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8강(9:18-11:26)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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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8 강
말씀 | 창세기 9:18-11:26
요절 | 창세기 11:9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홍수 심판 후에 노아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함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홍수 심판 전이나 후나 인간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바벨탑을 세워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니므롯이 대표로 나오는데 하나님에게 맞서 대적하며 스스로를 신격화시키고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니므롯은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하지 않으시고,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합니다. 우리가 어떤 절망적이고 어두운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노아의 부끄러운 모습과 그 영향(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주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여러 가지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홍수로 인한 정신적인 외상을 겪고,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을 달래고자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이후 노아의 350년의 삶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저자는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흉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슬퍼하기보다 그것을 즐기고 떠벌렸습니다. 이런 함의 행동은 부친의 권위에 대해 반역적인 성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시대 선지자였고 제사장이었습니다(8:20). 이런 노아를 험담한 것은 함의 신앙 문제를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거스르는 성향을 나타낸 것입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개인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함의 자손인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들이 됩니다.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얼굴을 돌이키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과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이 일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십니다.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노아의 후손 가운데 셈의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셈에 대한 축복은 셈의 후손 중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 만민이 복을 받게 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홍수 후에 족속들과 나라들이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나옵니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입니다. 이들이 살던 지역은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과 러시스아, 이란 북서부, 소아시아, 터키 지역입니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인데 구스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미스라임은 히브리어로 이집트를 뜻하고, 붓은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지역, 가나안은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습니다. 셈의 아들은 에벨인데 에벨은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의 뿌리로 봅니다. 그들은 엘람,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입니다. 이들은 이란 남서부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벨론과 수메르 문명을 이룬 오늘날 이라크, 시리아 지역에 살았습니다. 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았는데 벨렉은 나눔이라는 뜻입니다. 이때에 바벨탑 사건과 대륙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니므롯과 바벨론의 관계(8-11:9). 10:8-10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니므롯'이란 이름은 “우리는 반역하리라” 또는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함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인 기질이 그 아들 구스와 손자에게 유전된 것입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용사는 “폭군, 독재자, 왕”을 의미합니다. 니므롯은 폭군이 되어 세계제국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용감한”이란 단어는 6장에서 네피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6:4). 네피림으로 인해서 죄악과 포악이 온 땅에 가득하였는데 홍수 후에 니므롯이 네피림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시편 110편에는 “여러 나라의 머리”가 나오는데 바로 세계적인 정복자입니다. 하박국 2:5을 보면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은 10장에 나오는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거류하며 무엇을 하고자 했습니까? 11:1-4을 보십시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당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11:1). 말과 글이 하나일 때 문화는 놀랍게 발전합니다. 이들이 번성할 때 함의 후손인 니므롯은 장성하여 그 이름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의 의도는 사람들을 굳게 결속시키고 지속적인 단합을 유지시킬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또 셈과 야벳의 자손들의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혹시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킬 때에 자신들의 힘으로 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에 닿고 멸망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도리어 자기 힘을 드러내고 분노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면 그는 멸망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수용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믿을 때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도 사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고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인 두려움과 공격성이라는 자연적인 반응을 따를 때 인간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말은 “동쪽으로부터”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한 것입니다. 시날 평지는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 등이 있었던 상대적으로 넓은 지역이었습니다(10:10). 그곳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저지대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벽돌로 돌을 대신할 만큼, 역청(아스팔트)으로 진흙을 대신할 만큼 놀라운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탑을 쌓은 재료인 벽돌은 규격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견고한 건축이 가능하였습니다. 건축 문화에 있어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습니다. 애굽 지역은 돌 문화가 발달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벽돌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돌보다 진흙을 구어서 만든 벽돌이 약해서 바벨론 건축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시문명 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본주의 문화,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성읍과 높은 탑을 세워서 그것을 중심으로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탑’은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부릅니다. 여러 계단으로 이루어져 꼭대기에 신전 탑이 올려 진 형태입니다. 피라미드(pyramid)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합니다.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사람을 잠깐 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니므롯은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우상숭배적인 새로운 예배를 제정합니다. 신적인 영광을 요구하고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 니므롯은 후에 바벨론과 계시록에서는 큰 바벨론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니므롯과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과 그 세력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을 합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역에 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10:9에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이라고 했습니다. 니므롯의 본거지는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은 “하늘의 문”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이르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여러 사상과 종교로, 오늘날은 거기에 더해서 과학문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나아가고자 합니다. 동물 복제,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등을 이용해서 신의 영역에 이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자기중심이 되어 인간의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예배하며 그의 이름을 높여야 마땅한데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은 요한계시록 4:1에 나오는데 사도 요한이 “이리로 오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이 4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오직 양의 문이요, 열린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때에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홍수 심판 후에 100년 안 밖이었습니다. 이때 셈과 함과 야벳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홍수 심판이 와도 자기들 힘으로 살아남고자 바벨탑을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힘을 합해서 나름대로 뭔가 더 큰 일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성읍과 탑은 힘을 합치는데 필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 결정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9:1)는 창조 명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흩어져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 그들을 흩으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후에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흩으셨습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탑을 쌓으면서 야 망치줘 하면 톱을 주고, 벽돌을 올려 하면 사다리를 가져오고 하면서 혼란이 일어나자 그들은 결국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전에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바벨탑 사건에서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바벨’이란 “하늘의 문”이라는 의미에서 ‘혼란시키다’라는 의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었고 그들의 연합은 깨졌습니다. 서로 분산되었고 그만큼 힘이 약화되었습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자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문’인 ‘바벨’을 ‘혼잡, 혼란’으로 만드셨습니다. 한마디로 비웃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을 영광과 자랑으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혼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는 많은 종교와 사상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만약 인공지능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인류는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고 멸망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되어가는 과학 문명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은 징계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홍수 후에도 그 축복은 계속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9:7). 사람들은 이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왕국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는 하나 됨을 흩어버리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힘을 얻고 주중에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장 족보는 한 아버지에 한 아들만 기록하였습니다. 또 5장 족보와 마찬가지로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에 죽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족보의 특징입니다. 그 중 에벨에서 욕단으로 이어지는 대신 에벨에서 벨렉으로 이어지고 벨렉은 다시 데라, 아브라함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를 여자의 후손에서 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흐름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아브람을 통한 소망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 중 가인 대신 셋을 택하시고 셋의 자손 중 노아를 택하시고,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자손을 택하시고 셈의 자손 중 욕단 대신 벨렉을 택하셨습니다. 벨렉의 5대손이 아브라함입니다. 선택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로 쓸어버리는 중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은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소망을 두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은혜로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어렵지만 하나님은 소수의 택한 자를 통해서 줄기차게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자꾸 바벨탑을 쌓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보면 답답하고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흩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생각하며 지금 나의 위치에서 힘 있게 복음 역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9:18-11:26
요절 | 창세기 11:9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홍수 심판 후에 노아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 함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홍수 심판 전이나 후나 인간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바벨탑을 세워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니므롯이 대표로 나오는데 하나님에게 맞서 대적하며 스스로를 신격화시키고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니므롯은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하지 않으시고,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합니다. 우리가 어떤 절망적이고 어두운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노아의 부끄러운 모습과 그 영향(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주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여러 가지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홍수로 인한 정신적인 외상을 겪고,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을 달래고자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이후 노아의 350년의 삶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저자는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흉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슬퍼하기보다 그것을 즐기고 떠벌렸습니다. 이런 함의 행동은 부친의 권위에 대해 반역적인 성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시대 선지자였고 제사장이었습니다(8:20). 이런 노아를 험담한 것은 함의 신앙 문제를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거스르는 성향을 나타낸 것입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개인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함의 자손인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들이 됩니다.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얼굴을 돌이키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과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이 일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십니다.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노아의 후손 가운데 셈의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셈에 대한 축복은 셈의 후손 중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 만민이 복을 받게 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홍수 후에 족속들과 나라들이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나옵니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입니다. 이들이 살던 지역은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과 러시스아, 이란 북서부, 소아시아, 터키 지역입니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인데 구스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 미스라임은 히브리어로 이집트를 뜻하고, 붓은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지역, 가나안은 팔레스틴 지역에 살았습니다. 셈의 아들은 에벨인데 에벨은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의 뿌리로 봅니다. 그들은 엘람,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입니다. 이들은 이란 남서부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벨론과 수메르 문명을 이룬 오늘날 이라크, 시리아 지역에 살았습니다. 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았는데 벨렉은 나눔이라는 뜻입니다. 이때에 바벨탑 사건과 대륙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니므롯과 바벨론의 관계(8-11:9). 10:8-10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니므롯'이란 이름은 “우리는 반역하리라” 또는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함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인 기질이 그 아들 구스와 손자에게 유전된 것입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용사는 “폭군, 독재자, 왕”을 의미합니다. 니므롯은 폭군이 되어 세계제국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용감한”이란 단어는 6장에서 네피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6:4). 네피림으로 인해서 죄악과 포악이 온 땅에 가득하였는데 홍수 후에 니므롯이 네피림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시편 110편에는 “여러 나라의 머리”가 나오는데 바로 세계적인 정복자입니다. 하박국 2:5을 보면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은 10장에 나오는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거류하며 무엇을 하고자 했습니까? 11:1-4을 보십시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당시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11:1). 말과 글이 하나일 때 문화는 놀랍게 발전합니다. 이들이 번성할 때 함의 후손인 니므롯은 장성하여 그 이름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의 의도는 사람들을 굳게 결속시키고 지속적인 단합을 유지시킬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또 셈과 야벳의 자손들의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혹시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킬 때에 자신들의 힘으로 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에 닿고 멸망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도리어 자기 힘을 드러내고 분노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면 그는 멸망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수용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믿을 때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도 사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고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인 두려움과 공격성이라는 자연적인 반응을 따를 때 인간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말은 “동쪽으로부터”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한 것입니다. 시날 평지는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 등이 있었던 상대적으로 넓은 지역이었습니다(10:10). 그곳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저지대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벽돌로 돌을 대신할 만큼, 역청(아스팔트)으로 진흙을 대신할 만큼 놀라운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탑을 쌓은 재료인 벽돌은 규격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견고한 건축이 가능하였습니다. 건축 문화에 있어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습니다. 애굽 지역은 돌 문화가 발달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벽돌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돌보다 진흙을 구어서 만든 벽돌이 약해서 바벨론 건축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시문명 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본주의 문화,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성읍과 높은 탑을 세워서 그것을 중심으로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탑’은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부릅니다. 여러 계단으로 이루어져 꼭대기에 신전 탑이 올려 진 형태입니다. 피라미드(pyramid)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합니다.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습니다.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사람을 잠깐 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니므롯은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우상숭배적인 새로운 예배를 제정합니다. 신적인 영광을 요구하고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 니므롯은 후에 바벨론과 계시록에서는 큰 바벨론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니므롯과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과 그 세력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전을 합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역에 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10:9에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이라고 했습니다. 니므롯의 본거지는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은 “하늘의 문”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이르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여러 사상과 종교로, 오늘날은 거기에 더해서 과학문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나아가고자 합니다. 동물 복제,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등을 이용해서 신의 영역에 이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자기중심이 되어 인간의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예배하며 그의 이름을 높여야 마땅한데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은 요한계시록 4:1에 나오는데 사도 요한이 “이리로 오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이 4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오직 양의 문이요, 열린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할 때에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홍수 심판 후에 100년 안 밖이었습니다. 이때 셈과 함과 야벳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홍수 심판이 와도 자기들 힘으로 살아남고자 바벨탑을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힘을 합해서 나름대로 뭔가 더 큰 일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성읍과 탑은 힘을 합치는데 필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 결정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9:1)는 창조 명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흩어져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예루살렘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 그들을 흩으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후에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흩으셨습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탑을 쌓으면서 야 망치줘 하면 톱을 주고, 벽돌을 올려 하면 사다리를 가져오고 하면서 혼란이 일어나자 그들은 결국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전에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바벨탑 사건에서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바벨’이란 “하늘의 문”이라는 의미에서 ‘혼란시키다’라는 의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었고 그들의 연합은 깨졌습니다. 서로 분산되었고 그만큼 힘이 약화되었습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자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문’인 ‘바벨’을 ‘혼잡, 혼란’으로 만드셨습니다. 한마디로 비웃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을 영광과 자랑으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혼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는 많은 종교와 사상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만약 인공지능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인류는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고 멸망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되어가는 과학 문명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은 징계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홍수 후에도 그 축복은 계속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9:7). 사람들은 이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왕국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는 하나 됨을 흩어버리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힘을 얻고 주중에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장 족보는 한 아버지에 한 아들만 기록하였습니다. 또 5장 족보와 마찬가지로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에 죽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족보의 특징입니다. 그 중 에벨에서 욕단으로 이어지는 대신 에벨에서 벨렉으로 이어지고 벨렉은 다시 데라, 아브라함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를 여자의 후손에서 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흐름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아브람을 통한 소망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 중 가인 대신 셋을 택하시고 셋의 자손 중 노아를 택하시고,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자손을 택하시고 셈의 자손 중 욕단 대신 벨렉을 택하셨습니다. 벨렉의 5대손이 아브라함입니다. 선택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로 쓸어버리는 중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은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소망을 두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은혜로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어렵지만 하나님은 소수의 택한 자를 통해서 줄기차게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자꾸 바벨탑을 쌓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보면 답답하고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흩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생각하며 지금 나의 위치에서 힘 있게 복음 역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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