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4강(3:1-24) 여자의 후손을 약혹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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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4 강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모판인데 특별히 3장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 시간 인간의 실존에 대한 통찰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타락(1-8).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였습니다. 뱀의 외적인 특성을 보면 이빨은 안으로 굽어서 한 번 물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혀가 갈라져 있습니다. 눈은 밤에 잘 볼 수 있고 귀가 없지만 몸으로 진동을 느낍니다. 뱀은 소리 없이 이동합니다. 뱀은 입이 크고 튼튼해서 자기 몸의 열 배나 되는 짐승을 삼킬 수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뱀은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머리에 뱀의 형상을 쓰고 있고 신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의사협회와 세계보건기구도 뱀의 문양을 그 마크에 새겨 넣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다가와 말은 건 존재는 뱀을 이용한 사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사야 14:13,14을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사탄이 들어간 뱀이 여자에게 작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던지면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가 정말로 의도한 것은 다르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신적 영감과 절대적인 권위를 배격하기 위한 시도, 학문의 미명 하에 성경에 가해지는 모든 공격은 사탄의 옛 질문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 8:44은 사탄의 속성과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 합니다. 뱀의 말을 듣고 여자는 의심어린 말로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비틀거리자 사탄이 한 방을 먹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거짓 확신을 심자 하와는 이를 쉽게 믿어버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5,6).”
여자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즉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사탄이 심어준 말을 받아들이자 선악과가 그렇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여자는 욕망에 사로잡히자 그 열매를 따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손을 들어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작게 시작되었지만 영향력을 가지고 점차로 확대됩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시고 오직 하나의 제한을 두셨습니다.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만드신 이를 섬기며 순종하며 영화롭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꾀임을 받고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인지가 왜곡된 존재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니 진실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죄악된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회개할 때에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진무구하던 그들이 선과 악을 아는 양심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타락을 증언하는데 내 안에 자신을 괴롭히는 참소자와 재판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이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양심은 영혼 안에서 울리는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고, 도덕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책임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추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는 방법들을 많이 개발했습니다. 자기방어기제를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또 수치를 가리기 위해 자기 의의 옷을 만듭니다. 교회에 가는 것, 봉사활동과 구제에 동참하는 것, 예절을 지키는 것, 마음에는 없는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말라 부서져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양심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양심은 사람을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도록 만듭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온갖 악을 행하도록 부추깁니다.
둘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8-13)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죄인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슬픔의 부르심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제시하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그때 이래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 숭배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치자 하나님이 벧엘에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가운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셔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도 변명을 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죄를 합리화하고 책임전가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관계가 깨져버렸습니다.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죄는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죄는 자연까지 파괴시켰습니다.
셋째, 여자의 후손(14-24). 여호와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참한 굴욕과 완전한 패배를 나타냅니다(사49:23; 미7:17). 여자로 말미암아 저주가 들어왔지만 또 여자로 말미암아 낙원을 되찾을 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죽어갈 때에 모세가 기도하자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4,15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이미 역사가 되었습니다. 여자의 씨가 발꿈치를 상한다는 것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가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이 세상을 치료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백종만 YPP 회장은 A를 기술영업 노하우를 전수하고 각종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거대한 공장 시설의 중요 설비에 폭발화재 사고가 나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는 장비에 관한 업무였습니다. 모든 발전소, 특히 원자력발전소 대부분에 이 장비가 들어갔습니다. A는 시장 점유율을 100%까지 끌어올리며 회사의 핵심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입사 10년차에 사표를 내고 회사의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회사 매출의 60%에 달하는 사업 분야가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린 것입니다. 백회장은 회사가 어려워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배신감으로 잠을 설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를 여러 날이었습니다. 그가 회사를 떠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A를 만났는데 7월의 무더위에 오리털 점퍼를 입고 노숙자처럼 들어왔습니다. A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오만을 회개했습니다. 회장은 그를 보면서 “저 인간이 너무 밉지만 그래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쳐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인생 최대의 원수를 살리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음날부터 회사에 나오게 하고 사채를 줬다는 사람들을 자기한테 오라고 하며 빚을 다 갚아줬습니다. A는 신앙이 없었는데 교회에 다니고 있고 승진을 거듭하여 사장까지 오른 뒤 은퇴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원수를 용서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국민일보 2025년 3월 17,18일 역경의 열매).
뱀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땅으로 떨어지게 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탄의 완전한 제거는 아직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하나님은 사탄을 통해서 믿음의 자손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삿2:22) 그들이 거짓에 맞서 싸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삿3:2) 잠깐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10에 의하면 이후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탄이 최종 심판을 받고 완전히 제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됩니다.
여자는 죄의 결과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게 되었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아담은 아내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땅은 저주를 받고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됩니다. 남편된 형제들은 가끔 “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형제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육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5:5을 보면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다음으로 남편과 아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육체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죽음이 보편적인 것은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지난 주 우리는 두 분의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죽음은 참으로 슬프고 인생의 허무함을 실감나게 합니다.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영접하고 아내에게서 생명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양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장차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속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 것을 염려하사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습니다. 타락한 가운데 영원 불사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쉼이 없는 수고로운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심판이자 동시에 고통과 저주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낙원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과 생명나무 실과를 없애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를 지킴으로서 인생들에게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자 그에 따른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죄에는 항상 그에 따른 벌이 있습니다. 죄에 따른 벌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 고상하고 칭찬할만한 일을 하지만, 다음 순간 추잡하며 악한 일을 행합니다. 때로는 선하며 숭고한 데 또 스스로 죄의 낙에 자신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면을 보면 영락없이 사탄의 자녀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복합적인 이중성, 선과 악의 충돌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절망을 해야 구원자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또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짐승을 희생하여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할 소망을 남겨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 19:41).”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를 예배하고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창세기 3:1-24
요절 |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모판인데 특별히 3장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 시간 인간의 실존에 대한 통찰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타락(1-8).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였습니다. 뱀의 외적인 특성을 보면 이빨은 안으로 굽어서 한 번 물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혀가 갈라져 있습니다. 눈은 밤에 잘 볼 수 있고 귀가 없지만 몸으로 진동을 느낍니다. 뱀은 소리 없이 이동합니다. 뱀은 입이 크고 튼튼해서 자기 몸의 열 배나 되는 짐승을 삼킬 수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뱀은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는 머리에 뱀의 형상을 쓰고 있고 신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의사협회와 세계보건기구도 뱀의 문양을 그 마크에 새겨 넣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다가와 말은 건 존재는 뱀을 이용한 사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이사야 14:13,14을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사탄이 들어간 뱀이 여자에게 작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던지면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가 정말로 의도한 것은 다르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신적 영감과 절대적인 권위를 배격하기 위한 시도, 학문의 미명 하에 성경에 가해지는 모든 공격은 사탄의 옛 질문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 8:44은 사탄의 속성과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 합니다. 뱀의 말을 듣고 여자는 의심어린 말로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비틀거리자 사탄이 한 방을 먹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거짓 확신을 심자 하와는 이를 쉽게 믿어버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5,6).”
여자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즉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사탄이 심어준 말을 받아들이자 선악과가 그렇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여자는 욕망에 사로잡히자 그 열매를 따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이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손을 들어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작게 시작되었지만 영향력을 가지고 점차로 확대됩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시고 오직 하나의 제한을 두셨습니다.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만드신 이를 섬기며 순종하며 영화롭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꾀임을 받고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인지가 왜곡된 존재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니 진실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죄악된 모습을 깊이 발견하고 회개할 때에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진무구하던 그들이 선과 악을 아는 양심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타락을 증언하는데 내 안에 자신을 괴롭히는 참소자와 재판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이것은 교육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양심은 영혼 안에서 울리는 작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고, 도덕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책임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추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는 방법들을 많이 개발했습니다. 자기방어기제를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또 수치를 가리기 위해 자기 의의 옷을 만듭니다. 교회에 가는 것, 봉사활동과 구제에 동참하는 것, 예절을 지키는 것, 마음에는 없는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말라 부서져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양심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양심은 사람을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도록 만듭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이용해서 온갖 악을 행하도록 부추깁니다.
둘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8-13)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죄인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슬픔의 부르심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제시하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그때 이래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 숭배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치자 하나님이 벧엘에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가운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셔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도 변명을 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죄를 합리화하고 책임전가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관계가 깨져버렸습니다.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죄는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죄는 자연까지 파괴시켰습니다.
셋째, 여자의 후손(14-24). 여호와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참한 굴욕과 완전한 패배를 나타냅니다(사49:23; 미7:17). 여자로 말미암아 저주가 들어왔지만 또 여자로 말미암아 낙원을 되찾을 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죽어갈 때에 모세가 기도하자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4,15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이미 역사가 되었습니다. 여자의 씨가 발꿈치를 상한다는 것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가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이 세상을 치료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백종만 YPP 회장은 A를 기술영업 노하우를 전수하고 각종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거대한 공장 시설의 중요 설비에 폭발화재 사고가 나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는 장비에 관한 업무였습니다. 모든 발전소, 특히 원자력발전소 대부분에 이 장비가 들어갔습니다. A는 시장 점유율을 100%까지 끌어올리며 회사의 핵심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입사 10년차에 사표를 내고 회사의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회사 매출의 60%에 달하는 사업 분야가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린 것입니다. 백회장은 회사가 어려워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배신감으로 잠을 설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를 여러 날이었습니다. 그가 회사를 떠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A를 만났는데 7월의 무더위에 오리털 점퍼를 입고 노숙자처럼 들어왔습니다. A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오만을 회개했습니다. 회장은 그를 보면서 “저 인간이 너무 밉지만 그래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쳐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인생 최대의 원수를 살리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음날부터 회사에 나오게 하고 사채를 줬다는 사람들을 자기한테 오라고 하며 빚을 다 갚아줬습니다. A는 신앙이 없었는데 교회에 다니고 있고 승진을 거듭하여 사장까지 오른 뒤 은퇴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원수를 용서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국민일보 2025년 3월 17,18일 역경의 열매).
뱀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땅으로 떨어지게 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탄의 완전한 제거는 아직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하나님은 사탄을 통해서 믿음의 자손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삿2:22) 그들이 거짓에 맞서 싸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삿3:2) 잠깐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10에 의하면 이후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탄이 최종 심판을 받고 완전히 제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됩니다.
여자는 죄의 결과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게 되었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아담은 아내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땅은 저주를 받고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됩니다. 남편된 형제들은 가끔 “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형제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육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5:5을 보면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다음으로 남편과 아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육체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죽음이 보편적인 것은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지난 주 우리는 두 분의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죽음은 참으로 슬프고 인생의 허무함을 실감나게 합니다.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있습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영접하고 아내에게서 생명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양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장차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속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 것을 염려하사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습니다. 타락한 가운데 영원 불사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쉼이 없는 수고로운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심판이자 동시에 고통과 저주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낙원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과 생명나무 실과를 없애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를 지킴으로서 인생들에게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자 그에 따른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죄에는 항상 그에 따른 벌이 있습니다. 죄에 따른 벌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 고상하고 칭찬할만한 일을 하지만, 다음 순간 추잡하며 악한 일을 행합니다. 때로는 선하며 숭고한 데 또 스스로 죄의 낙에 자신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면을 보면 영락없이 사탄의 자녀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복합적인 이중성, 선과 악의 충돌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절망을 해야 구원자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또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짐승을 희생하여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할 소망을 남겨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 19:41).”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를 예배하고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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