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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5년 히5강(5:11-6:20)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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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15-11-2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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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제 5 강
말씀 | 히브리서 5:11-6:20
요절 | 히브리서 6:1,2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오늘 말씀은 멜기세덱 제사장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려다가 히브리 성도들이 듣기 둔하므로 그들의 영적인 성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성장판이 닫히면 성장이 멈추지만 영적인 성장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간 성장하지 않을 때 따르는 위험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지금 상태에 자족하지 말고 줄기차게 성장과 성숙을 위해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히브리 성도들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젖이나 먹던 아이가 성장하면서 이유식을 하고 고기를 먹고 딱딱한 것도 먹으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나이는 어른인데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습니다. 성장이 더딘 아이들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타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성장이 없이 오히려 퇴보해 버린 히브리 성도를 향한 저자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형식주의, 핍박에 대한 두려움, 영적인 게으름에 빠져서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주저앉아 있게 된 것을 회개하고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성장이 더딘 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젖은 부드러워 먹기 편합니다. 자기가 깨물어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먹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일대일로 공부를 하고 힘들지만 소감을 쓰고 때로는 가르치면서 말씀을 붙잡고 생각을 하고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야 합니다. ‘의의 말씀’이란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인도하고 의롭게 살게 하는 주의 말씀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말씀의 맛을 알게 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5:8).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하면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말씀은 그냥 말씀일 뿐입니다. 귀를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오랫동안 깨물어 먹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깨물어 먹을 때 뇌도 활성화됩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단단한 음식을 깨물어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삼키려면 소화력도 있어야 합니다. 위가 약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어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먹어도 배탈이 나서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키려면 위가 튼튼해야 합니다. 비위가 좋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소화를 시키기 때문에 몸이 튼튼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 성숙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합니다. 지각은 이해력과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훈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자는 단단한 말씀을 먹고 영적 지각 기능을 끊임없이 훈련해 서 그 기능이 발달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각적으로 살지 않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쓰게 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딤후 2:15). 우리가 양들에게도 부드러운 말씀만 먹이면 성장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소감을 쓰도록 돕고 순종을 통해 말씀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양들은 목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평생 양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목자의 삶이 더욱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가장 좋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여 목자로 헌신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전범을 재판하는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유대인 육백만 명을 살해한 아이히만에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단순하게 순종했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유명한 말이 선포되었습니다. “당신은 인류의 존엄성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니 죄인입니다.” 우리는 배운 바 말씀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6: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신앙 성장은 히브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요 핵심이요 뼈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말은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성숙함에 이르라는 의미입니다. 기초가 아무리 중요해도 기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성장해야 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중요하다고 맨 날 기초 공사만 하고 있으면 언제 건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운동을 할 때도 기본기가 중요합니다.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이것만 하고 있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장을 위한 고난도 기술을 배워 가면서 기본기를 다져나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이 더디거나 없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문제로 갈등하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과거의 상처만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더 좋은 은혜,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상처들을 툭툭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을 통해, 고난으로 순종을 배울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가운데 인간적인 자아가 깨지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물과 아픔, 고난을 통한 순종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버려야 할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첫째,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회개만 하고 변화를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죄악된 소욕을 극복하고 거룩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할 일은 이제 믿는 것입니다. 과거 불신앙으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신앙으로 회복됩니다. 또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위대한 일을 시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세례입니다. 믿는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세례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에만 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방인들도 알 수 있도록 주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넷째는 안수입니다. 안수는 병을 고칠 때 머리나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축복할 때, 성직을 임명할 때, 성령의 강림을 구할 때도 하였습니다. 당시는 세례와 안수에 관해서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논란에 휩싸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초보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숙에 이르면 이런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신학적인 논쟁에 빠져 성숙에 힘쓰지 못하고 진을 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논쟁에 목숨을 걸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그것에 기초한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완전한 승리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부단히 투쟁하고 일생 성장하였습니다.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때 우리는 놀라운 영적인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초보적인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은 일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에 끝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영적인 경주를 하였습니다. 성숙은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어떤 상태에 있을지라도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계속해서 영적 성장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저자는 성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성장이 없이 계속 초보에만 머물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알고 있던 초보 신앙도 흔들리고 결국 배교의 위험성에 놓이게 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게 됩니다. 퇴보하다가 타락하여 예수님을 떠나고 믿음을 버리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 편에서 제대로 해석을 하지 못하면 마음에 쓴 뿌리와 가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 예를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다가 믿음을 버리고 타락하여 다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타락은 일반적인 죄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배교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2: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라고 했습니다. 또 요일 5:16절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보내셨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해당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은혜에도 참여하였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요 거듭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약간의 은혜를 맛만 보았을 뿐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입니다. 똑 같은 비를 흡수하고도 어떤 것은 맛있는 과일을 내고 어떤 것은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똑 같은 물을 마시고도 젖소는 우유를 내지만 독사는 독을 뿜어냅니다. 좋은 나무에서 먹기 좋고 아름다운 열매가 나오고 나쁜 나무에서 먹을 수 없는 못된 열매가 나옵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죄를 범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눈물로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3년이나 들었지만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고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거듭난 신자가 계속해서 죄에 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히브리 신자들도 타락하여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킬 수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좋은 마음 밭으로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성장이 없을 때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두렵게 떨림으로 이루어야 합니다(빌2:12).

  9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저자는 히브리 신자들에게 경고를 준 다음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곧 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성장이 없는 문제가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구원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그들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 히브리 성도들의 행위와 사랑과 섬김을 잊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초보 신앙으로 퇴보 했지만 과거 그들은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를 했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섬겼으며, 이제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한 행위와 사랑의 섬김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섬기느라 얼마나 수고했는지, 그 눈물의 수고를 주님은 다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 히브리 성도들은 계속해서 과거와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지금 사랑에 힘쓰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멈추거나 퇴보하지 말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끝까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맡은 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의 중심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본받아야 할 예가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작할 때에 받은 약속을 오래 참아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 주고  복 주며 그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 후손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도 세계사에 우뚝 솟아 신문에 매일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피난처 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큰 안위를 받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소망을 가진 우리는 고난의 바람이 불어도 난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침내 휘장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견고한 소망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바로 해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또한 깨달은 바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때로 손해가 날 수도 있고 눈물과 고난과 아픔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기쁨과 자유를 줍니다. 우리를 살리는 말씀을 깊이 체험하며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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