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12강(17장)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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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12 강
말씀 | 창세기 17:1-27
요절 | 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아브람이 신앙적으로 힘든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아브람은 점차 믿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기고 현실에 자족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즐거움으로 시간 가는 줄 모습니다. 믿음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면서 상승 곡선을 그리며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때에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도록 도우십니다.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결국 믿음의 열매로 약속의 자녀를 얻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계에 부딪쳐 있습니까?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한 맺힌 소원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8).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고 그의 재롱을 보며 목마도 태워주고 누워서 비행기도 태워주면서 고상한 아비로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고 많은 자손을 준다고 약속하셨지만 계속 약속을 지키는 일을 미루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기를 이렇게 미루셨을까요?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벧후 3:9a).” 하나님께서 약속 실행을 미루시는 이유는 자녀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인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자아를 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이스마엘이 13살이면 사춘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듭니다. 이스마엘에게 소망을 두었지만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보고 안 될 때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미루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보다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99세된 아브람에게도 자식을 낳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생리가 끊어진 사래에게서도 임신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전능하십니까?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히 7:25).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할 전능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할 때에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히 2:18).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어떤 실패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39). 우리가 늙고 쇠하다가 죽지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빌 3:21).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유 24).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나이 탓을 하지 말고 일생 배우고 자라며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현실이 어렵지만 청년들이 취직을 하고 믿음의 사람과 알콩달콩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양을 얻어 제자 양성하고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흠이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는 안전합니다. 또 ‘완전한’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될 수가 있을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완전하시니 그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영접하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람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겠다는 그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 그 아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비전을 잊고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삶이 아닙니다. 사실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살 수는 있습니다.
이전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나, 하갈 문제로 인해서 가정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따끔하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한계에 부딪히고,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승리와 실패를 경험하고, 몸은 50,60대가 되어버렸을 때에 비전도 희미해지고 성장에 대한 소원도 잃어버리고 미지근하게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 속에 가두려고 하기 쉽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처음에 주신 사랑과 비전을 새롭게 하여 여러 민족을 낳고 키우는 목자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어떤 비전을 주고 언약을 세우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아브람의 능력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아브람은 크게 번성하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실 때 주신 ‘큰 민족을 이룬다.’(12:2)는 말씀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로 좀 더 구체화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의 이름대로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로서 이스마엘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아기자기하게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이고 소시민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얻음으로 원하던 소원을 이룬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17:18). 그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이런 은혜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더 크고 높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진심으로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6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5,6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심으로서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서 이름의 뜻에 담긴 하나님의 소망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도록 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피조물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며 열정과 능력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자기 한 몸 꾸리던 사람이 열국을 품고 섬기는 목자의 삶, 선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사람이 현실이 어려우면 현실과 타협하며 살기 쉽습니다. 처음 말씀을 공부하면서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울 때는 사명중심의 삶을 살고 비전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결혼하고 세상 일에 바쁘다보면 현실적이 되고 하나님보다 직장 중심, 아내 중심, 남편 중심, 자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복음 역사가 정체되고 힘들어지면 현실에 자족하면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크신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온 세상을 품고 섬기는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7장에는 ‘언약’이란 단어가 13번 나옵니다. ‘내 언약’이란 표현이 아홉 번, ‘영원한 언약’이 세 번 나타납니다. ‘언약’은 히브리어로 ‘뻬리트’인데 ‘꽉 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및 그 대대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서로를 꽉 묶고, 연합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고 그의 후손들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는 주관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됩니다.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죄의 길을 계속 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율법과 도덕으로 책망한다고 해서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즐거움, 죄의 쾌락보다 더 높은 기쁨으로 초대해야만 그 길에서 돌이켜 복된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설득할 수 있는 한 길은 세상보다 더 좋은 것, 세상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 분께 오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은 광야를 방황한 후 마음껏 먹고 안식할 수 있는 잔치 집에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의 고생과 수고가 그치고 그들은 영적인 기쁨과 환희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와서 주님과 사랑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언약을 인침, 할례(9-2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지키고 그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0,11).” 할례는 포피를 베는 것보다 그 마음에 행해야 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언약을 맺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지만 그 언약을 확증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믿고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할 때 언약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할례는 순결과 순종의 뜻이 있습니다. 즉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 된다는 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성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할례입니다(신30:6). 즉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아기자기한 소시민적인 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영접하고, 그 소원을 좇아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이루기 위해서 한 가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우아한 삶을 사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사라는 ‘많은 민족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여러 민족을 품고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품고 섬기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서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함께 유산을 상속 받는 아내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영접하고 섬기도록 하십니다.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목자 생활도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이런 열매를 맺기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이 제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나이 탓을 하지 말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꽃을 피우게 하십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삶을 살 때 특징 중 하나는 기쁨과 사랑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영접하고 그 날에 자신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한 가지 자기 결단을 하고 그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말씀 | 창세기 17:1-27
요절 | 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아브람이 신앙적으로 힘든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아브람은 점차 믿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기고 현실에 자족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즐거움으로 시간 가는 줄 모습니다. 믿음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면서 상승 곡선을 그리며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때에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도록 도우십니다.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결국 믿음의 열매로 약속의 자녀를 얻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계에 부딪쳐 있습니까?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한 맺힌 소원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8).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고 그의 재롱을 보며 목마도 태워주고 누워서 비행기도 태워주면서 고상한 아비로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고 많은 자손을 준다고 약속하셨지만 계속 약속을 지키는 일을 미루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기를 이렇게 미루셨을까요?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벧후 3:9a).” 하나님께서 약속 실행을 미루시는 이유는 자녀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인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자아를 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이스마엘이 13살이면 사춘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듭니다. 이스마엘에게 소망을 두었지만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보고 안 될 때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미루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보다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99세된 아브람에게도 자식을 낳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생리가 끊어진 사래에게서도 임신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전능하십니까?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히 7:25).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할 전능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할 때에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히 2:18).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어떤 실패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39). 우리가 늙고 쇠하다가 죽지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빌 3:21).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유 24).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나이 탓을 하지 말고 일생 배우고 자라며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현실이 어렵지만 청년들이 취직을 하고 믿음의 사람과 알콩달콩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양을 얻어 제자 양성하고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흠이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는 안전합니다. 또 ‘완전한’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될 수가 있을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완전하시니 그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영접하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람의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겠다는 그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 그 아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비전을 잊고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삶이 아닙니다. 사실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살 수는 있습니다.
이전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나, 하갈 문제로 인해서 가정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따끔하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한계에 부딪히고,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승리와 실패를 경험하고, 몸은 50,60대가 되어버렸을 때에 비전도 희미해지고 성장에 대한 소원도 잃어버리고 미지근하게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 속에 가두려고 하기 쉽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처음에 주신 사랑과 비전을 새롭게 하여 여러 민족을 낳고 키우는 목자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어떤 비전을 주고 언약을 세우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아브람의 능력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아브람은 크게 번성하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실 때 주신 ‘큰 민족을 이룬다.’(12:2)는 말씀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로 좀 더 구체화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란 뜻입니다. 그의 이름대로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로서 이스마엘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아기자기하게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이고 소시민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얻음으로 원하던 소원을 이룬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17:18). 그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이런 은혜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더 크고 높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진심으로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6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5,6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심으로서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서 이름의 뜻에 담긴 하나님의 소망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도록 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피조물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며 열정과 능력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자기 한 몸 꾸리던 사람이 열국을 품고 섬기는 목자의 삶, 선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사람이 현실이 어려우면 현실과 타협하며 살기 쉽습니다. 처음 말씀을 공부하면서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울 때는 사명중심의 삶을 살고 비전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결혼하고 세상 일에 바쁘다보면 현실적이 되고 하나님보다 직장 중심, 아내 중심, 남편 중심, 자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복음 역사가 정체되고 힘들어지면 현실에 자족하면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크신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온 세상을 품고 섬기는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7장에는 ‘언약’이란 단어가 13번 나옵니다. ‘내 언약’이란 표현이 아홉 번, ‘영원한 언약’이 세 번 나타납니다. ‘언약’은 히브리어로 ‘뻬리트’인데 ‘꽉 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및 그 대대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서로를 꽉 묶고, 연합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고 그의 후손들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는 주관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됩니다.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죄의 길을 계속 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율법과 도덕으로 책망한다고 해서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즐거움, 죄의 쾌락보다 더 높은 기쁨으로 초대해야만 그 길에서 돌이켜 복된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설득할 수 있는 한 길은 세상보다 더 좋은 것, 세상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 분께 오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은 광야를 방황한 후 마음껏 먹고 안식할 수 있는 잔치 집에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의 고생과 수고가 그치고 그들은 영적인 기쁨과 환희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와서 주님과 사랑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언약을 인침, 할례(9-2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지키고 그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0,11).” 할례는 포피를 베는 것보다 그 마음에 행해야 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언약을 맺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지만 그 언약을 확증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믿고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할 때 언약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할례는 순결과 순종의 뜻이 있습니다. 즉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 된다는 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성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할례입니다(신30:6). 즉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아기자기한 소시민적인 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영접하고, 그 소원을 좇아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이루기 위해서 한 가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우아한 삶을 사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사라는 ‘많은 민족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여러 민족을 품고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품고 섬기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서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함께 유산을 상속 받는 아내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영접하고 섬기도록 하십니다.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목자 생활도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이런 열매를 맺기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이 제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나이 탓을 하지 말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꽃을 피우게 하십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삶을 살 때 특징 중 하나는 기쁨과 사랑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영접하고 그 날에 자신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한 가지 자기 결단을 하고 그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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