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16년 신년 2강(히 13:1-25)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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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년 2 강
말씀 | 히브리서 13:1-17
요절 | 히브리서 13:8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는 AD 50-60년경 쓰였습니다. 당시 네로의 박해 이전이었지만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또 곧 오실 줄 알았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신 세상에서 소수에 불과하던 신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헌신과 열심이 점점 식어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성도 약화되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어떤 이들은 안전한 유대교를 기웃거렸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양심까지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 실제적인 권면들입니다.
첫째,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1-8). 1절을 보십시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을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형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도 어려운 가운데서 사랑을 계속하려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형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손님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로서 복음 증거를 위해 수고하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런 순회전도자들이 자기 지역을 지날 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주와 복음을 위해서 갇힌 자들,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학대를 받기 때문에 이들을 잘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동역자들,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마음의 상처로 그밖에 많은 어려움으로 고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로서 함께 고난을 겪는 것 같이 생각하여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동성결혼이 합헌으로 간주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간음죄가 폐지되고 성 개방 풍조로 인해서 이혼을 쉽게 하고 음행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수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동성애가 죄라고 하면 벌을 받을 수 있는 법이 국회에서 계류 중입니다. 자녀들에게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칠 수 없는 사회가 지금의 선진국입니다. 사탄은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는 기도로 진정한 적인 사탄과 싸움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쾌락으로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온갖 시험과 올무와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서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세상은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돈의 위력이 큽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서슴치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신자들도 물질주의에 물들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대신에 나를 진정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모든 염려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은 히브리 성도들이 속한 교회를 설립하고 신앙을 지도하던 영적인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고난 속에서도 초지일관 믿음 있는 행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의 목자님과 믿음의 선배들은 어려운 가운데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자립 역사를 이루며 검소하게 살면서 세계 선교를 섬겼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섬기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목자님들과 선배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인생이 복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어제 즉 과거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오늘 즉 현재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대제사장이셨고 오늘도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어제도 구원자이셨고 오늘도 구원자이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나셨고 다윗이 그리스도 주라고 노래했던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제사로 바쳐지던 제물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한결같이 기가 막힌 웅덩이와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구원과 영생을 송두리째 잃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재산을 잃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요 건강을 잃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구원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새해에도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더욱 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겠습니다.
또 7절과 연결하여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진 지도자라할지라도 결국은 죽고 일시적인 도움만을 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영원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한계적인 인간 지도자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그의 신실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한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의 말씀은 믿을만합니다. 그는 말씀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천지가 없어져도 그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오시겠다는 그의 말씀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9-17). 9절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당시 여러 가지 교훈은 유대교와 영지주의 영향 등으로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거나 아예 금식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지킨다고 악한 양심이 새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튼튼하게 하거나 강하게 하는 신앙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튼튼해야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고 강하게 합니다. 이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이 유익한 은혜를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10-1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속죄제물의 비유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고 희생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레16:27). 이와 같이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갈보리, 골고다, 해골의 아골 골짜기라 불리는 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백성을 거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정결하게 합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왜 성도들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자께서 성문 밖에서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편안하게 삶을 누려야만 할까요?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양 무리들을 살리기 위해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민수기 5:2,3절을 보면 진영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나병환자, 유출병자 등 모든 부정한 자를 영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들의 부정을 대신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치욕을 짊어지는 것”은 양 무리들의 허물을 마치 우리의 잘못인 것처럼 짊어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절을 보면 “인도하는 자들은 ... 너희(신자들)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양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약점과 허물을 고발하기보다 예수님께 나아가 용서와 해결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기를 때 기저귀를 더럽게 했다고 화내지 않고 밥을 흘렸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치워주고 닦아주고 안아주고 입혀주면서 양육을 합니다. 좀 더 자라서 개구쟁이가 되어 사고를 치면 엄마가 대신 용서를 빌고 변호도 해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도 자라지만 가녀린 한 여자가 강한 어머니가 됩니다. 양 무리들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는 십자가는 억울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목자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하이라이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문 밖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만 받다가, 죽으신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신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 눌러 앉아 살기가 좋은가’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고 저 세상 사람처럼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현실적인 복을 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배척을 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이것을 견디다 못해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흔들리는 그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그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치욕을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발견합니다. 세상 소망으로 약해졌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굳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한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으면서 선한 일과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드린 것과 생명의 열매를 맺은 것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되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힘들어 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 입술에서는 악하고 더러운 말이 나왔습니다. 입만 열면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 안에서 양심까지 새롭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증언해야 합니다. 고난이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그 입술에 항상 찬송이 있는 분들을 보면 그 삶에서 믿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세상의 것을 즐길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 분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배봉 센터의 주복음 목자님과 형제들은 장막 생활을 하면서 자립을 하기 위해 신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기쁨으로 찬송을 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매일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는 그들을 보면서 신문지국장은 “세상에 별 희한한 놈들 다 보겠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신문지국장은 나중에 그들의 기쁨의 근원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을 알고 예배에도 참석하고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입술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서로 나누어주는 것은 타인의 필요를 위해 실제로 무엇인가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어려운 형제에게 돈이나 물건을 나누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함과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산제사입니다.
저자는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하면서 지금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성도들은 현재 그들을 섬기는 리더들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저희 각 사람을 위하여 경성하기 때문입니다. 경성하되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합니다. 즉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을 그대로, 조금의 변질됨도 없이 잘 전해주었는지 또 때마다 필요한 양식을 잘 나누어주었는지 등에 대해 책임지고 보고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 영혼을 위해 깨어 살피고 권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가족, 친지, 친구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을 걱정하고 영적인 문제를 도와주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는 사람은 거듭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를 인도해주는 영적 지도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영혼 돌보는 일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양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목자로서 양들을 어떤 자세로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요절을 쓰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고치고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대제사장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가 주시는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은 본 받아 우리도 주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치욕을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치욕을 지고 주님을 따르되 기쁜 마음으로 찬미하며 선한 일을 행하며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히브리서 13:1-17
요절 | 히브리서 13:8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는 AD 50-60년경 쓰였습니다. 당시 네로의 박해 이전이었지만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또 곧 오실 줄 알았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신 세상에서 소수에 불과하던 신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헌신과 열심이 점점 식어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성도 약화되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어떤 이들은 안전한 유대교를 기웃거렸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양심까지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 실제적인 권면들입니다.
첫째,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1-8). 1절을 보십시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을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형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도 어려운 가운데서 사랑을 계속하려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형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손님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로서 복음 증거를 위해 수고하는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런 순회전도자들이 자기 지역을 지날 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주와 복음을 위해서 갇힌 자들,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학대를 받기 때문에 이들을 잘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동역자들,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마음의 상처로 그밖에 많은 어려움으로 고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로서 함께 고난을 겪는 것 같이 생각하여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동성결혼이 합헌으로 간주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간음죄가 폐지되고 성 개방 풍조로 인해서 이혼을 쉽게 하고 음행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수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동성애가 죄라고 하면 벌을 받을 수 있는 법이 국회에서 계류 중입니다. 자녀들에게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칠 수 없는 사회가 지금의 선진국입니다. 사탄은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음모를 꾸밉니다. 우리는 기도로 진정한 적인 사탄과 싸움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쾌락으로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온갖 시험과 올무와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서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세상은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돈의 위력이 큽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서슴치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신자들도 물질주의에 물들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대신에 나를 진정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모든 염려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은 히브리 성도들이 속한 교회를 설립하고 신앙을 지도하던 영적인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고난 속에서도 초지일관 믿음 있는 행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의 목자님과 믿음의 선배들은 어려운 가운데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자립 역사를 이루며 검소하게 살면서 세계 선교를 섬겼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섬기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목자님들과 선배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인생이 복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어제 즉 과거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오늘 즉 현재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대제사장이셨고 오늘도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어제도 구원자이셨고 오늘도 구원자이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 예언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나셨고 다윗이 그리스도 주라고 노래했던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제사로 바쳐지던 제물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한결같이 기가 막힌 웅덩이와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구원과 영생을 송두리째 잃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재산을 잃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요 건강을 잃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구원을 잃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새해에도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더욱 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겠습니다.
또 7절과 연결하여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진 지도자라할지라도 결국은 죽고 일시적인 도움만을 줄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영원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한계적인 인간 지도자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그의 신실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한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의 말씀은 믿을만합니다. 그는 말씀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천지가 없어져도 그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오시겠다는 그의 말씀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9-17). 9절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당시 여러 가지 교훈은 유대교와 영지주의 영향 등으로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한다거나 아예 금식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지킨다고 악한 양심이 새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튼튼하게 하거나 강하게 하는 신앙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튼튼해야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고 강하게 합니다. 이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이 유익한 은혜를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10-1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속죄제물의 비유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고 희생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레16:27). 이와 같이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갈보리, 골고다, 해골의 아골 골짜기라 불리는 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백성을 거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정결하게 합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왜 성도들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자께서 성문 밖에서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편안하게 삶을 누려야만 할까요?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양 무리들을 살리기 위해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민수기 5:2,3절을 보면 진영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나병환자, 유출병자 등 모든 부정한 자를 영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들의 부정을 대신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치욕을 짊어지는 것”은 양 무리들의 허물을 마치 우리의 잘못인 것처럼 짊어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절을 보면 “인도하는 자들은 ... 너희(신자들)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양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약점과 허물을 고발하기보다 예수님께 나아가 용서와 해결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기를 때 기저귀를 더럽게 했다고 화내지 않고 밥을 흘렸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치워주고 닦아주고 안아주고 입혀주면서 양육을 합니다. 좀 더 자라서 개구쟁이가 되어 사고를 치면 엄마가 대신 용서를 빌고 변호도 해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도 자라지만 가녀린 한 여자가 강한 어머니가 됩니다. 양 무리들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는 십자가는 억울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목자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하이라이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문 밖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만 받다가, 죽으신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신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 눌러 앉아 살기가 좋은가’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고 저 세상 사람처럼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현실적인 복을 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배척을 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이것을 견디다 못해 타협하고자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흔들리는 그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그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치욕을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발견합니다. 세상 소망으로 약해졌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굳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한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으면서 선한 일과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드린 것과 생명의 열매를 맺은 것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되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힘들어 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 입술에서는 악하고 더러운 말이 나왔습니다. 입만 열면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 안에서 양심까지 새롭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증언해야 합니다. 고난이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그 입술에 항상 찬송이 있는 분들을 보면 그 삶에서 믿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세상의 것을 즐길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 분들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배봉 센터의 주복음 목자님과 형제들은 장막 생활을 하면서 자립을 하기 위해 신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기쁨으로 찬송을 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매일 새벽에 신문을 돌리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는 그들을 보면서 신문지국장은 “세상에 별 희한한 놈들 다 보겠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신문지국장은 나중에 그들의 기쁨의 근원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을 알고 예배에도 참석하고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입술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서로 나누어주는 것은 타인의 필요를 위해 실제로 무엇인가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어려운 형제에게 돈이나 물건을 나누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함과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산제사입니다.
저자는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하면서 지금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성도들은 현재 그들을 섬기는 리더들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저희 각 사람을 위하여 경성하기 때문입니다. 경성하되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합니다. 즉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을 그대로, 조금의 변질됨도 없이 잘 전해주었는지 또 때마다 필요한 양식을 잘 나누어주었는지 등에 대해 책임지고 보고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내 영혼을 위해 깨어 살피고 권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가족, 친지, 친구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을 걱정하고 영적인 문제를 도와주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는 사람은 거듭난 영적 지도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를 인도해주는 영적 지도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영혼 돌보는 일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양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는 목자로서 양들을 어떤 자세로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요절을 쓰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고치고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대제사장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가 주시는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은 본 받아 우리도 주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치욕을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치욕을 지고 주님을 따르되 기쁜 마음으로 찬미하며 선한 일을 행하며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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