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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6년 신년1강(히 12:1-29) 예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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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8회 작성일 16-01-0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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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년 특강 제 1 강
말씀 | 히브리서 12:1-13
요절 | 히브리서 12:2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가 충만한 분들도 있지만 실패를 경험하면서 지치고 피곤한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하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경주를 해야 합니까?

  첫째,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에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작년 전 세계 야구 대회인 프리미어 12 결승전에서 한국 야구는 9회에 이대호 선수의 한방으로 일본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출루했던 주자들은 마운드에서 이대호 선수가 제대로 한방을 쳐주기를 바라며 응원했습니다. 그가 한방을 치지 못하면 자기들이 애써 출루한 것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달려서 골인을 해야 선진들의 믿음도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어떤 복장을 취해야 합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경주하는 트랙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외부적으로 붙어 있는 무거운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겨울옷을 입고 부츠를 신고 달리면 오래 달릴 수 없습니다. 무거운 것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과 사람들의 조롱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음식 규정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이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죄의식이 들도록 하는 외부의 공격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 반복해서 제자 양성에 실패한 경험, 사명에 대한 부담감, 인간적인 정과 욕심, 사람에 대한 미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서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변화되지 않는 고질적인 죄, 스마트 폰 중독으로 카톡과 훼이스 북을 보면서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도 있습니다. 괜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 죽이기, 컴퓨터 게임, 세상의 잔재미,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것, 불신과 시기심, 안목의 죄와 육신의 정욕 등은 쉽게 우리의 경주에서 힘을 빼게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트랙을 따라서 끝까지 달리려면 이러한 것들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달려야 합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회개로써 아담 안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무거운 죄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 피로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때 우리의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어 힘차게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믿음의 경주를 잘 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골인지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시골 할아버지 집에 놀러갔습니다. 아침에 소년과 할아버지는 산책을 나갔습니다. 밤새 밖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시합을 청했습니다. “너와 내가 5분을 걸어서 누가 더 똑바로 걸었는지 내기를 하자.” 소년은 온 힘을 다 해 자신의 발을 쳐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걸었습니다. 그는 결코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5분 후에 각자 걸은 길을 돌아보니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자로 똑발랐지만, 소년의 걸음은 삐뚤빼뚤 엉망이었습니다. 소년이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허리도 굽고 힘도 없으신데 그렇게 똑바로 걸을 수 있었나요?” “얘야, 너는 네 발을 보고 걸었지만, 나는 저 산 위의 소나무를 보고 걸었단다. 목표가 정확하면 걸음도 정확해진단다.” 신앙의 경주를 하는 우리도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는 그를 믿게 되었고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면서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주이십니다. 그는 믿음의 규례를 반포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믿음의 근원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능력으로써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은혜의 완성자로서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는 재판관이시오, 우리의 믿음을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앞에 닥친 문제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믿음으로 살다가 낙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명은 팽개치고 오직 전공에만 직장에만 온 힘을 기울입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돈에 눈이 고정되어 돈 버는 것에 집중되기도 쉽습니다.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온통 외모를 가꾸는 일에 시선이 집중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 고정시키고 있습니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이고 지혜가 생깁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인 챨스 스펄전은 자신의 구원 문제로 몇 개월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은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길이 막혀 목사가 교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구두 수선공이거나 재단사 같은 한 남자가 설교단에 서서 좀 어색한 목소리로 이사야 45:22절 말씀에 근거하여 외쳤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라.”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는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 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오! 불쌍힌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스펄전이 이 메시지를 듣고 단순히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즉시 영적인 눈을 뜨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만약 예수님이 방학 중인 학생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 직장에서 이런 문제에 부딪혔다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 이처럼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를 배우고 본받고자 할 때 우리의 내면은 점점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눅 23:35).” 군인들도 그를 희롱하면서 신포도주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그를 비방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비방과 희롱하는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 대신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우리가 고난을 잘 참고 견디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만 생각하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면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인내의 동력이 됩니다. 우리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믿음은 끝까지 인내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도 고난이 심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가신 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할 때 기꺼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양을 남기지 못해도 일생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합니다. 특히 우리가 한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돕는 것은 가장 복된 삶입니다. 우리가 양이었을 때 나를 감당하신 목자님, 나의 죄를 오래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3).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까? 또 얼마나 목자 예수님을 힘들게 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자신과 힘든 현실만 생각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나 혼자서 원맨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고 계십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정말 큰 힘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보는 것이야 말로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와 함께 동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령한 은혜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양을 치다가 지쳐버린 분이 있습니까? 양을 치는 것이 기쁨이 되었지만 오랜 수고에도 열매가 없으면 지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양을 치면서 예수님을 배웁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키우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할 때 트랙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우고 또 양들이 예수님을 잘 배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잘 배우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다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라. 5절부터 11절까지 징계라는 단어가 각 절마다 나와 있습니다. 징계는 교육 또는 훈련이라는 의미로서 가정 교사가 아이를 훈련으로 바르게 양육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합니다. 이때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예로부터 의인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고난을 죄로 인한 인과응보적인 사고의 틀에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훈련으로 고난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고난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며 그 죄에서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힘들게 하는 짐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이 죄와 싸우되 어느 정도로 싸워야 합니까?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권투나 레슬링과 같은 격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죄입니다. 목자 생활이 사람 때문에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죄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이미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뎠습니다(10:32). 믿음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아직 순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죽을만큼은 아닙니다. 그러니 견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속죄를 완성하셨습니다. 순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31). 사실 내가 죽고자 결심하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다툴 일도 없습니다. 내가 욕심을 내고 이기적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면 누가 시비를 걸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오직 주님이 내 안에 사시면서 그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징계와 꾸지람은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성장을 위한 훈련(discipline)입니다. 저자는 성도들이 당하는 박해와 유혹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극복해야 할 두 가지는 첫째, 훈련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의미 없는 고난이라 여기며 사라지기만 바라는 자세일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꾸지람 앞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지은 죄가 많아서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신다는 생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불신에 빠지면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내적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는 내가 받는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받으시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부모는 고난의 훈련을 통해서 자녀들이 자립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고난의 훈련을 통해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함인데 이것을 풀어쓰면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벧후 1:5-7).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육신적이고 좁고 편협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경건하고 넓고 깊게 하셔서 황태자, 황공주 같은 내면의 소유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왕도를 지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직스럽고 덕스럽고 절제할 줄 알며 인내심이 있고, 경건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연약한 자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훈련을 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마음이 점점 작아집니다.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여길 때 훈련을 무시하며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 훈련을 잘 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왜 유익합니까?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최고의 축복은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거룩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나의 성장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영적 성숙을 이루고 아버지를 더 알고 더 닮아가게 하는 것이 훈련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훈련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해야 하고, 그리할 때 평강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신앙의 경주를 하다가 피곤하고 지쳐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올해는 어떻게 달려야 할지 손과 무릎이 피곤한 분은 없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또 이 고난이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거룩한 훈련임을 깨닫고 피곤한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웁시다. 서로가 힘없고 연약해진 형제자매님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함께 달립시다. 신앙생활은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야 하는 경주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거룩함과 화평의 열매를 맺고 완주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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