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서 2025년 벧전3강(3:1-22) 아름다운 가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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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베드로전서 제 3 강
말씀 | 베드로전서 3:1-22
요절 | 베드로전서3:4
아름다운 가정 교회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초대교회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가정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가정교회를 믿음으로 결혼한 가정을 말하는데 신약에서 가정교회는 3,4가정이 모여서 사역하는 교회형태를 뜻합니다. 이들은 주중에 각 가정에 남녀와 어린아이들까지 모여서 식사 후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가정교회들이 주일에 모여서 연합교회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일예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정을 이룬 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유언을 남기셨는데 성경으로 돌아가라. 평신도 선교사들을 통한 세계 선교,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캠퍼스 복음화, 가정교회를 통한 말구유 역사, 제자양성역사, 일용할 양식과 소감쓰기, 주는 정신- 오병이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위한 기도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가정교회를 통한 말구유 역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가정교회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정교회의 기초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요회 모임이 하나의 가정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 복음전파(전도와 선교), 제자양육과 교육, 사랑과 봉사(구제와 사회적 책임), 교제와 연합(신앙공동체 형성), 도덕적 윤리적 등대 역할 등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당시나 오늘날이나 부부 중 한 쪽이 믿음을 갖지 않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 “짝 믿음”이라고 합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내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정결한 행실, 남편에 대한 순종을 볼 때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마음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시 가정교회들은 핍박을 받아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삶이 불안정한 가운데 아내들은 남편의 경제력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잔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오늘날도 부부싸움의 80%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서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 일을 함께 해 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또는 원만하지 않은 부부생활로 인해서 생깁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원하고, 남편은 아내의 인정을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마음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속으로 순종 받을 만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순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잘 지켜질 때 남편의 뜨겁고 풍성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남편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신보다 아내의 삶이 자신보다 못하다면 아내의 믿음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한 여성도님은 남편이 신앙도 잃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남편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줄까 생각하다가 이전보다 더욱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남편을 대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마음을 돌이켜 아내를 사랑하고 사명도 회복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5:22,23).”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을 치장해야 할까요? 3-6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이 서신이 전해질 당시 여성들의 화장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될 만큼 사치스러웠다고 합니다. 여인이 화장을 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속 사람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겉 사람이 드러납니다. 사람을 사귀면 사귈수록 부드럽고 따사롭고 친절함을 느끼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는 내면성, 자기를 낮추는 깊은 겸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깊은 분들을 만나면 절로 사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베드로후서 1:4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성한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내면에 맺힌 성령의 열매들을 남편과 아내, 또 주위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고자 힘써 노력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벧후 1:5-8 새번역)”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열매를 맺는 법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했는데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성품을 닮고자 열성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손님 셋을 환대하는 사건에서 동역하며 섬기는 사라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라가 열국의 어미가 된 것은 그녀의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에서 아내된 분들의 영향력과 역할은 지대합니다. 그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자였습니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지식을 따르라는 말은 사려깊게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헤아리고 섬기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아내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남편들이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맞벌이 부부 일 경우 남편이 도와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내에게만 맡기지 말고 함께 짐을 져야 합니다. 제가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설거지는 기본이고 식사 준비를 하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들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목자님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9에서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의 리더인 남편은 예수님처럼 겸손과 섬김과 희생으로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편이 자기 생명을 희생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순종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임으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왕비와 같이 대해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를 귀히 여길 때 가정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목자 가정의 모습을 보고 자녀들과 양들이 결혼과 가정교회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남편의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둘째, 신자 상호간의 관계(8-12). 목자 가정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에 그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은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독일과 프랑스는 이웃 나라인데 원수와 같았던 때가 있었고 또 미국과 멕시코는 진행 중입니다. 결혼 후 남편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웬수”라는 유우머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말로 인한 상처로 인해서 남모르는 미움으로 고통하기도 합니다. 이런 악행을 당하고, 욕을 먹는데 도리어 복을 빌어 주는 것은 비범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 주는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형제를 용서함으로 화평을 누리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복을 상속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보고 배웁니다. 신자 상호간에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새 양들은 가정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성스러운 식사와 소감과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을 나누고 한 주간의 어려움과 기쁨을 나눌 때에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가정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 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0,11).” 생명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바라는 자는 무엇보다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반드시 멸절을 당합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때, 성령충만 할 때 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마음에 가득 찬 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눅 6:45).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12).” 여기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귀는 그 백성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셋째,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13-22). 이 세상에서 신자로 사는 것은 고난이 따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고난이 복으로 바뀝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신자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산소망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산 소망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 날에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도 가볍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할 때에 우리는 어떤 실수나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어도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언제든지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관계 전도를 합니다. 관계를 맺는 8단계가 있습니다. 1) 태신자 품는 기간 동안 매일 기도하기 2) 안부 문자 보내기 3) 기프티콘 보내기 4) 카페 초대하기 5) 문화행사 초청하기 6) 식탁 교제하기 7) 일대일 성경공부 약속 잡기 8) 아카데미, 예배 초대장 전달하기 등 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주일에만 교회에 나오는 신자로 산다면 사탄의 공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 때 사탄의 독화살들이 우리를 향해서 쏟아집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18-20).”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노아시대의 구원받은 본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은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멸망당할 것입니다. 19,20절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베드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루터도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을 일으켰던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례를 통한 거듭남이라고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입니다. 세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이를 거절하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제자로 삼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요회에 새 양들이 들어올 때에 모임은 활기가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각 요회에 새 양들을 보내어 주시고 이들을 담을 수 있는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를 힘써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또 합심동역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함께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베드로전서 3:1-22
요절 | 베드로전서3:4
아름다운 가정 교회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초대교회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가정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가정교회를 믿음으로 결혼한 가정을 말하는데 신약에서 가정교회는 3,4가정이 모여서 사역하는 교회형태를 뜻합니다. 이들은 주중에 각 가정에 남녀와 어린아이들까지 모여서 식사 후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가정교회들이 주일에 모여서 연합교회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일예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정을 이룬 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유언을 남기셨는데 성경으로 돌아가라. 평신도 선교사들을 통한 세계 선교,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캠퍼스 복음화, 가정교회를 통한 말구유 역사, 제자양성역사, 일용할 양식과 소감쓰기, 주는 정신- 오병이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를 위한 기도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가정교회를 통한 말구유 역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가정교회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가정교회의 기초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요회 모임이 하나의 가정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 복음전파(전도와 선교), 제자양육과 교육, 사랑과 봉사(구제와 사회적 책임), 교제와 연합(신앙공동체 형성), 도덕적 윤리적 등대 역할 등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당시나 오늘날이나 부부 중 한 쪽이 믿음을 갖지 않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 “짝 믿음”이라고 합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내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정결한 행실, 남편에 대한 순종을 볼 때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마음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시 가정교회들은 핍박을 받아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삶이 불안정한 가운데 아내들은 남편의 경제력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잔소리를 하기 쉽습니다. 오늘날도 부부싸움의 80%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서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 일을 함께 해 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또는 원만하지 않은 부부생활로 인해서 생깁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원하고, 남편은 아내의 인정을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마음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속으로 순종 받을 만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순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잘 지켜질 때 남편의 뜨겁고 풍성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남편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신보다 아내의 삶이 자신보다 못하다면 아내의 믿음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한 여성도님은 남편이 신앙도 잃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남편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줄까 생각하다가 이전보다 더욱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남편을 대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마음을 돌이켜 아내를 사랑하고 사명도 회복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5:22,23).”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을 치장해야 할까요? 3-6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이 서신이 전해질 당시 여성들의 화장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될 만큼 사치스러웠다고 합니다. 여인이 화장을 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속 사람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겉 사람이 드러납니다. 사람을 사귀면 사귈수록 부드럽고 따사롭고 친절함을 느끼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는 내면성, 자기를 낮추는 깊은 겸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깊은 분들을 만나면 절로 사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베드로후서 1:4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성한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내면에 맺힌 성령의 열매들을 남편과 아내, 또 주위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고자 힘써 노력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벧후 1:5-8 새번역)”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열매를 맺는 법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했는데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성품을 닮고자 열성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손님 셋을 환대하는 사건에서 동역하며 섬기는 사라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라가 열국의 어미가 된 것은 그녀의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에서 아내된 분들의 영향력과 역할은 지대합니다. 그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자였습니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지식을 따르라는 말은 사려깊게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헤아리고 섬기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아내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남편들이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맞벌이 부부 일 경우 남편이 도와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내에게만 맡기지 말고 함께 짐을 져야 합니다. 제가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설거지는 기본이고 식사 준비를 하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들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목자님들에게 배워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9에서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의 리더인 남편은 예수님처럼 겸손과 섬김과 희생으로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남편이 자기 생명을 희생해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순종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임으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왕비와 같이 대해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를 귀히 여길 때 가정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목자 가정의 모습을 보고 자녀들과 양들이 결혼과 가정교회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남편의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둘째, 신자 상호간의 관계(8-12). 목자 가정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에 그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은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독일과 프랑스는 이웃 나라인데 원수와 같았던 때가 있었고 또 미국과 멕시코는 진행 중입니다. 결혼 후 남편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웬수”라는 유우머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말로 인한 상처로 인해서 남모르는 미움으로 고통하기도 합니다. 이런 악행을 당하고, 욕을 먹는데 도리어 복을 빌어 주는 것은 비범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 주는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형제를 용서함으로 화평을 누리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복을 상속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보고 배웁니다. 신자 상호간에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새 양들은 가정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성스러운 식사와 소감과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을 나누고 한 주간의 어려움과 기쁨을 나눌 때에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가정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 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0,11).” 생명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바라는 자는 무엇보다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반드시 멸절을 당합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때, 성령충만 할 때 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마음에 가득 찬 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눅 6:45).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12).” 여기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귀는 그 백성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셋째,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13-22). 이 세상에서 신자로 사는 것은 고난이 따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면 고난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고난이 복으로 바뀝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신자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산소망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산 소망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 날에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도 가볍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할 때에 우리는 어떤 실수나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어도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언제든지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관계 전도를 합니다. 관계를 맺는 8단계가 있습니다. 1) 태신자 품는 기간 동안 매일 기도하기 2) 안부 문자 보내기 3) 기프티콘 보내기 4) 카페 초대하기 5) 문화행사 초청하기 6) 식탁 교제하기 7) 일대일 성경공부 약속 잡기 8) 아카데미, 예배 초대장 전달하기 등 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주일에만 교회에 나오는 신자로 산다면 사탄의 공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 때 사탄의 독화살들이 우리를 향해서 쏟아집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18-20).”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노아시대의 구원받은 본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은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멸망당할 것입니다. 19,20절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베드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루터도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을 일으켰던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례를 통한 거듭남이라고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입니다. 세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이를 거절하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제자로 삼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요회에 새 양들이 들어올 때에 모임은 활기가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각 요회에 새 양들을 보내어 주시고 이들을 담을 수 있는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를 힘써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또 합심동역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함께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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