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10강(13,14장)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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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10 강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19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애굽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이후 롯과 물질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자 하나님을 믿고 양보를 합니다. 반면에 롯은 애굽의 문화를 접하고 더욱 물질 중심이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경제에 대한 가치관 변화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신뢰가 깊어졌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동맹군 왕들이 사해 왕들과 전쟁한 후 롯을 사로잡아가자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가합니다. 잃은 형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쟁은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던 것인지 살펴보고 우리도 잃은 양을 찾아오는 영적 전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물질문제에서 자유한 아브람(13장).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온 후 그와 조카 롯 사이에 목초지로 인해서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불신자들 앞에서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재물을 앞에 두고 양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근으로 애굽을 다녀오면서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믿었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 바로 왕을 책망하시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양과 가축이 많아지자 목자들의 싸움이 결국 자신과 롯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물질보다 형제와 화목한 관계, 더 나아가 믿음의 영향력을 중시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아브람은 이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고 돈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섬기거나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헌신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일생을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 그가 채우심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또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은행에 돈을 저축하면 많아야 이자가 4%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심으면 30배, 60배, 100배를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작은 유익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채우심을 개인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람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기꺼이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는 열두 군단의 천사들을 부를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권세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아무 죄도 행하지 않았고, 어떤 죄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따를 본을 남기셨습니다.
반면에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보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대부분의 실패와 슬픔의 원인은 보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직 먹임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3:6)” 아간이 범죄한 것도 마찬가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롯이 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롯이 애굽에 다녀온 이후로 애굽의 문화병에 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들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말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는 에덴의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부터 옮겼습니다. 롯은 아브람과 가까이 있다가 점차로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나중에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소돔 성 문 안에서 살았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롯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본질적인 특성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의 딸들과 사위들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은 너무나 무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겉모습만 신자였습니다. 우리가 시편 1편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악인들의 꾀에서 죄인들의 길에 서고 나중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는 여정을 롯은 따르고 있습니다. 나중에 롯은 전쟁 통에 재산을 다 잃고 ‘굴’에 거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껍데기만 남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롯의 시작은 아브람과 같았는데 가치관이 다르니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롯은 겉모습만 봤지 소돔 사람들의 죄악된 삶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부끄러운 열매만 맺었습니다. 죄는 아주 작은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빨리 퍼지고, 그 결과는 얼마나 혐오스러우며, 그 마지막은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그는 마치 타다 남은 장작을 꺼내는 것 같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뿌린 것을 그대로 거두었습니다. 롯은 육체를 심었고, 육체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자신의 인생 집을 지었습니다(고전 3:12). 그는 마음이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람은 롯을 아들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롯이 떠나가자 아브람의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착잡했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상속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 아니면 떠나보내야 할 때 보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사야 51:2은 말씀합니다. “보아라, 아브라함을! 너희의 조상이다. 보아라, 사라를. 그가 너희를 낳았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내가 불러냈다. 그에게 복을 내려 자손이 많아지게 해 주었다.(새한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고, 롯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으로 그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롯은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눈을 들은 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보기 위해 눈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장막에 앉았다가 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18:2). “나중에는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대속물이었습니다(22:13).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시며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고 하십니다. 그 땅을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때에 애굽에서부터 갈대아 우르까지 이스라엘의 땅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아브람이 발로 다녀본 땅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손을 주시는데 땅의 티끌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은 나라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모세 때에 하나님의 법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아브람이 복을 누리며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뜻:교제)에 있는 마므레(뜻:부요)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였습니다. 아브람과 하나님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현실 문제를 당장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부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비전을 심어주심으로 좁아진 마음을 넓혀주셨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비전이 있을 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14장). 당시 메소포타미아 동맹군과 소돔 고모라 연합군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유는 소돔 고모라 지역이 십이 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십삼년에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 점령하고 소돔과 고모라 왕들을 쳐부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습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아브람에게 알렸습니다.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과 에스골과 아넬의 형제들과 함께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들은 밤에 기습 공격을 하였습니다. 적군들을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14절은 조카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형제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은 잃어버린 형제를 되찾아오기 위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것을 챙겨가지고 떠난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고소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과거 자기에게 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잃어버린 형제를 구하기 위해서 무모해 보이는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그를 축복하는 자를 복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공격하는 이런 믿음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형제에 대한 사랑,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잃어버린 형제를 찾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루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도 잃은 양들에 대해서 버려두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지금 캠퍼스에는 잃은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다가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방황하고 있는 형제자매들도 있습니다. 그 한 형제, 한 자매를 찾아오기 위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 원수와 싸우는 영적인 전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웠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충만해지기 쉬웠습니다. 이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개선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살렘 왕인데 평강의 왕이란 뜻입니다.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의가 이루어져야 평강이 옵니다. 진리와 법이 무너지고 공의가 무너지면 평강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멜기세덱을 예수님과 비교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냄 받은 제사장입니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여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승리의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의 축복을 받고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쳐서 형제 롯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한 것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이렇게 말함으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의 목숨과 재산과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두고두고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소돔 왕 때문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유익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복 주심을 통해서 복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하나님께는 십일조를 바치고 세상 사람과의 관계는 깨끗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이 물질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믿고 행동함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지켰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성숙해가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때 그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고 어려운 가운데서 깊은 평안을 누립니다. 내가 현재 겪는 문제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성숙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3:1-14:24
요절 | 창세기 14:19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애굽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이후 롯과 물질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자 하나님을 믿고 양보를 합니다. 반면에 롯은 애굽의 문화를 접하고 더욱 물질 중심이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경제에 대한 가치관 변화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신뢰가 깊어졌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동맹군 왕들이 사해 왕들과 전쟁한 후 롯을 사로잡아가자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가합니다. 잃은 형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쟁은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던 것인지 살펴보고 우리도 잃은 양을 찾아오는 영적 전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물질문제에서 자유한 아브람(13장). 아브람이 애굽에서 올라온 후 그와 조카 롯 사이에 목초지로 인해서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불신자들 앞에서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재물을 앞에 두고 양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근으로 애굽을 다녀오면서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믿었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 바로 왕을 책망하시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양과 가축이 많아지자 목자들의 싸움이 결국 자신과 롯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물질보다 형제와 화목한 관계, 더 나아가 믿음의 영향력을 중시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아브람은 이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고 돈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섬기거나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헌신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일생을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 그가 채우심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또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은행에 돈을 저축하면 많아야 이자가 4%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심으면 30배, 60배, 100배를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작은 유익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채우심을 개인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람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기꺼이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는 열두 군단의 천사들을 부를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권세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아무 죄도 행하지 않았고, 어떤 죄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따를 본을 남기셨습니다.
반면에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보다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대부분의 실패와 슬픔의 원인은 보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직 먹임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3:6)” 아간이 범죄한 것도 마찬가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롯이 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롯이 애굽에 다녀온 이후로 애굽의 문화병에 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들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말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는 에덴의 낙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부터 옮겼습니다. 롯은 아브람과 가까이 있다가 점차로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나중에는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소돔 성 문 안에서 살았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롯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본질적인 특성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의 딸들과 사위들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은 너무나 무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겉모습만 신자였습니다. 우리가 시편 1편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악인들의 꾀에서 죄인들의 길에 서고 나중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는 여정을 롯은 따르고 있습니다. 나중에 롯은 전쟁 통에 재산을 다 잃고 ‘굴’에 거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껍데기만 남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롯의 시작은 아브람과 같았는데 가치관이 다르니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롯은 겉모습만 봤지 소돔 사람들의 죄악된 삶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부끄러운 열매만 맺었습니다. 죄는 아주 작은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빨리 퍼지고, 그 결과는 얼마나 혐오스러우며, 그 마지막은 얼마나 두려운 것입니까?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그는 마치 타다 남은 장작을 꺼내는 것 같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뿌린 것을 그대로 거두었습니다. 롯은 육체를 심었고, 육체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자신의 인생 집을 지었습니다(고전 3:12). 그는 마음이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람은 롯을 아들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롯이 떠나가자 아브람의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착잡했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상속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 아니면 떠나보내야 할 때 보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사야 51:2은 말씀합니다. “보아라, 아브라함을! 너희의 조상이다. 보아라, 사라를. 그가 너희를 낳았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내가 불러냈다. 그에게 복을 내려 자손이 많아지게 해 주었다.(새한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고, 롯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으로 그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롯은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눈을 들은 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보기 위해 눈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장막에 앉았다가 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18:2). “나중에는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대속물이었습니다(22:13).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시며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고 하십니다. 그 땅을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때에 애굽에서부터 갈대아 우르까지 이스라엘의 땅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아브람이 발로 다녀본 땅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손을 주시는데 땅의 티끌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은 나라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모세 때에 하나님의 법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아브람이 복을 누리며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뜻:교제)에 있는 마므레(뜻:부요) 상수리 수풀에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였습니다. 아브람과 하나님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현실 문제를 당장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부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비전을 심어주심으로 좁아진 마음을 넓혀주셨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비전이 있을 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둘째,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14장). 당시 메소포타미아 동맹군과 소돔 고모라 연합군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유는 소돔 고모라 지역이 십이 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십삼년에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 점령하고 소돔과 고모라 왕들을 쳐부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습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아브람에게 알렸습니다.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과 에스골과 아넬의 형제들과 함께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들은 밤에 기습 공격을 하였습니다. 적군들을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14절은 조카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형제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은 잃어버린 형제를 되찾아오기 위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것을 챙겨가지고 떠난 롯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롯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고소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과거 자기에게 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잃어버린 형제를 구하기 위해서 무모해 보이는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는 애굽 왕 바로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그를 축복하는 자를 복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공격하는 이런 믿음과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형제에 대한 사랑,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잃어버린 형제를 찾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루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도 잃은 양들에 대해서 버려두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지금 캠퍼스에는 잃은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다가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방황하고 있는 형제자매들도 있습니다. 그 한 형제, 한 자매를 찾아오기 위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 원수와 싸우는 영적인 전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웠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충만해지기 쉬웠습니다. 이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개선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살렘 왕인데 평강의 왕이란 뜻입니다.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의가 이루어져야 평강이 옵니다. 진리와 법이 무너지고 공의가 무너지면 평강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멜기세덱을 예수님과 비교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냄 받은 제사장입니다.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여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승리의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의 축복을 받고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쳐서 형제 롯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한 것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이렇게 말함으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의 목숨과 재산과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두고두고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소돔 왕 때문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유익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복 주심을 통해서 복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하나님께는 십일조를 바치고 세상 사람과의 관계는 깨끗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이 물질문제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믿고 행동함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지켰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성숙해가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때 그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고 어려운 가운데서 깊은 평안을 누립니다. 내가 현재 겪는 문제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성숙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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