채워주고 돌본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려움이 없고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모든 책임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 속에서 굴복하며 살아가기가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게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하나님께서는 지금 광야에서 이런 세상을 이루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십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충분하게 공급하셨지만 누군가 욕심을 부린다면 어느 누군가는 굶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밤새도록 주림으로 고통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까지 남겨두었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것입니다. 실체가 아님에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쌓지만, 쌓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적대적이 되기 시작하고 서로의 것을 빼앗으려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벌레가 우글거리고 썩는 냄새가 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두려움으로 쌓기 시작할 때 벌어질 일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만큼은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쌓는 삶이 아니라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남는 것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며, 어김이 없으신 분인가를 알아야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나님은 40년 동안 지속하셨습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22-36).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두었습니다.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노예로 생활하며 안식일을 준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창조의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안식일은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안식일은 가장 오래된 법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집에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쉼을 잘 누려야 한 주간을 힘 있게 보낼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을 믿고 개인 신앙을 키우는 것이라면 안식일 준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어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인 만나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과 안식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날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현실임을 천명하는 삶입니다.
신명기 8:2,3에서 모세는 고별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통한 훈련은 단지 먹거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말씀대로 살고 죽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어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결코 나누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과 나누는 이웃 사랑을 훈련하는 통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오멜에 채워서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서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먹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를 간수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주야로 묵상하는 믿음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이집트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먹던 기억 대신에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능력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였습니다. 이것을 명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멜은 약 2.2리터정도입니다.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오멜을 에바로 환산해 줌으로, 즉 말이나 되를 리터로 환산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후손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기억과 신앙의 계승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를 지속시키고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 지키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복을 누리며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양식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신실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15:22-16:36
요절 | 출애굽기 16:4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광야는 ‘텅 비고 아득하게 너른 들’로서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끝도 없이 넓지만 텅 비어 있어서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또한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땅인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주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즉 광야의 위력이 대단할지라도 광야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기쁨의 장소가 됩니다. 선교사님들이 처음 그 나라에 갔을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학생들도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 광야는 죽음으로 몰아가는 불신과 불순종과 배반의 길을 가든지, 반대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밀월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는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리시는 힘을 깊이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15:22-27).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기쁨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으면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먹는 것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어느 정도 충당이 되었지만 물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탐욕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을 때 물을 발견했지만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 이름을 마라 즉 ‘쓰다’, ‘괴롭다’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바로가 왕이었을 때 괴롭고 쓰디쓴 상황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가 물에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로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법도와 율례를 정하여 주시고, 그들을 시험하신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 이 말씀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만들기 위해서 던져 넣었던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사건은 쓴 인생이 단 인생으로 바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 인생길에도 견디기 힘든 쓴 물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힘을 다해서 섬겼는데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질병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 대해서 쓴 뿌리가 생깁니다. 화가 납니다.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이 생깁니다. 원망의 말을 쏟아내게 됩니다. 죽도록 달려왔는데 내 인생에 남은 것은 가난과 사람들의 무시, 인간 갈등뿐일 때가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는데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때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이런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그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쓴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쓴 물을 주신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쓴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묘약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 대신에 내 이름을 넣어 보면 내가 사랑의 사람인가 아닌가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랑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을 넣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의 쓴 물이 달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배울 때 그는 우리의 쓴 마음을 단 마음으로 점차 바꾸어 가십니다. 광야에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날로 새롭게 변해가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는 주의 말씀을 듣는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에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사병의 실수로 수류탄 사고를 당해 한 쪽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대학에 다닐 대 사귀던 여자 친구가 병원으로 병문안을 온다고 해서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와서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았습니다. 이 남자는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여자 친구에게 “팔이 없는 나를 지금도 좋아하느냐?”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물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묻는 질문에 여자 친구는 “나는 너의 팔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팔이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얻었을 때 정말로 천지를 다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큰 파도처럼 밀어닥쳤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는 그때부터 병원 근방에 방을 얻어놓고 병원에 드나들면서 간호에 간호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한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야 하는 딸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의 딸에게 그 남자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아버지가 한 팔을 잃으신다면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아버지도 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제대하여 한 팔이 없는 것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하여 린스와 샴푸를 합친 효과를 내는 하나로를 개발했고 20세부터 80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2080 치약을 개발하고,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한 앱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워 통신사의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서환 전 KTF 부사장, 전 애경산업 이사, 현재 세라잼헬스앤뷰티 대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 사건을 지나고 나니 풍성한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먼저 마라라는 결핍으로 인도하시고 그 후에 풍성한 엘림으로 인도하실까요? 인생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풍성한 엘림보다는 결핍이 있는 마라에 거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결핍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할 삶을 살 때에 거기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축복을 도구 삼아 묵묵히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엘림을 사막이라는 광야에서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규례와 계명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마라에서 얻은 단물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공급하실 책임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 훈련(16:1-2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입니다. 이제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물도 다 떨어졌습니다. 굶주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들여보내시는 광야는 결코 세상의 것을 먹으며 완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결핍은 당연한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 그들은 종살이의 고통을 겪으며 겨우 먹고 살던 시절이 호화롭게 보일 정도로 현재 광야 생활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종살이를 하는 고통 속에서라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광야의 자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굶주림도 굶주림이지만 아이들의 주림으로 인한 울부짖음을 들을 때 쉽게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재 없이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 속에는 질책이 아닌 책임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4,5).”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두게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이를 통해 율법 준수를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즉 먹는 것만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시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구원이 끝이 아니라 책임과 소명으로의 부르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는 것은 목표가 있고,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이루어야 할 소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통해 율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세상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뭐지?” 히브리어로 ‘만후’, 영어로는 ‘만나(manna)’인데 신비한 양식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만나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먹거리입니다. 메추라기는 지중해를 통과하여 이동하는 철새인데 신 광야 쯤 날아오면 지쳐서 날지 못하므로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메추라기를 몰고 오시는 자연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집트 땅에는 메뚜기가 날아와 땅을 덮어 먹을 것을 빼앗아갔는데, 이스라엘이 거하는 광야에는 메추라기로 진을 덮어 먹을 것이 가득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습니다(민 11:8). 그러나 만족도에 있어서는 이집트의 음식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내려지는 하늘 양식이요 비상식량이기 때문입니다. 비상식량은 모자라면 모자랐지 풍요롭게 남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다음날의 모자람을 대비해서 욕심을 부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극도의 비상시기에 모자람이 없이 알맞게 제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상시기에는 풍요로움을 기대하기보다는 적당함 속에서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런 비상시기가 끝나면 만나 또한 그칠 것이고 또 다른 풍요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을 만나와 함께 잘 헤쳐 나가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시기에 비상식량을 무시하고 비난한다면 또 다른 무슨 희망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16-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게 된 것은 만나가 저절로 분배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이 거둔 자가 적게 거둔 자에게 나누는 삶을 통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적게 거둔 자가 많이 거두게 되면 전에는 많이 거두었으나 지금은 적어서 부족하게 된 사람에게 나눔으로서 서로를 돕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고 희망이 넘치고 남녀노소 모두가 달콤한 인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이런 세상에 대한 비전을 이루기를 소망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직장상사로부터 세금을 탈루할 수 있게 이중장부를 작성하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 법으로도 불법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거절하게 되면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은 해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한 집안의 가장이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면 수많은 갈등이 오고갈 것입니다. 이런 고민의 순간에 이 사람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신앙공동체가 있다면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 가족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공동체에서 자신의 아픔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설사 그가 해고되는 지경에 갈지라도 신앙공동체가 부족함을 채워주고 돌본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려움이 없고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모든 책임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 속에서 굴복하며 살아가기가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게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하나님께서는 지금 광야에서 이런 세상을 이루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십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충분하게 공급하셨지만 누군가 욕심을 부린다면 어느 누군가는 굶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밤새도록 주림으로 고통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까지 남겨두었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것입니다. 실체가 아님에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쌓지만, 쌓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적대적이 되기 시작하고 서로의 것을 빼앗으려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벌레가 우글거리고 썩는 냄새가 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두려움으로 쌓기 시작할 때 벌어질 일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만큼은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쌓는 삶이 아니라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남는 것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며, 어김이 없으신 분인가를 알아야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나님은 40년 동안 지속하셨습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22-36).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두었습니다.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노예로 생활하며 안식일을 준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창조의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안식일은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안식일은 가장 오래된 법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집에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쉼을 잘 누려야 한 주간을 힘 있게 보낼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을 믿고 개인 신앙을 키우는 것이라면 안식일 준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어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인 만나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과 안식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날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현실임을 천명하는 삶입니다.
신명기 8:2,3에서 모세는 고별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통한 훈련은 단지 먹거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말씀대로 살고 죽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어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결코 나누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과 나누는 이웃 사랑을 훈련하는 통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오멜에 채워서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서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먹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를 간수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주야로 묵상하는 믿음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이집트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먹던 기억 대신에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능력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였습니다. 이것을 명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멜은 약 2.2리터정도입니다.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오멜을 에바로 환산해 줌으로, 즉 말이나 되를 리터로 환산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후손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기억과 신앙의 계승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를 지속시키고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 지키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 복을 누리며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양식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그 신실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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