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14강(20:1-21:34)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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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14 강
말씀 | 창세기 20:1-21:34
요절 | 창세기 21:1,2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오늘 말씀에는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약속의 자녀를 낳게 되는 감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들을 낳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외적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성취하는 신실하고 전능한 분이십니다. 이삭은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설명한 갈라디아서 말씀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믿음의 열매를 얻도록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평화의 언약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20:1-18, 21:22-34).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그랄에 거하였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인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후궁으로 맞이한 것을 보니 회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아도 사라는 너무나 어여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땅의 나그네인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사라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그가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100세의 늙은이를 누가 보호하고 거들떠보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 곁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고 하시면서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약속의 자녀를 아직 얻지 못하였지만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기도하였을 때 출산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21:22-24을 보면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찾아와서 언약을 맺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신자요 당시 최고 권력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점점 창성해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자 찾아왔습니다. 조약의 핵심은 거짓되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하는 동안 자신이 후대한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신을 후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을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비멜렉은 자신이 알지 못했다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가고 우물을 탈취한 옛날 모습에 비하면 지금 아브라함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 일곱을 주고 우물을 그가 판 증거로 삼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선물을 받고 증인들 앞에서 맹세함으로서,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확실하게 인정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조약을 맺고 또 우물에 대한 소유권도 확실하게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이 세상 권세자를 두려워하던 데서 이제는 책망하는 당당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의 믿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그만큼 깊어졌습니다. 그는 현존하는 시간 세계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형편이나 장소에 따라 믿음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말씀대로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21:1-20). 21:1,2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자녀를 주셨지만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인내를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때’는 100세가 되었을 때인데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습니까? 100세는 도저히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불가능한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안달하며, 조바심을 내며, 서두르며, 부산을 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사 28:16).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시험과 시련을 거치게 하는 것은 그의 진정성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시련을 견딜 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춘향이가 이도령을 믿기 때문에 변 사또의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에서 가장 큰 약속은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아담이 범죄 한 직후부터 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점점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에 대한 약속을 믿고 받아들일 때 죄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 모진 세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믿음 때문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까요? 이삭은 기적의 자녀였습니다. 사라의 태는 죽은 상태였습니다(롬 4:19). 사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받아 출산했습니다(히 11:11).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동정녀 탄생의 기적을 믿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된 아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약속된 아들이었습니다(창 3:15, 사 7:1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와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 때 사이의 간격은 매우 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는 약속과 그것이 실제로 성취된 것 사이의 긴 간격이 있었습니다. 이삭의 탄생 예고 때 아브라함은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18:13).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천사는 마리아에게도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이삭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주어졌습니다(창21:19) 마찬가지로 천사는 마리아에게도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태어났습니다(21:2). 마찬가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음을 의미하는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기쁨이 됨을 보여주었습니다(21:3).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의 역사와 죄사함, 하나님 나라를 상속해 주심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생명의 탄생은 그 가정과 이웃에게도 큰 기쁨을 줍니다. 새 양들이 우리 요회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양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숙해 가며 제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습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당시는 아이들이 보통 3살에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스마엘은 17세로서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이삭이 이스마엘과 함께 자라게 되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놀린다’는 것은 단순히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자신의 운명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 가정에 다툼과 반목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근심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갈라디아서 4:29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자연인입니다.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에게 이유없이 핍박을 받습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은 좀 더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 안에 옛 본성과 새로운 속성 사이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옛 본성은 무엇입니까?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e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e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질투와'와 '술취함' 사이에 '살인'이 첨가되어 있음)(갈 5:19-21).” 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옛 속성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면서 옛 속성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 성품들이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속성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이런 성품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옛 속성들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변화는 교회 나온다고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냥 되지 않습니다. 변화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한다는 의미는 옛 속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옛 속성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더 많이 지배하실수록 나의 삶에 새로운 속성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많이 지배하실 때 우리의 삶은 점차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 시간, 말씀 묵상, 기도의 시간들입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매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실 때, 그가 내 삶에 승리를 주시며, 옛 성품에 이끌리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즉 죄성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성령께서 옛 성품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나의 삶을 지배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 혹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은 매일 매일, 매 순간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종이 아니라 자유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지키려면 죄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희생이 따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삭을 박해한 자는 쫓겨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육체를 영원히 벗어버릴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2:21).” 주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입니다(요일 3:2).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내게 주시는 시험과 어려움의 때에 사람과 인간적인 갈등을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죄의 소욕과 싸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속 사람은 더욱 강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영육간에 열매를 맺으며 승리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 창세기 20:1-21:34
요절 | 창세기 21:1,2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오늘 말씀에는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약속의 자녀를 낳게 되는 감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들을 낳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외적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성취하는 신실하고 전능한 분이십니다. 이삭은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설명한 갈라디아서 말씀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믿음의 열매를 얻도록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두려움을 평화의 언약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20:1-18, 21:22-34).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그랄에 거하였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인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후궁으로 맞이한 것을 보니 회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아도 사라는 너무나 어여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땅의 나그네인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사라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그가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100세의 늙은이를 누가 보호하고 거들떠보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 곁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고 하시면서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약속의 자녀를 아직 얻지 못하였지만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서 고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기도하였을 때 출산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21:22-24을 보면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찾아와서 언약을 맺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신자요 당시 최고 권력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점점 창성해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자 찾아왔습니다. 조약의 핵심은 거짓되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하는 동안 자신이 후대한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신을 후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을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비멜렉은 자신이 알지 못했다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가고 우물을 탈취한 옛날 모습에 비하면 지금 아브라함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 일곱을 주고 우물을 그가 판 증거로 삼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선물을 받고 증인들 앞에서 맹세함으로서,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확실하게 인정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조약을 맺고 또 우물에 대한 소유권도 확실하게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이 세상 권세자를 두려워하던 데서 이제는 책망하는 당당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의 믿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그만큼 깊어졌습니다. 그는 현존하는 시간 세계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형편이나 장소에 따라 믿음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말씀대로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21:1-20). 21:1,2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자녀를 주셨지만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인내를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때’는 100세가 되었을 때인데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습니까? 100세는 도저히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불가능한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안달하며, 조바심을 내며, 서두르며, 부산을 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사 28:16).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시험과 시련을 거치게 하는 것은 그의 진정성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시련을 견딜 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춘향이가 이도령을 믿기 때문에 변 사또의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에서 가장 큰 약속은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을 아담이 범죄 한 직후부터 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속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점점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에 대한 약속을 믿고 받아들일 때 죄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 모진 세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믿음 때문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될까요? 이삭은 기적의 자녀였습니다. 사라의 태는 죽은 상태였습니다(롬 4:19). 사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받아 출산했습니다(히 11:11).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가 동정녀 탄생의 기적을 믿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된 아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약속된 아들이었습니다(창 3:15, 사 7:1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와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 때 사이의 간격은 매우 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는 약속과 그것이 실제로 성취된 것 사이의 긴 간격이 있었습니다. 이삭의 탄생 예고 때 아브라함은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물었”습니다(18:13).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라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천사는 마리아에게도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고 응답해 주었습니다. 이삭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주어졌습니다(창21:19) 마찬가지로 천사는 마리아에게도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태어났습니다(21:2). 마찬가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음을 의미하는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기쁨이 됨을 보여주었습니다(21:3).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의 역사와 죄사함, 하나님 나라를 상속해 주심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생명의 탄생은 그 가정과 이웃에게도 큰 기쁨을 줍니다. 새 양들이 우리 요회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양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숙해 가며 제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습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당시는 아이들이 보통 3살에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스마엘은 17세로서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이삭이 이스마엘과 함께 자라게 되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놀린다’는 것은 단순히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자신의 운명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 가정에 다툼과 반목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근심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갈라디아서 4:29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자연인입니다.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에게 이유없이 핍박을 받습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은 좀 더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 안에 옛 본성과 새로운 속성 사이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옛 본성은 무엇입니까?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e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e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질투와'와 '술취함' 사이에 '살인'이 첨가되어 있음)(갈 5:19-21).” 신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옛 속성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면서 옛 속성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 성품들이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속성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이런 성품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옛 속성들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변화는 교회 나온다고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냥 되지 않습니다. 변화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한다는 의미는 옛 속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옛 속성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더 많이 지배하실수록 나의 삶에 새로운 속성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많이 지배하실 때 우리의 삶은 점차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 시간, 말씀 묵상, 기도의 시간들입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매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실 때, 그가 내 삶에 승리를 주시며, 옛 성품에 이끌리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즉 죄성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성령께서 옛 성품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나의 삶을 지배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 혹은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은 매일 매일, 매 순간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종이 아니라 자유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지키려면 죄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희생이 따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삭을 박해한 자는 쫓겨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육체를 영원히 벗어버릴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2:21).” 주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입니다(요일 3:2).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내게 주시는 시험과 어려움의 때에 사람과 인간적인 갈등을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죄의 소욕과 싸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속 사람은 더욱 강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영육간에 열매를 맺으며 승리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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