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19년 히특2-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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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히브리서 특강 1
말씀 히브리서 11:1-16
요절 히브리서 11:1,2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흠모해 마지않는 위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의 훌륭한 삶과 열매를 연구해보면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믿음”, “미쁘신” 이란 단어들이 4번 반복되며, “믿음으로”라는 단어는 24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삶이 어려울 때 뒤로 물러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믿음을 지킨 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실상은 확신, 실물이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확신이냐 하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이 마치 이루어져 실상이 앞에 있는 것처럼 보며 사는 정도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어렵게 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그 바라는 것이 이룰 줄 믿는데, 현실을 보면 볼수록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때 계속해서 바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실을 보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까 의심과 회의가 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확신으로 인해서 일할 힘이 생기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를 의식하며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믿고 선택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과 실패도 다르게 봅니다. 고난과 실패를 운명의 장난이나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위장된 축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으로 봅니다. 요셉은 이런 믿음의 눈이 있었기에 그 힘들고 오랜 노예 생활과 감옥에서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죄짓기를 무서워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앞서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약속은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심으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빼놓고 세상을 보기가 쉽습니다. 문제만 보이고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문제는 작아집니다. 답이 보이고 희망이 보입니다. 도전할 길이 보이고 가능성이 보입니다. 새 일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는 것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생명과 빛이 넘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절 후반부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 조상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준 것이 바로 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2절에서 “증거를 얻다”(commended)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할 때만이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절은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를 가르쳐 줍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늘어날수록 너무나 신비롭고 광활하고 완벽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세상이 우연히 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믿습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인간이 세상과 역사의 중심처럼 보입니다. 특히 강대국과 그 지도자들이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당시 히브리 신자들이 현실을 볼 때 로마 황제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의 권력은 영원하고 그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평강을 얻었지만 동시에 고통, 핍박, 가난, 고난의 삶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그들 중에는 뒤로 물러나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개인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제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어떤 제사였기에 믿음으로 드렸을까요? 그는 6절처럼,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작은 자요 부족한 자이고, 자신의 제물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주실 것을 믿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의 제사의 성격을 담고 있는 예식 중의 하나가 매주 드리는 예배입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예배해야 합니다. 찬양, 기도, 헌금, 말씀 등을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내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의 아들은 노아입니다. 라멕이 노아를 180세에 낳았으니까, 에녹은 노아가 태어나기 67년 전에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가 살던 시대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에녹은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에게는 두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은 상주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로 데려가신 것을 보면, 에녹이 간절히 사모하며 구했던 상은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믿고 찾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을 바라볼 때 환난 중에서도 찬송하고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 것은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핍박을 받을 때, 불의가 만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존재하시는가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14). 하나님은 그를 신실하게 찾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상급을 요구하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상급을 구하지 않을 때, 사람으로부터 상급을 구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손해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입니다(창15:1b).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또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땅과 자손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가 받은 땅이 과연 내 몫으로 받을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 그에게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약속의 땅에 왔지만 그가 마주하는 현실을 보면 암담했습니다. 현실을 볼 때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땅을 자기 몫으로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과연 이 땅이 내 땅이 될 수 있을까? 미래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자기 몫으로 그 땅을 받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에서 믿음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난 것도 대단한 믿음이지만,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성취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산 것은 더욱 대단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계 캠퍼스를 우리의 땅으로 주신 것을 믿고 캠퍼스 복음 역사에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고 먹고 살기 바빠서 겨우 살고 있는데 사명을 끝까지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홍대 캠퍼스에 제자를 세우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전세계 캠퍼스에 믿음의 청년들을 세우시고 이 시대를 섬길 지도자들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땅에 대한 약속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고, 많은 자손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요,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의 약속에 대한 성취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왔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주신다는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아기를 잉태할 수도 없고 양육할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사라의 몸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고 젖을 먹일 수 있는 능력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능력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라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났습니다. 그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별과 같은 자손들, 모래와 같은 후손들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고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죽을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었고, 후손들 역시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 가나안 땅에서건 이집트에서건 여전히 길손이요 나그네였습니다.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고,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 순간에도 아직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손에 쥔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을 갖기 쉽습니까? “하나님 왜 약속한 것을 이루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이렇게 죽는구나. 내 인생 참으로 허무하구나.” “한이 너무 많아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내 죽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겠다.” 슬퍼하고 낙담하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는 순간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에도 약속의 성취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내 생애에서 내 눈으로 내가 이루기 원하는 일의 성취를 보기를 원합니다. 내 손으로 다 거두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몇 년 안에 좋은 결실을 기대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몹시 낙망합니다. 내가 열심히 씨를 뿌렸는데 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면, 내 헌신에 대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공연한 일을 했다, 헛수고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본향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사모했다는 것은 늘 마음에 두고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이 진정 향한 곳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세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욕심을 내지 맙시다. 언제라도 두고 떠날 수 있도록 가볍게 삽시다.
말씀 히브리서 11:1-16
요절 히브리서 11:1,2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흠모해 마지않는 위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의 훌륭한 삶과 열매를 연구해보면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믿음”, “미쁘신” 이란 단어들이 4번 반복되며, “믿음으로”라는 단어는 24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우리가 삶이 어려울 때 뒤로 물러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믿음을 지킨 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실상은 확신, 실물이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확신이냐 하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이 마치 이루어져 실상이 앞에 있는 것처럼 보며 사는 정도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어렵게 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그 바라는 것이 이룰 줄 믿는데, 현실을 보면 볼수록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때 계속해서 바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실을 보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까 의심과 회의가 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확신으로 인해서 일할 힘이 생기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를 의식하며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믿고 선택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과 실패도 다르게 봅니다. 고난과 실패를 운명의 장난이나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위장된 축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으로 봅니다. 요셉은 이런 믿음의 눈이 있었기에 그 힘들고 오랜 노예 생활과 감옥에서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죄짓기를 무서워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앞서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약속은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심으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빼놓고 세상을 보기가 쉽습니다. 문제만 보이고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문제는 작아집니다. 답이 보이고 희망이 보입니다. 도전할 길이 보이고 가능성이 보입니다. 새 일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는 것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생명과 빛이 넘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절 후반부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 조상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 준 것이 바로 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2절에서 “증거를 얻다”(commended)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할 때만이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절은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를 가르쳐 줍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늘어날수록 너무나 신비롭고 광활하고 완벽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세상이 우연히 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믿습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인간이 세상과 역사의 중심처럼 보입니다. 특히 강대국과 그 지도자들이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당시 히브리 신자들이 현실을 볼 때 로마 황제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의 권력은 영원하고 그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평강을 얻었지만 동시에 고통, 핍박, 가난, 고난의 삶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그들 중에는 뒤로 물러나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개인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제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어떤 제사였기에 믿음으로 드렸을까요? 그는 6절처럼,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작은 자요 부족한 자이고, 자신의 제물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주실 것을 믿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의 제사의 성격을 담고 있는 예식 중의 하나가 매주 드리는 예배입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예배해야 합니다. 찬양, 기도, 헌금, 말씀 등을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내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의 아들은 노아입니다. 라멕이 노아를 180세에 낳았으니까, 에녹은 노아가 태어나기 67년 전에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가 살던 시대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에녹은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에게는 두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은 상주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로 데려가신 것을 보면, 에녹이 간절히 사모하며 구했던 상은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믿고 찾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을 바라볼 때 환난 중에서도 찬송하고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 것은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핍박을 받을 때, 불의가 만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존재하시는가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14). 하나님은 그를 신실하게 찾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상급을 요구하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상급을 구하지 않을 때, 사람으로부터 상급을 구하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손해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입니다(창15:1b).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또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땅과 자손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가 받은 땅이 과연 내 몫으로 받을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 그에게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약속의 땅에 왔지만 그가 마주하는 현실을 보면 암담했습니다. 현실을 볼 때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땅을 자기 몫으로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과연 이 땅이 내 땅이 될 수 있을까? 미래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자기 몫으로 그 땅을 받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에서 믿음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난 것도 대단한 믿음이지만,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성취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산 것은 더욱 대단한 믿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계 캠퍼스를 우리의 땅으로 주신 것을 믿고 캠퍼스 복음 역사에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고 먹고 살기 바빠서 겨우 살고 있는데 사명을 끝까지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홍대 캠퍼스에 제자를 세우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전세계 캠퍼스에 믿음의 청년들을 세우시고 이 시대를 섬길 지도자들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땅에 대한 약속만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고, 많은 자손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요,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의 약속에 대한 성취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왔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주신다는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아기를 잉태할 수도 없고 양육할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사라의 몸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고 젖을 먹일 수 있는 능력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능력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라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났습니다. 그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별과 같은 자손들, 모래와 같은 후손들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고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죽을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었고, 후손들 역시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 가나안 땅에서건 이집트에서건 여전히 길손이요 나그네였습니다.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고,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 순간에도 아직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손에 쥔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을 갖기 쉽습니까? “하나님 왜 약속한 것을 이루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이렇게 죽는구나. 내 인생 참으로 허무하구나.” “한이 너무 많아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내 죽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약속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겠다.” 슬퍼하고 낙담하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는 순간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에도 약속의 성취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내 생애에서 내 눈으로 내가 이루기 원하는 일의 성취를 보기를 원합니다. 내 손으로 다 거두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몇 년 안에 좋은 결실을 기대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몹시 낙망합니다. 내가 열심히 씨를 뿌렸는데 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면, 내 헌신에 대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공연한 일을 했다, 헛수고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본향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사모했다는 것은 늘 마음에 두고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이 진정 향한 곳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세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욕심을 내지 맙시다. 언제라도 두고 떠날 수 있도록 가볍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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