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5강(4:1-5:32)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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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5 강
말씀 | 창세기 4:1-5:32
요절 | 창세기 4:15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는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어 형제간에 시기와 질투와 살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죄악이 가진 영향력과 확대를 보게 됩니다. 3장에서 아담의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파괴를 나타냈는데 4장에서는 가정의 파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타락한 부모의 자녀들이요, 에덴동산 밖에서 태어났습니다. 둘 다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이요, 구주가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는 자기 의로 충만하고 하나는 상한 심령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요 하나는 참된 신자입니다. 하나는 자기 공로로 구원받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가인과 아벨의 예배(1-7).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고 이름을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와는 가인이 혹시 여자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하고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한숨이 늘어났습니다. 또 그가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이름의 뜻이 ‘숨, 공허, 허무’입니다. 가인을 키우면서 기대했던 행동보다 실망하는 부분이 많았던지 공허, 허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피의 제사냐 소제냐에 따라서 구별하신 것은 아닙니다. 소제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사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부족하거나 충족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정성, 치성을 우리가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정성을 드려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참고해 보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굉장히 폭 넓은 개념이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2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경 저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나 고행이나, 지식이나, 어떤 의가 아니라 오직 그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아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함으로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들은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 거절을 받자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것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거절 받은 상처,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 받은 상처,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당한 상처, 실패로 인해서 거절당한 상처 등 거절로 인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거절감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행해야 할 선은 무엇일까요? 선(善)이라는 한자의 모양을 보면 제단 위에서 양을 잡는 모습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양에게 전가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평소에 형제 아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는데 이는 사자가 먹이를 잡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는 언제든지 우리를 삼키려고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악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6:13,14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하나님께 제사가 거절을 당하자 가인은 분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반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자 아벨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시기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시기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살인죄를 저지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소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사탄 마귀에게 속하여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유혹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 인내만으로 온전히 성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 사탄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했습니다. “들로 나가자.” 이는 가인의 살인죄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고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들에 있을 때에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살인이 이루어졌습니다. 존속 살인이었습니다. 아담 가정에 일어난 가정불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사랑해야 할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리라.” 그리고 그에게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하였습니다. 가인은 여호와께 아룁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일정한 좌표나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음은 늘 불안과 두려움과 악령에 시달리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합니다. 사탄은 죄 짓는 것이 달콤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유혹하지만 죄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릅니다. 벌은 죄의식으로 인한 자책감과 두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심판과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믿을 때에 죄 짓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의 표’는 보호를 위한 문신으로서 가인이 자연수명까지 살도록 보장해주는 표입니다. 그가 객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는 사랑의 표입니다. 죄 지은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 성을 쌓는 가인의 후손들(16-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성을 쌓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마치 담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싫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담을 쌓습니다. 처음에는 담이 높지 않아서 담에 부딪쳐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담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구 넘어와서 아주 가까이 접근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담스러워 더 담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 후 좀 편해지는가 싶더니 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지겹도록 오래 머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담 위에 색칠도 하고 유리도 끼우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어둡게 칠했습니다. 이제는 담이 너무 높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거기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있는 그는 너무 적적하고 외로웠습니다. 이제는 깊은 고독과 허무감 외에는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인이 언제 죽었는지는 성경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은 담 속에서 고독사를 했을 것 같습니다.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은 일부다처를 얻었습니다. 아다와 씰라입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자랑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살인자의 후예답게 사람의 피를 마구 흘렸습니다. 자기에게 생긴 멍 때문에 아이를 죽였습니다. 자기의 부어오른 상처 때문에 소년이라도 마구 죽였습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괴로워했지만, 라멕은 뻔뻔하고 담대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고 화인 맞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성적인 쾌락과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약육강식의 시대, 정글로 변질되어 갑니다.
셋째, 셋의 후손들(25-5:32).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송축하며 예배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었고 예배하였습니다. ‘에노스’는 ‘약함’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의 약함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셋이 아담의 장자가 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구속역사를 이어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의 역사는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셋의 후예의 역사는 희망적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문명을 이루고 싸움을 잘하는 용사들이었지만, 셋의 후예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선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하고 별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들은 셋의 후손들이고, 이들을 통해서 생명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남은 자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죄악 된 시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는 날 심판이 온다.”입니다. 므두셀라가 태어난 후 243년이 지난 후에 아담이 930세에 죽었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므두셀라가 죽었습니다. 이때 노아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5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912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에녹입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에녹은 자식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은 것처럼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이 임할 것이니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교제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요일 1:6,7).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는 은혜 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깊이 깨닫고, 그의 완전하심을 더 풍성히 향유하고 그의 영광을 더 진지하게 사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뿌리 깊은 기쁨과 평안을 누렸습니다(시 23:4). 그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유 14,15).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으로서, 인간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허무하지만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체험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살아 있다면 죽음을 보지 않고 홀연히 변화되어 썩지 않을 몸,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우리는 이 시대에 아벨과 에녹과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벨이 목자였던 것 같이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아벨이 제물을 드린 것 같이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 까닭없이 육체를 따라 형제된 자들에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 형에 넘겨진 것은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연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인 그들에게 준엄한 형벌을 내리셔서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리방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보고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23:4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받으셨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셨습니다(행 2:32). 그리스도의 제물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히 12:24).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친히 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거룩한 씨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와 동행하며 그의 뜻을 알고 순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전하는 삶을 살 때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300년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에녹의 삶이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말씀 | 창세기 4:1-5:32
요절 | 창세기 4:15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는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어 형제간에 시기와 질투와 살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죄악이 가진 영향력과 확대를 보게 됩니다. 3장에서 아담의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파괴를 나타냈는데 4장에서는 가정의 파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타락한 부모의 자녀들이요, 에덴동산 밖에서 태어났습니다. 둘 다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이요, 구주가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는 자기 의로 충만하고 하나는 상한 심령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요 하나는 참된 신자입니다. 하나는 자기 공로로 구원받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가인과 아벨의 예배(1-7).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고 이름을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와는 가인이 혹시 여자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하고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한숨이 늘어났습니다. 또 그가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이름의 뜻이 ‘숨, 공허, 허무’입니다. 가인을 키우면서 기대했던 행동보다 실망하는 부분이 많았던지 공허, 허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피의 제사냐 소제냐에 따라서 구별하신 것은 아닙니다. 소제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사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부족하거나 충족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정성, 치성을 우리가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정성을 드려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을 참고해 보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굉장히 폭 넓은 개념이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2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경 저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나 고행이나, 지식이나, 어떤 의가 아니라 오직 그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아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함으로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들은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 거절을 받자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것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거절 받은 상처,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 받은 상처,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당한 상처, 실패로 인해서 거절당한 상처 등 거절로 인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거절감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행해야 할 선은 무엇일까요? 선(善)이라는 한자의 모양을 보면 제단 위에서 양을 잡는 모습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양에게 전가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평소에 형제 아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는데 이는 사자가 먹이를 잡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는 언제든지 우리를 삼키려고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악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6:13,14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하나님께 제사가 거절을 당하자 가인은 분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반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자 아벨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시기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시기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살인죄를 저지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소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사탄 마귀에게 속하여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유혹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 인내만으로 온전히 성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 사탄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했습니다. “들로 나가자.” 이는 가인의 살인죄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고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들에 있을 때에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살인이 이루어졌습니다. 존속 살인이었습니다. 아담 가정에 일어난 가정불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사랑해야 할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리라.” 그리고 그에게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하였습니다. 가인은 여호와께 아룁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일정한 좌표나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음은 늘 불안과 두려움과 악령에 시달리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합니다. 사탄은 죄 짓는 것이 달콤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유혹하지만 죄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릅니다. 벌은 죄의식으로 인한 자책감과 두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심판과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믿을 때에 죄 짓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의 표’는 보호를 위한 문신으로서 가인이 자연수명까지 살도록 보장해주는 표입니다. 그가 객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는 사랑의 표입니다. 죄 지은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 성을 쌓는 가인의 후손들(16-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성을 쌓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마치 담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싫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담을 쌓습니다. 처음에는 담이 높지 않아서 담에 부딪쳐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담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구 넘어와서 아주 가까이 접근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담스러워 더 담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 후 좀 편해지는가 싶더니 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지겹도록 오래 머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담 위에 색칠도 하고 유리도 끼우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어둡게 칠했습니다. 이제는 담이 너무 높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거기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있는 그는 너무 적적하고 외로웠습니다. 이제는 깊은 고독과 허무감 외에는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인이 언제 죽었는지는 성경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은 담 속에서 고독사를 했을 것 같습니다.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은 일부다처를 얻었습니다. 아다와 씰라입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자랑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살인자의 후예답게 사람의 피를 마구 흘렸습니다. 자기에게 생긴 멍 때문에 아이를 죽였습니다. 자기의 부어오른 상처 때문에 소년이라도 마구 죽였습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괴로워했지만, 라멕은 뻔뻔하고 담대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고 화인 맞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성적인 쾌락과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약육강식의 시대, 정글로 변질되어 갑니다.
셋째, 셋의 후손들(25-5:32).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송축하며 예배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었고 예배하였습니다. ‘에노스’는 ‘약함’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의 약함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셋이 아담의 장자가 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구속역사를 이어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의 역사는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셋의 후예의 역사는 희망적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문명을 이루고 싸움을 잘하는 용사들이었지만, 셋의 후예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선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하고 별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들은 셋의 후손들이고, 이들을 통해서 생명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남은 자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죄악 된 시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5장은 아담의 계보입니다.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는 날 심판이 온다.”입니다. 므두셀라가 태어난 후 243년이 지난 후에 아담이 930세에 죽었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므두셀라가 죽었습니다. 이때 노아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5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912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에녹입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에녹은 자식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은 것처럼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이 임할 것이니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교제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요일 1:6,7).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는 은혜 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깊이 깨닫고, 그의 완전하심을 더 풍성히 향유하고 그의 영광을 더 진지하게 사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뿌리 깊은 기쁨과 평안을 누렸습니다(시 23:4). 그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유 14,15).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으로서, 인간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허무하지만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체험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살아 있다면 죽음을 보지 않고 홀연히 변화되어 썩지 않을 몸,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우리는 이 시대에 아벨과 에녹과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벨이 목자였던 것 같이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아벨이 제물을 드린 것 같이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 까닭없이 육체를 따라 형제된 자들에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 형에 넘겨진 것은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연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인 그들에게 준엄한 형벌을 내리셔서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리방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보고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23:4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받으셨음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셨습니다(행 2:32). 그리스도의 제물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히 12:24).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친히 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거룩한 씨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와 동행하며 그의 뜻을 알고 순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준행하고 전하는 삶을 살 때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300년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에녹의 삶이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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