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15년 히7강(8:1-9:22)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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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제 7 강
말씀 | 히브리서 8:1-9:22
요절 | 히브리서 8:6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에는 전화기, 사진기, MP3 음악 재생기, 계산기, 알람, 지도, 메모지, 소형 컴퓨터 등이 따로 따로 있었습니다. 그때 음악을 듣기 위해서 컴퓨터에서 다운을 받아서 MP3 음악 재생기에 옮겨야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것들을 하나로 만들어 편리하게 만든 것이 스마트 폰입니다. 이는 전자기기의 혁명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복잡한 제사법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법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구약 레위기에 나온 모든 제사법을 단 한 번에 영원히 치룬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까?
첫째, 모형인 땅의 성소가 아니라 원형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십니다(8:1-5). 1,2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지난 주 일용할 양식에서 성막에 대해서 자세히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성소를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성소는 지성소와 성소로 나누어지는데 성소에는 등잔대와 상과 그 위에 진설병이 있습니다. 진설병은 여호와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입니다. 레위기 24:8절에 보면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는 항상 이스라엘을 위한 떡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백성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셔서 자신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와 센터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만족을 얻고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또한 등불이 켜진 등잔대도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빛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밤마다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히셨고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 예수님을 문제와 갈등과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내면의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빛 된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비췸 받게 하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장인데 그 수반인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의 직분이 영화롭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의 옷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흉패를 붙였는데 여기에는 열 두 보석을 붙였습니다. 그 보석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땅의 대제사장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3-16).”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사람이 세운 땅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섬기십니다. 이 땅에 있는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림자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있지만 실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합니다. 모델하우스는 원형이 완성되면 부수어버립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원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입니다. 이 세상 것이 그림자이고 하늘의 것이 원형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하늘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거기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그는 하늘에서 구원 사역을 완전하게 성취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구원자요 주권자로서 하늘에서 어떻게 사역을 하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화려한 제사 의식들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몇 가정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고 예배는 말씀 중심으로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겉 모습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에게 성전에서 드려지는 유대교의 의식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히브리서 말씀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 소련은 알래스카를 미국에 헐 값에 팔아버렸습니다. 나중에 알래스카에 엄청난 유전과 광산, 주변 해양의 어류 자원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알래스카의 값어치를 잘 알지 못했을 때 그것을 팔아버리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무지해서 믿음을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며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6-9:10).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은 유대교의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직분을 가진 분이시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더 좋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 언약입니다. 10-12절에 새 언약이 무엇인지 나와 있습니다.
새 언약의 탁월함은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효력이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약 자체는 좋고 하나님도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그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첫 언약은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돌판에 문자로 새겨진 율법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셨습니다. 돌판은 깨어질 수 있고 누가 훔쳐갈 수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법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 이미 새겨져 있기 때문에 지울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언약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에스겔은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을 말씀했습니다(겔36:26-28).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를 바라볼 때 신령한 힘을 주십니다.
둘째로, 새 언약의 탁월함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11). 옛 언약 하에서는 몇몇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삿2:10; 호4:1,6).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은 진리의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주께서 새 영을 부어주시고 새 마음을 갖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겔36:26,27).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그의 임재 가운데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셋째로,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12). 옛 언약 때는 사람들이 범죄할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이 제공하는 속죄가 일시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보고 사람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새 언약에서 ‘새’라는 말은 옛 언약이 낡아지게 한 것을 뜻합니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어져 가는 옛 언약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붙드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금 히브리 성도들을 미혹하는 유대교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옛 언약을 폐기시키고 옛 언약을 대체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9:1-10절은 첫 언약에 속한 성소에 있는 것들과 예식을 설명합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성소에 있는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이것들에 관하여는 시간 관계상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입니다.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입니다. 여기서 개혁을 NIV 영어 성경은 새로운 질서(new order)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소의 휘장은 두께가 2.5Cm나 되었습니다. 카펫보다 두꺼운 휘장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두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빛 아래서 구약의 레위기를 공부하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구약 성경을 공부하면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11-22). 11,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양이나 염소를 14만 8천 마리나 죽였다고 합니다. 짐승의 피로 인해서 제사를 드릴 때 피가 제단에 강물과 같이 흐르고, 고기를 태우는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드리는 피와 고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룬 속죄는 일시적인 속죄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 속죄는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때 성령께서는 죄 사함의 효력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죄를 고소하는 사탄의 송사를 꺾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 루터의 죄 목록을 제시하고 지옥으로 가자고 합니다. 루터가 사탄에게 묻습니다. “그 이상 또 없소?” 루터의 죄 목록을 기록한 위에 누군가 “예수님의 보혈이 네 죄를 씻었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씻었다는 언약의 말씀을 듣고 마귀가 지나갔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 중보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염소와 황소의 피는 제사장들과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피였고 암송아지의 재는 부정해진 자들의 부정을 씻는 물을 만드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피와 재를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셨고, 성령의 인도로 사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는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분이니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어떠하겠습니까? 짐승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죽은 행실이란 죽음을 초래하는 악한 행위들입니다. 또는 죽은 행실이란 영적 죽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양심이 더럽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행실을 끝내고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려면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양심이란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나님이 주신 내적 지식 혹은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이러한 양심의 판단은 내가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새겨놓으신 자연 율법이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흉악한 범죄자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았습니다. 보통 죄인들은 양심이 있다고 해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다만 악을 깨우쳐 주고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죄를 범하면 양심이 더러워지게 되고 감각이 무뎌지게 됩니다.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한 사람들로 키우는 것인데 인본주의 교육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양심도 무디게 하도록 만듭니다.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죄를 합리화하게 되고 나중에는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그러면서 더욱 흉악한 죄를 짓게 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육체는 물론이고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까지 깨끗하게 합니다. 그 결과 죽은 행실을 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의 피가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될 때 죽은 양심도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양심은 더욱 민감해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약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믿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실현시키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를 믿는 사람들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첫 언약도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습니다.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찬송가 268장은 보혈의 능력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1).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2).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3).” 어떤 분은 이 찬송을 매일 30분씩 한 달을 부르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이 찬송을 두세 번 부르고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4:24).” 나의 죄가 아무리 더럽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양털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나의 죄를 주님의 피가 깨끗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님은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내면의 인격적인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가지만 죄의 결과들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죄사함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지 아니하시는데 우리가 기억하고 자책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베푸신 사죄의 은혜를 감사하며 겸손히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기억이 있지만 주님의 은혜로 죄로 인한 고통은 아물어 버리고 건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의 피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인 동시에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함으로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히브리서 8:1-9:22
요절 | 히브리서 8:6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에는 전화기, 사진기, MP3 음악 재생기, 계산기, 알람, 지도, 메모지, 소형 컴퓨터 등이 따로 따로 있었습니다. 그때 음악을 듣기 위해서 컴퓨터에서 다운을 받아서 MP3 음악 재생기에 옮겨야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것들을 하나로 만들어 편리하게 만든 것이 스마트 폰입니다. 이는 전자기기의 혁명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복잡한 제사법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법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구약 레위기에 나온 모든 제사법을 단 한 번에 영원히 치룬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까?
첫째, 모형인 땅의 성소가 아니라 원형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십니다(8:1-5). 1,2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지난 주 일용할 양식에서 성막에 대해서 자세히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성소를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성소는 지성소와 성소로 나누어지는데 성소에는 등잔대와 상과 그 위에 진설병이 있습니다. 진설병은 여호와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입니다. 레위기 24:8절에 보면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는 항상 이스라엘을 위한 떡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백성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셔서 자신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와 센터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만족을 얻고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또한 등불이 켜진 등잔대도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빛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밤마다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히셨고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 예수님을 문제와 갈등과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내면의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빛 된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비췸 받게 하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장인데 그 수반인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의 직분이 영화롭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의 옷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흉패를 붙였는데 여기에는 열 두 보석을 붙였습니다. 그 보석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땅의 대제사장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3-16).”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사람이 세운 땅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섬기십니다. 이 땅에 있는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림자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있지만 실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합니다. 모델하우스는 원형이 완성되면 부수어버립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원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입니다. 이 세상 것이 그림자이고 하늘의 것이 원형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하늘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거기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그는 하늘에서 구원 사역을 완전하게 성취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구원자요 주권자로서 하늘에서 어떻게 사역을 하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화려한 제사 의식들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몇 가정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고 예배는 말씀 중심으로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겉 모습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에게 성전에서 드려지는 유대교의 의식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히브리서 말씀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 소련은 알래스카를 미국에 헐 값에 팔아버렸습니다. 나중에 알래스카에 엄청난 유전과 광산, 주변 해양의 어류 자원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알래스카의 값어치를 잘 알지 못했을 때 그것을 팔아버리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무지해서 믿음을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며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6-9:10).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은 유대교의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직분을 가진 분이시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더 좋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 언약입니다. 10-12절에 새 언약이 무엇인지 나와 있습니다.
새 언약의 탁월함은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효력이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약 자체는 좋고 하나님도 신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그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첫 언약은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돌판에 문자로 새겨진 율법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셨습니다. 돌판은 깨어질 수 있고 누가 훔쳐갈 수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법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 이미 새겨져 있기 때문에 지울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언약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에스겔은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을 말씀했습니다(겔36:26-28).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를 바라볼 때 신령한 힘을 주십니다.
둘째로, 새 언약의 탁월함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11). 옛 언약 하에서는 몇몇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삿2:10; 호4:1,6).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은 진리의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주께서 새 영을 부어주시고 새 마음을 갖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겔36:26,27).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그의 임재 가운데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셋째로,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12). 옛 언약 때는 사람들이 범죄할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이 제공하는 속죄가 일시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보고 사람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새 언약에서 ‘새’라는 말은 옛 언약이 낡아지게 한 것을 뜻합니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어져 가는 옛 언약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붙드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금 히브리 성도들을 미혹하는 유대교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옛 언약을 폐기시키고 옛 언약을 대체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9:1-10절은 첫 언약에 속한 성소에 있는 것들과 예식을 설명합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성소에 있는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이것들에 관하여는 시간 관계상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입니다.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입니다. 여기서 개혁을 NIV 영어 성경은 새로운 질서(new order)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소의 휘장은 두께가 2.5Cm나 되었습니다. 카펫보다 두꺼운 휘장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두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빛 아래서 구약의 레위기를 공부하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구약 성경을 공부하면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은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11-22). 11,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양이나 염소를 14만 8천 마리나 죽였다고 합니다. 짐승의 피로 인해서 제사를 드릴 때 피가 제단에 강물과 같이 흐르고, 고기를 태우는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드리는 피와 고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룬 속죄는 일시적인 속죄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 속죄는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때 성령께서는 죄 사함의 효력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죄를 고소하는 사탄의 송사를 꺾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 루터의 죄 목록을 제시하고 지옥으로 가자고 합니다. 루터가 사탄에게 묻습니다. “그 이상 또 없소?” 루터의 죄 목록을 기록한 위에 누군가 “예수님의 보혈이 네 죄를 씻었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씻었다는 언약의 말씀을 듣고 마귀가 지나갔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 중보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염소와 황소의 피는 제사장들과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피였고 암송아지의 재는 부정해진 자들의 부정을 씻는 물을 만드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피와 재를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셨고, 성령의 인도로 사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는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분이니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어떠하겠습니까? 짐승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죽은 행실이란 죽음을 초래하는 악한 행위들입니다. 또는 죽은 행실이란 영적 죽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양심이 더럽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행실을 끝내고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려면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양심이란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나님이 주신 내적 지식 혹은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이러한 양심의 판단은 내가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새겨놓으신 자연 율법이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흉악한 범죄자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았습니다. 보통 죄인들은 양심이 있다고 해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다만 악을 깨우쳐 주고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죄를 범하면 양심이 더러워지게 되고 감각이 무뎌지게 됩니다. 교육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한 사람들로 키우는 것인데 인본주의 교육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양심도 무디게 하도록 만듭니다.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죄를 합리화하게 되고 나중에는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그러면서 더욱 흉악한 죄를 짓게 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육체는 물론이고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까지 깨끗하게 합니다. 그 결과 죽은 행실을 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의 피가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될 때 죽은 양심도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양심은 더욱 민감해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약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를 믿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실현시키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를 믿는 사람들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첫 언약도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습니다.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찬송가 268장은 보혈의 능력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1).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2).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3).” 어떤 분은 이 찬송을 매일 30분씩 한 달을 부르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이 찬송을 두세 번 부르고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4:24).” 나의 죄가 아무리 더럽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양털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나의 죄를 주님의 피가 깨끗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님은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내면의 인격적인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가지만 죄의 결과들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죄사함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지 아니하시는데 우리가 기억하고 자책하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베푸신 사죄의 은혜를 감사하며 겸손히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기억이 있지만 주님의 은혜로 죄로 인한 고통은 아물어 버리고 건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의 피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인 동시에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기보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함으로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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