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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6년 히 11강(11:23-40) 세상을 이기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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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2회 작성일 16-02-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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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히브리서 제 11 강
말씀 | 히브리서 11:23-40
요절 | 히브리서 11:33

세상을 이기는 믿음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오늘 말씀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에 대한 실례입니다. 그들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고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한편 믿음으로 불같은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의 영웅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추구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생생하게 유지하며 만민 구속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의 믿음(23-29).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다스리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육이 왕성함을 두려워하던 바로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강물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자기 아이가 아름답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모세가 어리고 연약하기에 숨겨져야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숨겨진 아이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장성했을 때 믿음으로 어떤 결단을 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가 장성하였다는 말은 그의 가치관이 세워지고 내가 누구인지 일생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신이 바로 공주의 아들이지만 엄연히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신앙 교육의 힘이 컸을 것입니다. 잠 22:6절은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노예 백성의 한 사람으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살고자 하면 많은 특권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잘하면 대권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핍박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 주심을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 세상의 유혹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진리 편에서 결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상급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에 왕의 노여움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27절을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 바로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지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신학교에서 훈련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요 목자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이 그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죽이는 것이 다 이지만 하나님은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출애굽 할 때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습니다.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피를 뿌릴 때에 장자를 멸하는 자가 그 피를 보고 건드리지 않을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29).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 앞에 섰을 때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병거를 끌고 추격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고 여기서 죽느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셨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들은 노예 백성이 하는데 우리가 못하랴 생각하며 시험적으로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과 시험 삼아 해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통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우가 칠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심으로 광풍을 잠재우셨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역했던 스코틀랜드 사람 존 알렉산더 도우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대양을 여러 번 건넜습니다. 그 때 그는 폭풍우를 만났고, 폭풍우가 쳐들어 올 때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폭풍우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폭풍우가 그쳤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믿는 자는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도 힘이 지배하는 사회, 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이 잘 통하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우리가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 때 이 세상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제자 양성의 홍해, 학업의 홍해, 취업의 홍해, 자립의 홍해, 결혼의 홍대 등등 개인적으로 건너야 할 홍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이 홍해를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승리하는 믿음. 이스라엘은 어떻게 여리고 성을 정복하였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를 돌고 성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을 때 견고했던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난공불락의 요새요, 철옹성 같던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나 여리고 성 공략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캠퍼스 제자 양성이 어려워 여리고 성 앞에 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 씨를 부지런히 뿌리고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어 주시도록 힘써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캠퍼스를 돌므로 2,3월에 말씀을 일대일로 공부할 양들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에 속한 사람이었고,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라합은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오고 야보보서에도 그녀의 행동하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약2:25).

  그 외에도 어떤 믿음의 용사들이 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다 열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믿음으로 불을 제압해 버렸습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는 어린 소년으로서 연약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골리앗을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13만 5천명의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35a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에게 찾아갔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들을 살려 그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왕상 17:22,23). 수넴 여인도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았습니다(왕하 4:18-37).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죽음을 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죽은 자를 받았습니다.

  셋째,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 이렇게 승리한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어 낸 승리도 있습니다. 35b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고문한다’는 말은 ‘죽도록 때리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고문대에 묶어놓고 때려서 죽이는 형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예레미야는 한 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구덩이 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돌로 침을 당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켜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칼에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도 많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도 헤롯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행12:2).

  또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양과 염소의 가죽 옷을 입고 살았고(슥 13:4; 왕하 1:8), 세례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막1:6). 엘리야와 엘리사는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왕상 17:2-16;19:1-19; 왕하 1:3-16; 8:1,2). 엘리야는 3년 동안 까마귀로부터 공궤를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3:12).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이들과 같이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가난하고 실패의 연속이고 훈련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이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다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실패입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호주출신으로 조선에 제일 먼저 왔던 분입니다. 데이비스는 호주 멜버른 출신인데, 40일간 항해를 끝내고, 1889.10.02.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는데 당시 33세였습니다. 그의 누나 메리 데이비스 (Miss Mary T. Davies, 1853-1941)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당시 모든 선교사는 일본을 경유해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 부산이었습니다. 그는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5개월 동안 우리 말을 배웠습니다. 5개월 후에, 그는 우리 말로 더듬거리며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산 경남 지역에 선교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전도하며 내려오는데,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20일을 걸어서, 4월4일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 그 다음날, 4월 5일 날 소천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 뿌려진 첫 번째 한 알의 밀알이라면,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에 뿌려진 두 번째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원인은, 수많은 마을을 거쳐서 내려오는 사이에, 특유의 열정으로, 열심히 마을마다 들러서 전도하다가 전염병이 발생한 마을에도 들린 것입니다. 그는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서, 소천 직전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1890년,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부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일에 충격 받은 누나 메리 데이비스는 당시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호주로 철수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6개월 만에 순교한 데이비스 선교사 소식이 알려지면서, 호주에서 대거 ‘데이비스 선교사를 뒤따르는 후배 선교사’들이 자원한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해방 전까지 78명, 해방 후까지 약 120명의 호주 선교사가,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는 큰 열매를 낳았습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 후에도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 이유는, ‘부산에 오자마자 하루 만에 돌아가신 데이비스 선교사를 추모하며, 데이비스 선교사가 죽은 부산에서 사역하자’는 어떤 정신적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미국 선교사들이 '지역분배'를 할 때, 부산경남지역을 호주 선교회에 일임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인생은 실패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삶은 후배 선교사들의 징검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후배들과 자녀들 위해서 거름이 될 때 그들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38절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본향과 대조되는 임시 처소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는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면서도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왕상 18:4, 13;19:1-4, 9). 그러므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이었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된 것이 후대에 이루어진 경우입니다. 특히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이 좋았지만 우리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그들은 미완성입니다. 계주에서 앞에서 뛴 사람들이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는데 그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앞의 사람들은 헛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마지막에 물러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1장은 과거 선배들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공동체입니다. 더 나아가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믿음으로 도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썩고 쇠하고 사라질 것임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두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마침내 이기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봄 학기를 힘차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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