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19히 특2 선택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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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히브리서 특강 2
말씀 | 히브리서 11:17-31
요절 | 히브리서 11:24-26
선택하는 믿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오늘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가치관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선택하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하나님이 명하시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내가 뭐 힘이 있나요? 하라면 해야지요’. ‘버틴다고 해서 안 바칠 수 있나요? 결국 가져가실 텐데요. 뭐’ 말하면서 마지못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기 이전에,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18). 그런데 아직 이삭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약 이삭이 죽어버리면 이삭에 대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뒤집어버리는 모순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모순을 그는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시고 그를 통해서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폐기되지 않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성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만 삶의 현장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문제는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믿고 기도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을 볼 때 모순과 시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깊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기꺼이 바쳤는데, 그가 바친 이삭을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도로 돌려 주셨습니다. 이삭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통한 약속도 도로 받았고, 많은 자손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가 주신 것을 달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것, 더 소중한 것을 받습니다.
20,21절은 이삭과 야곱의 축복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과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기근의 때에 가나안에 거주하여 백배의 추수를 한 것이라든지, 믿음의 결혼을 했다든지, 이방인들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우물을 계속 파 나가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믿음에 주목했고, 그 믿음을 놀라워합니다. 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놀라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삭은 자기가 축복하는 그 내용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차남을 더 축복했습니다. 축복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축복했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하는 말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이 갖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인식과 우리가 축복할 때 그 축복하는 내용을 들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축복하려고 할 때, 현재의 모습을 보면 축복하기 어렵지만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축복과 믿음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복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들, 동역자들과 자녀들에 대해서 이런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우리는 보통 요셉이 노예로 팔렸는데 총리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믿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권에 대한 믿음, 형들을 용서하는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남겼던 유언에 주목을 합니다. 그의 유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번성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자기 뼈를 위하여 명령했습니다. 그 일은 요셉이 죽고 몇 백 년 후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집트의 정치 상황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요셉의 강력한 보호 아래 있지만 그 때는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호보다도 하나님의 보호, 인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요셉 대신에 모세를 준비하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바로를 굴복시키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지 않으려 할 수 있습니다. 정착한 곳을 떠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집트가 살기가 좋다고 머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로에 의해 힘든 노예생활을 함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후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후손들에게 사명을 물려주고 믿음으로 임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이집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임종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태어난 아이가 하나님의 뜻 두신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이 아이는 그 시대를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는 모든 남자 아이를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이라고 명령을 했지만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숨겼습니다. 하나님이 숨기시면 바로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도 헤롯이 찾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역사에 쓰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때가 이르기까지 그를 숨겨놓으십니다. 그 숨겨진 사람을 원수가 찾을 수 없고, 해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음입니다(24-26).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을 도울 수 있을까요? 자기 백성을 돕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인 것이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의 권력과 부를 가진 것이 노예 백성을 돕는데 더 유리하게 보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임대주택도 지어주고, 교육에 특혜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권력과 부를 포기하고 같은 노예가 되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을 기르고 돈을 모으고 지식을 쌓고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할 일은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해질 때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한 번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동안 내내 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가 바라본 ‘상’은 무엇일까요?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상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상이 있습니다. 로마서 8: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요?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휘황찬란하게 보이지만 그 내부는 온갖 음모와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음란과 방탕이 판치는 곳이 왕궁생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욱 좋아했습니다. 그는 왕궁의 화려한 옷, 왕복을 다 벗게 되고, 홑옷만 걸치고 맨발로 진흙을 이기고 벽돌을 구워야 합니다. 하루 종일 등골 빠지게 일해야 합니다. 온갖 험한 욕설을 다 듣고 짐승처럼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영광스러운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간적으로는 노예 백성이지만 영적으로는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모세의 결정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상 주심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믿음이요 가치관입니다. 놀라운 믿음의 선택입니다. 특히 그는 장성했을 때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은 참으로 무가치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은 영광스러운 것이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전쟁을 하면서 치룬 상처는 영광의 흔적인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당한 슬픔과 상처는 신자들의 자랑인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당하는 수모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도 하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죄수가 되었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옷 벗김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십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게 되십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고난과 헌신, 예수님의 단번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이런 수모를 통해서 인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시고, 마침내 죄로부터의 출애굽, 만민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수모를 미리 받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인류 구속역사, 새 창조의 감격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쓰디쓴 고난의 길이지만,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새 역사 창조의 길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보화요, 가장 큰 재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모세는 이집트라는 나라, 영화를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버렸고, 이스라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왕의 노함을 무서워함으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는 바로를 무서워하여 떠난 것으로 보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음으로 떠났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고 있는데 쉽게 포기하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고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모세는 유월절 의식을 행할 때 믿음으로 예식을 정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행했을 때, 모세는 여호와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골라서 죽일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라도 유월절 양의 피를 뿌리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장자도 죽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애굽의 모든 집에서 장자만 골라서 죽인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애굽 지역에 병이 돌아서 사람을 죽인다고 할 때 장자만 골라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아들 중에서 장자를 골라내야 합니다.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또한 피를 뿌린 집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 피를 뿌렸다고 건드리지 않을까? 모세는 이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심을 믿고 또 그 피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의 신자들이나 우리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너되 마치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반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홍해를 건널 시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대로 바다를 지나가고자 시도했는데, 결국 바다에게 삼켜졌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으로’ 하는 것과 ‘시도하는 것’, 한 번 해 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흉내를 낸다면 그 사람이 성공한 것으로 나는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홍해를 건넌 방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수많은 새로운 길이 생겨나고, 새로운 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의 방법을 흉내 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을 믿고 나의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벗고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운 것처럼 내게 맞는 방법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건너야 할 홍해는 무엇입니까? 학생들에게는 학업이 될 수 있고 또 졸업을 앞둔 분들에게는 취직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분에게는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는 죄문제 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 문제 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가 문제 일 수 있고, 물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을 믿을 때 극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믿고 홍해를 건너는 믿음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리고 성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칠 일 동안 돌았기 때문에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한 성으로서 결코 쉽게 무너질 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견고한 것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강력한 힘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각이고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면 제일 먼저 멸망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자신도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도덕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요, 순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낙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분들에게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일시적인 세상의 보화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더 가치있게 생각하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히브리서 11:17-31
요절 | 히브리서 11:24-26
선택하는 믿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오늘 모세의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가치관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선택하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하나님이 명하시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내가 뭐 힘이 있나요? 하라면 해야지요’. ‘버틴다고 해서 안 바칠 수 있나요? 결국 가져가실 텐데요. 뭐’ 말하면서 마지못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기 이전에,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18). 그런데 아직 이삭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약 이삭이 죽어버리면 이삭에 대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뒤집어버리는 모순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모순을 그는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시고 그를 통해서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폐기되지 않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성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만 삶의 현장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문제는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믿고 기도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을 볼 때 모순과 시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깊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기꺼이 바쳤는데, 그가 바친 이삭을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도로 돌려 주셨습니다. 이삭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을 통한 약속도 도로 받았고, 많은 자손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가 주신 것을 달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것, 더 소중한 것을 받습니다.
20,21절은 이삭과 야곱의 축복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과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기근의 때에 가나안에 거주하여 백배의 추수를 한 것이라든지, 믿음의 결혼을 했다든지, 이방인들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우물을 계속 파 나가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믿음에 주목했고, 그 믿음을 놀라워합니다. 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놀라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삭은 자기가 축복하는 그 내용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차남을 더 축복했습니다. 축복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축복했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축복하는 말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이 갖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인식과 우리가 축복할 때 그 축복하는 내용을 들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축복하려고 할 때, 현재의 모습을 보면 축복하기 어렵지만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축복과 믿음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복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들, 동역자들과 자녀들에 대해서 이런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우리는 보통 요셉이 노예로 팔렸는데 총리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믿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권에 대한 믿음, 형들을 용서하는 것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남겼던 유언에 주목을 합니다. 그의 유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번성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자기 뼈를 위하여 명령했습니다. 그 일은 요셉이 죽고 몇 백 년 후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집트의 정치 상황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요셉의 강력한 보호 아래 있지만 그 때는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호보다도 하나님의 보호, 인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요셉 대신에 모세를 준비하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바로를 굴복시키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지 않으려 할 수 있습니다. 정착한 곳을 떠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집트가 살기가 좋다고 머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로에 의해 힘든 노예생활을 함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후손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후손들에게 사명을 물려주고 믿음으로 임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이집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임종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태어난 아이가 하나님의 뜻 두신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이 아이는 그 시대를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는 모든 남자 아이를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이라고 명령을 했지만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숨겼습니다. 하나님이 숨기시면 바로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도 헤롯이 찾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졌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역사에 쓰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때가 이르기까지 그를 숨겨놓으십니다. 그 숨겨진 사람을 원수가 찾을 수 없고, 해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음입니다(24-26).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을 도울 수 있을까요? 자기 백성을 돕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인 것이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의 권력과 부를 가진 것이 노예 백성을 돕는데 더 유리하게 보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임대주택도 지어주고, 교육에 특혜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권력과 부를 포기하고 같은 노예가 되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을 기르고 돈을 모으고 지식을 쌓고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이 할 일은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해질 때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한 번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동안 내내 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가 바라본 ‘상’은 무엇일까요?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상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상이 있습니다. 로마서 8: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요?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휘황찬란하게 보이지만 그 내부는 온갖 음모와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음란과 방탕이 판치는 곳이 왕궁생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욱 좋아했습니다. 그는 왕궁의 화려한 옷, 왕복을 다 벗게 되고, 홑옷만 걸치고 맨발로 진흙을 이기고 벽돌을 구워야 합니다. 하루 종일 등골 빠지게 일해야 합니다. 온갖 험한 욕설을 다 듣고 짐승처럼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영광스러운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간적으로는 노예 백성이지만 영적으로는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모세의 결정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상 주심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믿음이요 가치관입니다. 놀라운 믿음의 선택입니다. 특히 그는 장성했을 때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은 참으로 무가치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은 영광스러운 것이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전쟁을 하면서 치룬 상처는 영광의 흔적인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당한 슬픔과 상처는 신자들의 자랑인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당하는 수모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도 하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죄수가 되었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옷 벗김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십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게 되십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고난과 헌신, 예수님의 단번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이런 수모를 통해서 인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시고, 마침내 죄로부터의 출애굽, 만민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수모를 미리 받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인류 구속역사, 새 창조의 감격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쓰디쓴 고난의 길이지만,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새 역사 창조의 길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보화요, 가장 큰 재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11:27)” 모세는 이집트라는 나라, 영화를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버렸고, 이스라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왕의 노함을 무서워함으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는 바로를 무서워하여 떠난 것으로 보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음으로 떠났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고 있는데 쉽게 포기하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고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모세는 유월절 의식을 행할 때 믿음으로 예식을 정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행했을 때, 모세는 여호와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골라서 죽일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라도 유월절 양의 피를 뿌리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장자도 죽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애굽의 모든 집에서 장자만 골라서 죽인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애굽 지역에 병이 돌아서 사람을 죽인다고 할 때 장자만 골라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아들 중에서 장자를 골라내야 합니다.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또한 피를 뿌린 집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 피를 뿌렸다고 건드리지 않을까? 모세는 이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심을 믿고 또 그 피를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의 신자들이나 우리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너되 마치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반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홍해를 건널 시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대로 바다를 지나가고자 시도했는데, 결국 바다에게 삼켜졌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으로’ 하는 것과 ‘시도하는 것’, 한 번 해 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나도 흉내를 낸다면 그 사람이 성공한 것으로 나는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홍해를 건넌 방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수많은 새로운 길이 생겨나고, 새로운 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의 방법을 흉내 내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을 믿고 나의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벗고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운 것처럼 내게 맞는 방법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건너야 할 홍해는 무엇입니까? 학생들에게는 학업이 될 수 있고 또 졸업을 앞둔 분들에게는 취직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분에게는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는 죄문제 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 문제 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가 문제 일 수 있고, 물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을 믿을 때 극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믿고 홍해를 건너는 믿음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리고 성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칠 일 동안 돌았기 때문에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한 성으로서 결코 쉽게 무너질 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견고한 것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강력한 힘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각이고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면 제일 먼저 멸망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자신도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도덕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요, 순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낙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분들에게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일시적인 세상의 보화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더 가치있게 생각하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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