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6강(6:1-22)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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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6 강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13,14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오늘 말씀은 노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중심으로 창조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죄로 인해서 인간이 부패하여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심판 가운데서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만들어 사람과 동물들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노아, 예수 그리스도는 새 역사의 조상들입니다. 노아는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죄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안식을 가져다 줄 자 노아(5:28,29). 5:28,29을 보십시오. “라멕은 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의 뜻은 “안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노아가 안식을 가져다 줄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식을 가져다 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어깨에서 죄 짐을 풀어 주시고 쉼을 주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시고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늘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서 불안하고 쉼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쉼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 쉼을 갖게 된 것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둘째,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6:1-12).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을 했습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이 무너지고 신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다 육신이 되었습니다. 죄가 관영하자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엡2:1). 육체가 된 인간은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120년 후에 심판하고자 결심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냥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가득할수록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약자들이 피해를 입고 약자들의 신음소리와 탄식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하였고 늘 어떻게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하고, 여성들을 겁탈을 하고, 죽고 죽이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간 본성이 부패했기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마치 썩어가는 쓰레기를 치우듯이 홍수로 물청소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은 인간의 죄악이 절정에 달한 때입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호의를 베풀 근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입니다. 노아는 진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일방적으로 입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노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삶의 기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원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에게 보배와 같은 단어입니다. 노아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와 관련해서 우리가 듣는 첫 번째 말씀은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아버지께 첫 번째 듣는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 3:17).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노아에게 온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적으로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네피림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육체적으로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노아는 우리 주님을 보여주는 완전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과 접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죄악 중에서 출생하고 죄 중에서 잉태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나실 때에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는 말씀처럼 죄인으로부터 떠나 계시고 죄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롭고 완전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자로 여겨짐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패역한 시대 속에서 영적인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가정 역시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리어진 것처럼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소원을 품고 행하는 모든 성도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빌2:13), 노아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에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일을 행하십니다. 심판 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까?
셋째, 하나님은 노아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셨습니다(13-22).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하나님은 홍수 심판에 대해서 예고하시고 방주를 지어서 대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올 불 심판을 대비해서 구원의 방주를 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설계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이 135m, 폭 22m, 높이가 13m입니다. 방주의 모양은 필요한 짐을 싣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고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합니다. 이 방주는 엄청난 파도와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안정성이 있고 복원력이 강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배에는 키나 돛이 없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이런 엄청난 크기의 목선을 만들도록 하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것에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방주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7,8).” 그리고 심판의 장면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창을 위쪽에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하나님은 노아에게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조물의 대표들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잃은 자와 파멸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라 (히 11:7)”
하나님은 노아와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방주를 건조하여 그 안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물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들과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보존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 2의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심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열 두 사도를 세우시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태우게 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준행하였습니다. 6장에는 “다 준행하였다”라는 말씀이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불신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다가 핍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는 수고와 헌신이 동반됩니다. 노아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연장도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얼마나 힘들게 방주를 지었을까요? 날마다 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잘라서 날랐습니다. “쾅~ 쾅” 나무 패는 소리가 온 산에 진동했을 것입니다. 미국 서부 킹 캐넌 국립공원에는 1700년 된 100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있다고 합니다. 노아 시대에는 이렇게 큰 나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런 큰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날랐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도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며 순종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삶을 통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순종하는 종들과 함께 주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사에 권위 있는 민경배 교수가 영국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에서 유학할 때 어떤 영국인 집에서 하숙했다고 합니다. 그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는 일은 하지 않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리고 애들을 못살게 구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술을 먹는 날에는 횡설수설하면서 “세계 역사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내 손 안에 있었다.”라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알아보았더니 그 할아버지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전용사였습니다. 전쟁 중에 독일군 부사관 두 명을 생포하여 부대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호송하던 어느 날 밤에 너무 피곤해서 깜빡 졸았습니다. 그 틈을 타서 두 명의 포로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할아버지는 한 명을 총으로 쏴서 쓰러뜨리고 다른 한 명을 쏘려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로가 “쏘지 마시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도망치도록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도망가던 그 독일군 부사관이 떨어뜨린 군번 목걸이가 있어서 그때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민경배 교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군번줄에는 놀랍게도 “아돌프 폰 히틀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쟁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때로는 잘못된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의로운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분열과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파면됨으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 교회가 새 사람들을 담을 수 있는 방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를 세계에 대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을 전하고 창세기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 양성하는 가운데 노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키워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13,14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오늘 말씀은 노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중심으로 창조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죄로 인해서 인간이 부패하여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심판 가운데서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만들어 사람과 동물들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노아, 예수 그리스도는 새 역사의 조상들입니다. 노아는 여러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죄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안식을 가져다 줄 자 노아(5:28,29). 5:28,29을 보십시오. “라멕은 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의 뜻은 “안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노아가 안식을 가져다 줄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식을 가져다 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어깨에서 죄 짐을 풀어 주시고 쉼을 주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시고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늘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서 불안하고 쉼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쉼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 쉼을 갖게 된 것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둘째,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6:1-12).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을 했습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이 무너지고 신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다 육신이 되었습니다. 죄가 관영하자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엡2:1). 육체가 된 인간은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120년 후에 심판하고자 결심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냥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가득할수록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약자들이 피해를 입고 약자들의 신음소리와 탄식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하였고 늘 어떻게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하고, 여성들을 겁탈을 하고, 죽고 죽이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간 본성이 부패했기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마치 썩어가는 쓰레기를 치우듯이 홍수로 물청소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은 인간의 죄악이 절정에 달한 때입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호의를 베풀 근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입니다. 노아는 진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일방적으로 입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노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삶의 기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원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에게 보배와 같은 단어입니다. 노아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와 관련해서 우리가 듣는 첫 번째 말씀은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아버지께 첫 번째 듣는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 3:17).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노아에게 온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적으로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네피림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육체적으로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노아는 우리 주님을 보여주는 완전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과 접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죄악 중에서 출생하고 죄 중에서 잉태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나실 때에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는 말씀처럼 죄인으로부터 떠나 계시고 죄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롭고 완전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자로 여겨짐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패역한 시대 속에서 영적인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가정 역시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리어진 것처럼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소원을 품고 행하는 모든 성도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빌2:13), 노아 안에서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과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에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일을 행하십니다. 심판 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까?
셋째, 하나님은 노아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셨습니다(13-22).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하나님은 홍수 심판에 대해서 예고하시고 방주를 지어서 대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올 불 심판을 대비해서 구원의 방주를 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설계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길이 135m, 폭 22m, 높이가 13m입니다. 방주의 모양은 필요한 짐을 싣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고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합니다. 이 방주는 엄청난 파도와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안정성이 있고 복원력이 강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배에는 키나 돛이 없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 속에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이런 엄청난 크기의 목선을 만들도록 하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것에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방주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7,8).” 그리고 심판의 장면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창을 위쪽에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하나님은 노아에게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조물의 대표들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잃은 자와 파멸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라 (히 11:7)”
하나님은 노아와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방주를 건조하여 그 안에 들어가면 생명을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물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들과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보존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 2의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심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열 두 사도를 세우시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태우게 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준행하였습니다. 6장에는 “다 준행하였다”라는 말씀이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불신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다가 핍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는 수고와 헌신이 동반됩니다. 노아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연장도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얼마나 힘들게 방주를 지었을까요? 날마다 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잘라서 날랐습니다. “쾅~ 쾅” 나무 패는 소리가 온 산에 진동했을 것입니다. 미국 서부 킹 캐넌 국립공원에는 1700년 된 100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있다고 합니다. 노아 시대에는 이렇게 큰 나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런 큰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날랐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도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며 순종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삶을 통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순종하는 종들과 함께 주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사에 권위 있는 민경배 교수가 영국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에서 유학할 때 어떤 영국인 집에서 하숙했다고 합니다. 그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는 일은 하지 않고 날마다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리고 애들을 못살게 구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술을 먹는 날에는 횡설수설하면서 “세계 역사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내 손 안에 있었다.”라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알아보았더니 그 할아버지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전용사였습니다. 전쟁 중에 독일군 부사관 두 명을 생포하여 부대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호송하던 어느 날 밤에 너무 피곤해서 깜빡 졸았습니다. 그 틈을 타서 두 명의 포로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할아버지는 한 명을 총으로 쏴서 쓰러뜨리고 다른 한 명을 쏘려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로가 “쏘지 마시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도망치도록 놔두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도망가던 그 독일군 부사관이 떨어뜨린 군번 목걸이가 있어서 그때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민경배 교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군번줄에는 놀랍게도 “아돌프 폰 히틀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쟁 중에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때로는 잘못된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의로운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분열과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파면됨으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 교회가 새 사람들을 담을 수 있는 방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를 세계에 대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을 전하고 창세기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 양성하는 가운데 노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키워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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