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3강(2:4-25)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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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3 강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1장에서 천지만물의 창조를 기록했는데 오늘 말씀은 초점을 당겨 인간 창조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는 인간은 그 방향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즉 인간은 그 존재가 하나님께 달려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예속된 피조물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우선적 책임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은 동료 인간을 향하여 있습니다. 즉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홀로 완전하지 못하며 고립된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는 완전치 못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갖는 인격체입니다.
2:4-6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오늘 말씀은 하늘과 땅에서 인간의 삶의 터전이 되는 땅에 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아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는데 새 한글 성경은 “샘물이 땅에서 솟아나 땅거죽을 적셨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적시다는 마시게 하다는 뜻입니다. 물이 흘러야 마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기 자존하시며 완전한 존재이시지만 온전하고 신비로운 연합의 존재로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십니다. ‘인격적 관계’는 서로 동등하며 사랑으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인격적 관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타락의 결과 인격적이지 못한 자신이나 타인, 사회 속에서 상처를 받고, 갈등이 심해지면 인격 장애까지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실존적인 문제들이 믿음으로 해결되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 즉 티끌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호흡, 생명의 기운을 말합니다. 2:19을 보면 동물도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동물에 대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인간론은 인간을 몸과 영혼의 합일체로서 보지 않고 인간을 몸이면서 동시에 영으로 인식합니다. 즉 인간을 두 실체(이원론)나 세 실체(삼분설-영혼육)의 합일체라 하지 않고 ‘영-육의 통일체’로 봅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영성 및 이성과 정서, 행동, 그리고 통찰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통전적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차원들인 몸, 마음, 영혼이 한 인격 속에 기능하는 다른 역할들로 보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은 인간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바로 그 하나님의 호흡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문구입니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생령’(네페쉬 하야)은 열정적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 욕구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기서 ‘창설하셨다’는 뜻은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성전 신학에서 에덴은 최초의 성전입니다. 3장 8절에서 하나님이 거니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광야에 성막을 세웠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이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세워졌는데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고, 교회가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됩니다(계 21:22).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는 것은 땅을 경작하거나 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출3:12).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 성전의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탁하신 동산을 경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아담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왕으로 다스리며 거룩함을 지키도록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회복됩니다. 실낙원을 경험한 우리에게 있는 깊은 갈망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에덴(delight)은 희락, 유쾌함, 더할 나위 없는 기쁨, 풍요한 번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동산에 인간을 세우시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조화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지극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 에덴동산에는 사시사철 과일이 열매를 맺어 먹고 살 걱정이 없었습니다.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또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이 있습니다. 비손 강은 갈릴리- 사해 –아라비아로 이어지고, 기혼은 나일 강으로 추정하고, 힛데겔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 강으로, 유브라데는 고대 바빌로니아 지역으로 흘렀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고원지대에 있었을 것입니다. 용천수가 강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내려 적시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나옵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흘러나갑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백옥과 수정같이 맑았습니다. 우리는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합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아담과 가장 비슷한 나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이 부어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보면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의 가치를 확인할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지식 나무를 보면서 이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지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의 생명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서 풍성해집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금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에 대한 분별 기능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그렇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서를 인식시켜 주는 나무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불순종 하는 것이 악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할 때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할 때 자기만족과 성취를 위해서 성공하고자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보였고 복의 근원으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거나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자유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첫째 조건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우리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패트릭 헨리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와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입니다.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여기에 포함되고, 이는 시민이 정부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권리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혁명과 독립운동은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경제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직업을 선택하며,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시장경제에서는 개인과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번영이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제한적 자유가 불평등을 초래할 수도 있어 사회적 안전망과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자유는 성별, 인종,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유는 방종과 다릅니다. 개인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릅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사회적 규범과 법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적인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자유에 따른 인간의 책임을 정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좋고 해로움에 대한 지식 나무”인데 그 열매를 따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 그에게 순종하고 경배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간의 영적인 질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 인간 – 만물이라는 영적인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질서 속에서만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계명은 인간을 억압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가운데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질서 가운데서 에덴의 기쁨을 누리도록 주신 축복의 말씀이죠. 질서를 먼저 주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계명의 말씀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법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면 행복도 없고 참된 기쁨도 없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실 때 참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열쇠입니다.
18-25절은 여자를 만드신 이야기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대요”라고 말해보면 좋겠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그에게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아담이 온갖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온갖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사자, 기린, 곰, 호랑이, 독수리, 참새 등등. 그러나 거기에는 아담과 짝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짐승들과 아담은 격이 달랐습니다. 각종 짐승들에게는 암수 짝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짐승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완성하는데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구원 역사를 이루는데 동참하도록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서 어떻게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이 말씀에 힌트를 얻어 어떤 사람이 마취제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잠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가 깊이 잠들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갈빗대는 옆구리를 뜻합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그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후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유월절 양을 잡아서 가족이 함께 먹었습니다. 유월절 양으로 10-30명이 함께 먹었습니다.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각 가정에서 유월절 예식을 가졌는데 이것은 가정교회였습니다. 에베소서 5:23,24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가정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아내를 돕는 배필로 주셨는데 돕는다는 것은 보조의 개념이 아니라 동등의 개념입니다. ‘돕는’의 명사형 ‘돕는 자’(에제르)는 구약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16번이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도우시는데 바로 아내를 통해서 도우십니다. 돕는 배필 = 말하다 + 앞으로서 앞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잔소리하는 것도 다 나를 돕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 (man)는 히브리어로 ‘이쉬’이고 여자 (woman)은 ‘이솨’입니다. 즉 이쉬에서 이솨가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남자는 흙의 재질로 만들었지만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토기장이의 작품이라면 하와는 의사의 작품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동일한 인격체이며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다 여인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남자들과 동등한 존재이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신 여자를 맞이하는 아담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3).” 아담은 그 여자를 보자마자 나라고 인식을 합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립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동등한 인격으로서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도 없고 늘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창조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최초에 결혼을 창설하실 때 사명을 중심으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이루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의 빈 자리를 채워주도록 요구만 해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할 때에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첫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서로를 감당해 가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아내나 남편이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성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가정은 제한적인 제도입니다. 마 22:30에서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확대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정은 교회이고, 교회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먹고 살 염려가 없는 과일과 맑은 물과 사명과 가정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한 생각이 얼마나 세밀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회복될 것이고 우리는 다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해 나갈 때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직 미혼인 분들은 가정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감으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가정교회인 요회를 에덴동산과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요회 안에서 사역을 하면서 일생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성숙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1장에서 천지만물의 창조를 기록했는데 오늘 말씀은 초점을 당겨 인간 창조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는 인간은 그 방향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즉 인간은 그 존재가 하나님께 달려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예속된 피조물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우선적 책임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은 동료 인간을 향하여 있습니다. 즉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홀로 완전하지 못하며 고립된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는 완전치 못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갖는 인격체입니다.
2:4-6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오늘 말씀은 하늘과 땅에서 인간의 삶의 터전이 되는 땅에 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아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는데 새 한글 성경은 “샘물이 땅에서 솟아나 땅거죽을 적셨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적시다는 마시게 하다는 뜻입니다. 물이 흘러야 마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기 자존하시며 완전한 존재이시지만 온전하고 신비로운 연합의 존재로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십니다. ‘인격적 관계’는 서로 동등하며 사랑으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인격적 관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타락의 결과 인격적이지 못한 자신이나 타인, 사회 속에서 상처를 받고, 갈등이 심해지면 인격 장애까지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실존적인 문제들이 믿음으로 해결되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 즉 티끌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호흡, 생명의 기운을 말합니다. 2:19을 보면 동물도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동물에 대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인간론은 인간을 몸과 영혼의 합일체로서 보지 않고 인간을 몸이면서 동시에 영으로 인식합니다. 즉 인간을 두 실체(이원론)나 세 실체(삼분설-영혼육)의 합일체라 하지 않고 ‘영-육의 통일체’로 봅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영성 및 이성과 정서, 행동, 그리고 통찰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통전적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차원들인 몸, 마음, 영혼이 한 인격 속에 기능하는 다른 역할들로 보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은 인간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바로 그 하나님의 호흡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문구입니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생령’(네페쉬 하야)은 열정적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 욕구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기서 ‘창설하셨다’는 뜻은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성전 신학에서 에덴은 최초의 성전입니다. 3장 8절에서 하나님이 거니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광야에 성막을 세웠고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이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세워졌는데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고, 교회가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됩니다(계 21:22).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다’는 것은 땅을 경작하거나 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출3:12).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 성전의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탁하신 동산을 경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아담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왕으로 다스리며 거룩함을 지키도록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회복됩니다. 실낙원을 경험한 우리에게 있는 깊은 갈망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에덴(delight)은 희락, 유쾌함, 더할 나위 없는 기쁨, 풍요한 번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동산에 인간을 세우시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조화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지극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 에덴동산에는 사시사철 과일이 열매를 맺어 먹고 살 걱정이 없었습니다.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또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이 있습니다. 비손 강은 갈릴리- 사해 –아라비아로 이어지고, 기혼은 나일 강으로 추정하고, 힛데겔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 강으로, 유브라데는 고대 바빌로니아 지역으로 흘렀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고원지대에 있었을 것입니다. 용천수가 강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내려 적시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나옵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흘러나갑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백옥과 수정같이 맑았습니다. 우리는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합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아담과 가장 비슷한 나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이 부어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보면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의 가치를 확인할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지식 나무를 보면서 이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지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의 생명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서 풍성해집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금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에 대한 분별 기능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그렇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서를 인식시켜 주는 나무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불순종 하는 것이 악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할 때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할 때 자기만족과 성취를 위해서 성공하고자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보였고 복의 근원으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거나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자유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첫째 조건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우리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패트릭 헨리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와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입니다.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여기에 포함되고, 이는 시민이 정부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권리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혁명과 독립운동은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경제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직업을 선택하며, 경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시장경제에서는 개인과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번영이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제한적 자유가 불평등을 초래할 수도 있어 사회적 안전망과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자유는 성별, 인종,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유는 방종과 다릅니다. 개인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릅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사회적 규범과 법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적인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자유에 따른 인간의 책임을 정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좋고 해로움에 대한 지식 나무”인데 그 열매를 따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 그에게 순종하고 경배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간의 영적인 질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 인간 – 만물이라는 영적인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질서 속에서만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계명은 인간을 억압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가운데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질서 가운데서 에덴의 기쁨을 누리도록 주신 축복의 말씀이죠. 질서를 먼저 주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계명의 말씀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법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면 행복도 없고 참된 기쁨도 없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실 때 참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열쇠입니다.
18-25절은 여자를 만드신 이야기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대요”라고 말해보면 좋겠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그에게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아담이 온갖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온갖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사자, 기린, 곰, 호랑이, 독수리, 참새 등등. 그러나 거기에는 아담과 짝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짐승들과 아담은 격이 달랐습니다. 각종 짐승들에게는 암수 짝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짐승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완성하는데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구원 역사를 이루는데 동참하도록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서 어떻게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이 말씀에 힌트를 얻어 어떤 사람이 마취제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잠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가 깊이 잠들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갈빗대는 옆구리를 뜻합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그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후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유월절 양을 잡아서 가족이 함께 먹었습니다. 유월절 양으로 10-30명이 함께 먹었습니다. 유월절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각 가정에서 유월절 예식을 가졌는데 이것은 가정교회였습니다. 에베소서 5:23,24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가정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아내를 돕는 배필로 주셨는데 돕는다는 것은 보조의 개념이 아니라 동등의 개념입니다. ‘돕는’의 명사형 ‘돕는 자’(에제르)는 구약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16번이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도우시는데 바로 아내를 통해서 도우십니다. 돕는 배필 = 말하다 + 앞으로서 앞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잔소리하는 것도 다 나를 돕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 (man)는 히브리어로 ‘이쉬’이고 여자 (woman)은 ‘이솨’입니다. 즉 이쉬에서 이솨가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남자는 흙의 재질로 만들었지만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토기장이의 작품이라면 하와는 의사의 작품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동일한 인격체이며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다 여인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남자들과 동등한 존재이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신 여자를 맞이하는 아담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3).” 아담은 그 여자를 보자마자 나라고 인식을 합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립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동등한 인격으로서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도 없고 늘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창조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최초에 결혼을 창설하실 때 사명을 중심으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이루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의 빈 자리를 채워주도록 요구만 해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할 때에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첫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숙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서로를 감당해 가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아내나 남편이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성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가정은 제한적인 제도입니다. 마 22:30에서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확대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정은 교회이고, 교회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먹고 살 염려가 없는 과일과 맑은 물과 사명과 가정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한 생각이 얼마나 세밀하신지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회복될 것이고 우리는 다 그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해 나갈 때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직 미혼인 분들은 가정교회를 이루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감으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가정과 가정교회인 요회를 에덴동산과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요회 안에서 사역을 하면서 일생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성숙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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