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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25년 창2강(1:26-2:3)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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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4회 작성일 25-03-0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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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2 강                                                     
말씀 | 창세기 1:26-2:3
요절 | 창세기 1:3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사람은 참 신묘막측한 존재입니다. 말을 하고, 지성과 상상력을 사용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거룩하고, 음악과 춤과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분노합니다. 여기 앉아서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고, 역사를 연구합니다. 인간은 짐승과 함께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지만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이 시간 이런 인간의 창조와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사람이 왜 존귀한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무생물과 생물을 창조하실 때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드실 때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의논을 하셨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유추하고, 기억하고,  생각나게 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제 동생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제 동생에게 형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면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의 행동거지가 아버지를 닮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특성을 내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4은 말씀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골 1:15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 14:9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의 통치 기능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다스리는 것은 왕의 권한 행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으로서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게 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위에 임명된 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왕 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2:5은 말씀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함으로 왕 노릇합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왕 노릇 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고 돌보는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았습니다. 왕은 권한과 책임도 부여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에 책임은 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힘을 행사하여 폭력이 난무하고 결국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권한을 주신 것은 책임을 다하라는 것인데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세계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구절의 ‘남자와 여자’가 히브리어로 ‘이쉬와 이솨’가 아니고 ‘자카르와 너께바’ 즉 ‘수컷과 암컷’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의 번역서가 사람에게 쓰인 단어와 동물에게 쓰인 단어를 구분지으려 노력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같은 속성과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속성이 섞여 있습니다. 일생동안 신의 성품으로 성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짐승 같은 암컷 수컷이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과 교육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성품이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사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를 보면 사람 ‘인’만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왜 ‘사이 간’자를 넣어서 인간을 표현할까요? 바로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서로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서 최종적으로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신앙이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 때에 사랑하는 여부를 보면 그가 어느 정도 성장한 사람인지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로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죄악된 본성이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훈련하시며 포기하지 않고 도우십니다. 인간은 복잡하고 연약한 존재라 사람마다 상처받는 지점이 다릅니다. 그 상처를 보듬고 치료하기 위해서 주님과 나 만의 깊은 고독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존귀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데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이 다릅니다. 재능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영혼을 소유한 존재요, 덕을 소유하고 사랑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셨지만 사람과만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복으로 사명을 받은 인간.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창조하시고도 복을 주셨는데 사람을 창조하시고도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채우는 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주신 복이 더 많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공통으로 주셨는데 사람에게만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복을 더하셨습니다. 복이란 히브리어로 바라크인데 ‘무릎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물질적인 풍요도 복이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복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궁극적인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복입니다. 사람의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누릴 수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그 존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즉 생명의 확대입니다. 생명의 고귀함, 존중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 또 영적인 자녀들을 많이 낳고 기르는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녀 양육의 수고를 통해서 많은 기쁨과 보람을 누립니다. 생명이 충만해짐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죽음의 그늘,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렇게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정복하는 것도 왕의 일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정치적인 억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왕으로서 그런 슬픈 운명을 정복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고,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평등과 공의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복당하고 다스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정복한다는 것은 복종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사명을 위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하고 키우는 일, 땅 끝까지 나아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을 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마 28:18,19). 오늘날은 돈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을 다스리고, 물질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재정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생활이 어려워 항상 빚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재정과 회계에 대한 연구를 하고 관리를 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돕는 목자님은 아이들이 그들의 나이에 맞게 잘 놀고 자라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부의 입장에서는 집안을 잘 정리하고 식구들을 잘 먹이고 건강하게 생활하도록 살림을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사실 몇 가지 십자가를 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잘 다스리고 삶의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먼저 사명을 위해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의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28,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상추, 배추, 무, 시금치, 감자, 고구마, 쌀, 밀, 바나나, 사과, 배, 망고, 파인애플, 감, 밤, 귤, 오렌지, 딸기 등등 사시사철 먹을 것들을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생물이 풍성한 가운데 생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으로 인해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먹고 사는 문제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고 일을 해도 기대했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창3:18; 학1:9-11).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매일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삶의 터전으로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중을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먹고 사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힘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겠다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신 소감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소감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좋았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최상급으로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보시고 이렇게 소감을 발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뭇 잎 하나, 벌레 한 마리를 보아도 정말 완전무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만물 중에서 인간은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여기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생각하며 무가치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늘 목이 마르지만 잘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또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말을 들을 때는 상처를 받습니다. 특히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공은 상사가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로 살아가면 늘 세상은 불공평하게 보이고 고통은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신의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매순간 일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기뻐하고 자기 성취에 만족감을 느낍니다. 조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삶에서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히 기뻐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고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아발견을 할 때 남과 비교하여 자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의 근본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사43:7).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2장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일곱째 날도 일을 하셨습니다.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마치시고와 다 이루었다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안식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생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자 하고, 하나님보다 앞서가니 늘 피곤하고 염려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을 하고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쉼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힘을 얻고 다음 한 주를 힘있게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신명기 5:15을 보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참된 안식은 종 되었던 삶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 되었던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서 참된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은 죄와 죽음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누리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가 시작되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것을 상징하는 날이며,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첫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라면, 신약의 주일은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창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복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함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때 기쁘고 복된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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