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1강(1:1-2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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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1 강
말씀 | 창세기 1:1-25
요절 | 창세기 1: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올해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를 썼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사업을 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청년의 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기초를 놓는 때입니다. 인생의 집을 지을 때에 기초가 튼튼할수록 높고 아름다운 건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건물을 높이 쌓을 수도 없고 쉽게 부서집니다. 무언가를 이룬 대가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초를 탄탄히 하는 일에 힘을 쓰고 그 위에 자기만의 업적을 이루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운동선수건, 음악가건, 학자건,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대성하였습니다. 인생의 기초는 분명한 가치관, 신앙관, 역사관, 윤리 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시작이 됩니다.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 이런 것이 분명해져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이끈 인물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에게는 어떤 축복과 약속이 주어져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조상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애굽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살아왔던 애굽은 다신교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창세기는 세상의 시작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Genesis입니다. 이는 ‘게네시스’(γενεσεσ)에서 나온 말입니다. 게네시스는 족보,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는 족보라는 말이 10번 나옵니다. 천지의 내력부터 아담 집안, 노아 집안, 노아 아들들의 집안, 셈 집안, 데라 집안, 이스마엘 집안, 이삭 집안, 에서 집안, 야곱 집안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집안을 중심으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집안은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저자는 여러 집안의 족보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이 무엇이지를 잘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정체성을 명확히 밝혀줌으로서, 어디를 향하여 나아갈지 방향을 잡게 합니다. 즉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거치면서 기근으로부터 자신들과 애굽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창세기가 끝을 맺습니다. 그 후 출애굽기를 통해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한번쯤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 생겼을까? 또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그리고 맨 처음 사람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자연스럽게 있던 것인가? 아메바로부터 진화된 것인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체험하게 되면 누구나 허무한 인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무언가 성취를 해보고, 미친 듯이 일이나 게임에 빠져도 보고, 쾌락으로도 도피해 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해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인생이려니 생각하면서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천지만물과 자신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민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빛과 같은 감동을 줍니다. ‘태초에’는 영원의 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시작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사야 46:10을 보면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2:13).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로힘’으로서 복수명사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삼위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해야할 강하고 능력 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성경과 창세기의 최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엘로힘은 특히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 아니라 전 우주에 대하여 주권을 가진 창조주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공동체를 이루시되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존재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이시기에 역동적으로 사랑하시며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사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가정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의 원형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천지’( NIV - the heavens and the earth)란 하늘들과 땅인데 만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광대한 우주 공간과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하늘들이라고 말씀했을까요? 당시의 우주관은 삼층천이었습니다. 즉 대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거하는 둘째 하늘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또 어디서든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세계를 초월해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해 계십니다. 오늘날은 천체 망원경으로 별들과 우주를 관측할 수 있고 그 크기까지 측량합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38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주 공간과 그 안에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광대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대로 이 세상이 윤회를 한다면 모든 것이 돌고 돈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저 고기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일 수도 있는데요. 우리가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은 오발탄입니까? 의미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가야 한다면 ‘나’라는 존재의미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합니까?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영접한다면 내 인생은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내가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나를 이 세상에 분명한 뜻을 갖고 보내신 분이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 뜻을 이루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친을 일곱 살에 잃었습니다. 그 후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서 허무한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을 때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나의 아버지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삶의 의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이제까지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알았을 때에 저는 내가 그때까지 믿어왔던 진화론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의 허구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고, 무생물에서 생명이 나올 수 없다는 것, 최초의 원소는 어디에서 왔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가만 보면 진화론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진화론도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도 종교입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어떠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은 텅 비어 있는 상태, 무질서한 상태이고, ‘공허’는 텅 빈 상태, 황폐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흑암은 무저갱과 같은 의미인데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을 뜻합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은 텅 비어 있었으며 어떤 형태도 없었고 생명도 없었고 빛도 없었고 질서도 없는 가운데 무서운 적막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운행한다’는 뜻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새가 알을 정성스럽게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 속에서 알 껍질을 깨고 새가 나옵니다. 안에서 깨면 새가 되고, 닭이 되지만 겉에서 깨면 후라이가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을 수여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역사를 통해서 혼돈이 질서가 되게 하시고 공허가 충만이 되게 하시고 흑암이 빛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인간의 마음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빛과 진리이신 하나님이 없으니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니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갈 생각을 하니 무섭고 무기력하고 두렵습니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피곤합니다. 인생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니 시간을 규모없게 사용하고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생기를 잃어버리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서 한숨을 잘 쉽니다.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열심히 피땀 흘려 공부해서 뭐하나” 하면서 될 대로 되란 듯이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해 아래의 인생은 허무하고 피곤하고 지루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짧고 죽음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인생이 너무 허무합니다. 그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고 잊어버리기 위해서 쾌락을 추구합니다.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을 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수용소에서 고통과 굶주림과 모욕과 순간, 순간 죽음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수백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써야 하니 함부로 배설을 하고, 인간의 존엄을 찾기가 어려우니 사람들이 절망하고 그런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맥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리 조각으로 수염을 깎고, 먹어야 할 물을 아껴서 세수를 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자신이 수용소에서 나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상상하며 희망을 키웠습니다. 그는 이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창조주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를 품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에 생명을 얻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창세기 일장 일절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오늘날에도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구절은 1장에서 10번 나타납니다(3,6,9,11,14,20,24,26,28,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은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빛을 에네르기라고 해서 모든 빛의 근원인 에너지라고 보기도 하고, 태양으로 보기도 합니다. 넷째 날에 태양의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해석을 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형체도 아름다움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서 빛을 느낄 때 그 아름다움과 밝음과 따스함에 매혹되기도 합니다.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생명이 살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빛으로 인해서 자연세계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빛으로 인해서 영적인 세계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을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거룩함이 무엇인지, 어디가 길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이 빛이 비추일 때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살펴보면 첫째 날 빛, 둘째 날 궁창과 바다, 셋째 날 뭍, 채소, 과목, 넷째 날 해달별,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첫째 날과 넷째 날,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즉 먼저 일정한 영역을 나누시고, 공간,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준비된 환경에 내용을 채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질서와 조직과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 – 사람 - 만물이라는 질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 땅의 상태는 혼돈(Chaos)상태였으나,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를 해 나가심에 따라 질서(Cosmos)가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그 질서 위에 만물은 자유롭게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사람도 창조질서를 인정하고 그 질서 속에 살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의 권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몹쓸 자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날에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답고 사람이 살 만한 최적의 환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작품에는 예술가의 혼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과 지혜와 권능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우리가 자연 속을 걸으면서 돌 하나, 풀잎 하나, 꽃과 파란 하늘과 내리는 빗줄기와 쏟아지는 태양 빛, 나무와 숲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나와 동행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창세기 1:1-25
요절 | 창세기 1: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올해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를 썼습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사업을 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청년의 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집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기초를 놓는 때입니다. 인생의 집을 지을 때에 기초가 튼튼할수록 높고 아름다운 건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건물을 높이 쌓을 수도 없고 쉽게 부서집니다. 무언가를 이룬 대가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초를 탄탄히 하는 일에 힘을 쓰고 그 위에 자기만의 업적을 이루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운동선수건, 음악가건, 학자건,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대성하였습니다. 인생의 기초는 분명한 가치관, 신앙관, 역사관, 윤리 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시작이 됩니다.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 이런 것이 분명해져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이끈 인물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에게는 어떤 축복과 약속이 주어져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조상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애굽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살아왔던 애굽은 다신교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창세기는 세상의 시작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Genesis입니다. 이는 ‘게네시스’(γενεσεσ)에서 나온 말입니다. 게네시스는 족보,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는 족보라는 말이 10번 나옵니다. 천지의 내력부터 아담 집안, 노아 집안, 노아 아들들의 집안, 셈 집안, 데라 집안, 이스마엘 집안, 이삭 집안, 에서 집안, 야곱 집안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집안을 중심으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집안은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저자는 여러 집안의 족보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이 무엇이지를 잘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정체성을 명확히 밝혀줌으로서, 어디를 향하여 나아갈지 방향을 잡게 합니다. 즉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거치면서 기근으로부터 자신들과 애굽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창세기가 끝을 맺습니다. 그 후 출애굽기를 통해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한번쯤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 생겼을까? 또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그리고 맨 처음 사람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자연스럽게 있던 것인가? 아메바로부터 진화된 것인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체험하게 되면 누구나 허무한 인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무언가 성취를 해보고, 미친 듯이 일이나 게임에 빠져도 보고, 쾌락으로도 도피해 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해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인생이려니 생각하면서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천지만물과 자신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민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빛과 같은 감동을 줍니다. ‘태초에’는 영원의 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시작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사야 46:10을 보면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22:13).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로힘’으로서 복수명사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삼위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해야할 강하고 능력 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성경과 창세기의 최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엘로힘은 특히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 아니라 전 우주에 대하여 주권을 가진 창조주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공동체를 이루시되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존재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이시기에 역동적으로 사랑하시며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사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가정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의 원형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천지’( NIV - the heavens and the earth)란 하늘들과 땅인데 만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광대한 우주 공간과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하늘들이라고 말씀했을까요? 당시의 우주관은 삼층천이었습니다. 즉 대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거하는 둘째 하늘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또 어디서든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세계를 초월해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해 계십니다. 오늘날은 천체 망원경으로 별들과 우주를 관측할 수 있고 그 크기까지 측량합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38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주 공간과 그 안에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광대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대로 이 세상이 윤회를 한다면 모든 것이 돌고 돈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저 고기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일 수도 있는데요. 우리가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은 오발탄입니까? 의미없이 이 세상을 살다가 가야 한다면 ‘나’라는 존재의미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합니까?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영접한다면 내 인생은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내가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나를 이 세상에 분명한 뜻을 갖고 보내신 분이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 뜻을 이루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친을 일곱 살에 잃었습니다. 그 후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서 허무한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을 때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나의 아버지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삶의 의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이제까지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알았을 때에 저는 내가 그때까지 믿어왔던 진화론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의 허구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고, 무생물에서 생명이 나올 수 없다는 것, 최초의 원소는 어디에서 왔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가만 보면 진화론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진화론도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도 종교입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어떠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은 텅 비어 있는 상태, 무질서한 상태이고, ‘공허’는 텅 빈 상태, 황폐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흑암은 무저갱과 같은 의미인데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을 뜻합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은 텅 비어 있었으며 어떤 형태도 없었고 생명도 없었고 빛도 없었고 질서도 없는 가운데 무서운 적막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운행한다’는 뜻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새가 알을 정성스럽게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 속에서 알 껍질을 깨고 새가 나옵니다. 안에서 깨면 새가 되고, 닭이 되지만 겉에서 깨면 후라이가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을 수여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역사를 통해서 혼돈이 질서가 되게 하시고 공허가 충만이 되게 하시고 흑암이 빛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인간의 마음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빛과 진리이신 하나님이 없으니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니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갈 생각을 하니 무섭고 무기력하고 두렵습니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피곤합니다. 인생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니 시간을 규모없게 사용하고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생기를 잃어버리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서 한숨을 잘 쉽니다.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열심히 피땀 흘려 공부해서 뭐하나” 하면서 될 대로 되란 듯이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해 아래의 인생은 허무하고 피곤하고 지루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짧고 죽음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인생이 너무 허무합니다. 그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고 잊어버리기 위해서 쾌락을 추구합니다.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을 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수용소에서 고통과 굶주림과 모욕과 순간, 순간 죽음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수백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써야 하니 함부로 배설을 하고, 인간의 존엄을 찾기가 어려우니 사람들이 절망하고 그런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맥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리 조각으로 수염을 깎고, 먹어야 할 물을 아껴서 세수를 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자신이 수용소에서 나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상상하며 희망을 키웠습니다. 그는 이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창조주를 만나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를 품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할 때에 생명을 얻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창세기 일장 일절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인생을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오늘날에도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구절은 1장에서 10번 나타납니다(3,6,9,11,14,20,24,26,28,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은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빛을 에네르기라고 해서 모든 빛의 근원인 에너지라고 보기도 하고, 태양으로 보기도 합니다. 넷째 날에 태양의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해석을 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애굽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형체도 아름다움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서 빛을 느낄 때 그 아름다움과 밝음과 따스함에 매혹되기도 합니다.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생명이 살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빛으로 인해서 자연세계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빛으로 인해서 영적인 세계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을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거룩함이 무엇인지, 어디가 길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이 빛이 비추일 때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살펴보면 첫째 날 빛, 둘째 날 궁창과 바다, 셋째 날 뭍, 채소, 과목, 넷째 날 해달별,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첫째 날과 넷째 날,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짝을 이룹니다. 즉 먼저 일정한 영역을 나누시고, 공간,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준비된 환경에 내용을 채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질서와 조직과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 – 사람 - 만물이라는 질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 땅의 상태는 혼돈(Chaos)상태였으나,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를 해 나가심에 따라 질서(Cosmos)가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그 질서 위에 만물은 자유롭게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사람도 창조질서를 인정하고 그 질서 속에 살 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의 권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몹쓸 자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날에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답고 사람이 살 만한 최적의 환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작품에는 예술가의 혼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과 지혜와 권능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우리가 자연 속을 걸으면서 돌 하나, 풀잎 하나, 꽃과 파란 하늘과 내리는 빗줄기와 쏟아지는 태양 빛, 나무와 숲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나와 동행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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