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9강(11:27-12:20)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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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9 강
말씀 | 창세기 11:27-12:20
요절 | 창세기 12:2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아브람 당시 그들은 화려한 수메르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서 한 사람 아브람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십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보다,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한 사람의 믿음이 어떻게 시작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까지 자라가는 지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배우는 가운데 우리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11:27-12:3).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는데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였습니다.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는데 데라가 주도권을 갖고 우르를 떠난 것 같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가정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가족이 하란에 이르러 거류하다가 데라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이르셨다는 단어가 영어로는 had said로 대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2-4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갈대아 우르는 고대 바벨론 수메르 지방의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우르 왕조는 BC 약 2160-2000년경에 고대에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상이 범람하였는데 3천 가지가 넘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요, 거짓된 것입니다. 우상의 어두움 세력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문명,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아즈텍 문명은 고대 문명발상지입니다. 아즈텍 문명지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인간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고,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위엄 가운데 아브람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친숙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이버지의 집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뿌리요 토대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상을 숭배하고, 분노하고, 상처를 주고, 죄악되고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뿌리가 뽑히는 나무와 같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려면 힘이 듭니다. 뿌리가 뽑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면 방랑자의 삶, 나그네의 삶,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로 나아갈 때에 비자 문제로 인해서 늘 불안하고 신경이 쓰입니다.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내가 있어야 할 직장이나 적당한 자리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인간관계, 친구관계를 잘 맺으면 삶이 안정이 되고 활력이 넘치고 기쁘지만 이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삶이 불안합니다. 짜증이 나고 두렵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가 없을 때 두렵습니다.
그러나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에 떠나야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립하고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조상숭배를 하는 유교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떠났습니다. 대학 생활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옴으로 떠났을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님과 환경 속에서 떠나야 자립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악된 환경, 세속적인 가치관을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떠나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물론 너무 연약한 사람은 먼저 힘을 얻어야 합니다. 떠날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사랑과 섬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떠남과 정착이 반복됨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여준 땅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모르는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다 알려 주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자신이 길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적지와 지도만 주고 네가 알아서 가라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면서 자신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친절한 명령입니까? 이 하나님을 믿으면 아주 감사한 명령인데 그를 믿지 못하면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순종할 수가 있지만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인격적이고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무지막지하게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지금 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은 귀가 솔깃해 지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아브라함이 육신적으로는 이스라엘, 아랍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 육신의 자녀를 많이 주시겠다는 그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유대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한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은 인종, 영토,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사는 백성을 의미합니다.(창18:19). 출애굽기 19:5,6에서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표현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큰 민족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을 예배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어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이 될지라.” ‘복’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건강한 것, 자녀를 많이 낳는 것,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만으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병이 들거나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샘터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복은 궁극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의 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미래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현재 형편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약속들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꿈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꿈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아브라함에게만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3절을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사람이 아브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도 축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우리도 아브람 편에 서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귀히 여기고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은 것같이, 아브람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축복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아브람의 씨에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둘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4-9).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좀 더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가 순종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게 되면 그 즉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만일 그가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생각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해 보려고’이와 같이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우상으로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초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체험은 단지 그 체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주님께로 이끄는 것인데 체험을 순종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제가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나요?” 묻지 않았습니다. 이런 반응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따라갔다는 것은 말씀의 이끌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힘을 주고, 이끌어갔습니다. 그는 부족했지만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하거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와 위엄을 무겁게 느꼈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 경험, 체험, 전통에 근거해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각각의 한계 때문에 우리 믿음의 진정한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함으로 우리는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의미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아픔입니다.
5절에 보면 그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떠났지만 자기 고향에 놓고 와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는 떠났습니다. 히11:8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만 회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기대하던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무도 살지 않는 광대한 땅을 주고 그것을 일구며 살라고 했으면 아마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서 일구어 놓은 문화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7,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께서는 힘들 때에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앞에서는 자손을 준다고 약속하셨고 여기서는 땅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은 아브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안정된 집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땅을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땅이 있어야 그것을 토대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안정된 삶을 일구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집이 있을 때 안정을 누리며 가정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땅은 집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교회건물입니다. 교회건물이 있으니 우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모임을 하고 쉼도 누리고 예배도 하고 교육도 합니다. 아브람은 장막 생활을 하다가 사라가 죽을 때에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이 막벨라 굴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을 품고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여 14:1-3).”
아브람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함으로 제단을 세우고 여호와를 예배했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특징은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12:8), 이집트에서 돌아와서(13:4)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3:8에서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 위로와 비전을 주실 때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그는 범사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환경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멀리 했을 때 꼭 문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상태가 들쭉날쭉해도 무한한 일관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아브람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하나님(10-20). 아브람이 믿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모은 것을 모두 가지고 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나아간 것 같습니다. 그는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내 사래가 얼마나 아리따웠던지 아내를 빼앗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전되리라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라는 이런 남편을 보고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미모에 반하여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였습니다. 바로는 사래를 자기의 후궁으로 삼고 궁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사래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자책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를 팔아 재산을 불린 것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은 아브람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되 시련을 감당할 만큼 주십니다. 또 감당할 수 없으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아브람을 어떻게 구해주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사실 거짓말한 아브람을 책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아브람을 불러서 화풀이를 합니다. 아브람은 불신자 바로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자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습니다. 바로로부터 많은 가축과 노비를 얻어서 나왔습니다. 애굽의 여종 하갈은 이때 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갈로 인해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이스마엘이 탄생합니다. 바로 왕으로부터 받은 부요로 인해서 롯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롯은 떠나갑니다. 아브람이 나름대로 행하여 문제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셨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허물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자손들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번 주에 어버이 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사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의 허물과 실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며 그의 성품에 이르도록 우리를 키워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말씀 | 창세기 11:27-12:20
요절 | 창세기 12:2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아브람 당시 그들은 화려한 수메르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서 한 사람 아브람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십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보다,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한 사람의 믿음이 어떻게 시작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까지 자라가는 지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배우는 가운데 우리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11:27-12:3).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는데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였습니다.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는데 데라가 주도권을 갖고 우르를 떠난 것 같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가정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가족이 하란에 이르러 거류하다가 데라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이르셨다는 단어가 영어로는 had said로 대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2-4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갈대아 우르는 고대 바벨론 수메르 지방의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우르 왕조는 BC 약 2160-2000년경에 고대에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상이 범람하였는데 3천 가지가 넘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요, 거짓된 것입니다. 우상의 어두움 세력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문명,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아즈텍 문명은 고대 문명발상지입니다. 아즈텍 문명지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인간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고, 어린 아이들을 제물로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위엄 가운데 아브람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친숙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이버지의 집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뿌리요 토대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상을 숭배하고, 분노하고, 상처를 주고, 죄악되고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뿌리가 뽑히는 나무와 같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려면 힘이 듭니다. 뿌리가 뽑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면 방랑자의 삶, 나그네의 삶,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로 나아갈 때에 비자 문제로 인해서 늘 불안하고 신경이 쓰입니다.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내가 있어야 할 직장이나 적당한 자리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인간관계, 친구관계를 잘 맺으면 삶이 안정이 되고 활력이 넘치고 기쁘지만 이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삶이 불안합니다. 짜증이 나고 두렵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가 없을 때 두렵습니다.
그러나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에 떠나야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립하고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조상숭배를 하는 유교적인 집안의 분위기를 떠났습니다. 대학 생활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옴으로 떠났을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님과 환경 속에서 떠나야 자립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악된 환경, 세속적인 가치관을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떠나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물론 너무 연약한 사람은 먼저 힘을 얻어야 합니다. 떠날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사랑과 섬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떠남과 정착이 반복됨으로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여준 땅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모르는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다 알려 주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자신이 길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적지와 지도만 주고 네가 알아서 가라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면서 자신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친절한 명령입니까? 이 하나님을 믿으면 아주 감사한 명령인데 그를 믿지 못하면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순종할 수가 있지만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인격적이고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무지막지하게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지금 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은 귀가 솔깃해 지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아브라함이 육신적으로는 이스라엘, 아랍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 육신의 자녀를 많이 주시겠다는 그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유대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한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은 인종, 영토,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사는 백성을 의미합니다.(창18:19). 출애굽기 19:5,6에서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표현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큰 민족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을 예배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어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이 될지라.” ‘복’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건강한 것, 자녀를 많이 낳는 것,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만으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병이 들거나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샘터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복은 궁극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의 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미래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현재 형편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약속들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꿈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꿈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아브라함에게만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3절을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사람이 아브람을 축복하면 그 사람도 축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우리도 아브람 편에 서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귀히 여기고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은 것같이, 아브람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축복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아브람의 씨에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둘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4-9).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좀 더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가 순종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게 되면 그 즉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만일 그가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생각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해 보려고’이와 같이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우상으로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초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체험은 단지 그 체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주님께로 이끄는 것인데 체험을 순종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제가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나요?” 묻지 않았습니다. 이런 반응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따라갔다는 것은 말씀의 이끌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힘을 주고, 이끌어갔습니다. 그는 부족했지만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하거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와 위엄을 무겁게 느꼈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 경험, 체험, 전통에 근거해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각각의 한계 때문에 우리 믿음의 진정한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함으로 우리는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의미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아픔입니다.
5절에 보면 그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떠났지만 자기 고향에 놓고 와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는 떠났습니다. 히11:8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만 회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기대하던 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무도 살지 않는 광대한 땅을 주고 그것을 일구며 살라고 했으면 아마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서 일구어 놓은 문화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 같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7,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께서는 힘들 때에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앞에서는 자손을 준다고 약속하셨고 여기서는 땅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은 아브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안정된 집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땅을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땅이 있어야 그것을 토대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안정된 삶을 일구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집이 있을 때 안정을 누리며 가정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땅은 집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교회건물입니다. 교회건물이 있으니 우리는 이곳을 중심으로 모임을 하고 쉼도 누리고 예배도 하고 교육도 합니다. 아브람은 장막 생활을 하다가 사라가 죽을 때에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이 막벨라 굴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을 품고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여 14:1-3).”
아브람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함으로 제단을 세우고 여호와를 예배했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특징은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12:8), 이집트에서 돌아와서(13:4)도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3:8에서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 위로와 비전을 주실 때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그는 범사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환경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멀리 했을 때 꼭 문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상태가 들쭉날쭉해도 무한한 일관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아브람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신 하나님(10-20). 아브람이 믿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모은 것을 모두 가지고 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나아간 것 같습니다. 그는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내 사래가 얼마나 아리따웠던지 아내를 빼앗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전되리라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라는 이런 남편을 보고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미모에 반하여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였습니다. 바로는 사래를 자기의 후궁으로 삼고 궁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루아침에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사래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자책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를 팔아 재산을 불린 것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은 아브람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되 시련을 감당할 만큼 주십니다. 또 감당할 수 없으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아브람을 어떻게 구해주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사실 거짓말한 아브람을 책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아브람을 불러서 화풀이를 합니다. 아브람은 불신자 바로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자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습니다. 바로로부터 많은 가축과 노비를 얻어서 나왔습니다. 애굽의 여종 하갈은 이때 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갈로 인해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이스마엘이 탄생합니다. 바로 왕으로부터 받은 부요로 인해서 롯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롯은 떠나갑니다. 아브람이 나름대로 행하여 문제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셨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허물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자손들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번 주에 어버이 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사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의 허물과 실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며 그의 성품에 이르도록 우리를 키워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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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창세기-9m.hwp 창9강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94.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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