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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5년 히4강(4:14-5:10)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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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3회 작성일 15-11-15 13:52

본문

2015년 히브리서 제 4 강
말씀 | 히브리서 4:14-5:10
요절 | 히브리서 4:14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비하신 큰 대제사장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받으신 큰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4:14-16) : 12,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즉 히브리 신자들은 말씀 앞에 자신들의 모습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완고한 모습을 발견하고 낙망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큰 대제사장이란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구약 율법의 대제사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는 땅에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승천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을 자랑했지만 그것들은 장차 올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에서 일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는 믿는 도리 즉 우리가 고백한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면서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15).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의 슬픔과 외로움을 아십니다. 마음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들을 그는 아시고 풀어주십니다. 기도할 힘도 없는 무력함과 마음의 탄식을 주님은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 주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아픔과 상처들을 아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치료해 주십니다. 때때로 내가 어려울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싸여 있을 때에 아무도 나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 눈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마음의 한 맺힌 것들을 끝까지 들어 주시고 풀어 주시는 주님께 담대히 나아갑시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약한 우리를 능히 도와주십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고,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잘 안다고 했습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이 시험 받는 사람을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땅의 대제사장은 인간의 약함을 공감하나 죄가 있고, 천사는 죄가 없지만 인간의 약함을 이해할 수 없어 우리를 돕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목자도 양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돕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 받는 우리를 동정할 뿐 아니라 이기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식과, 수치심, 그리고 연약함 때문에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 잘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이 연약한 우리를 동정해 주시기 때문에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연약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in our time of need), 우리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나가서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라도 일 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의지해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너희와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출25:22). 언약궤 위에 금으로 만든 천사들이 날개를 위로 쳐들고 십계명 돌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언약궤에 피를 뿌렸습니다(레16장). 이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보좌라고 해서 시은좌(mercy seat), 시은소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오셔서 직접 자신의 피를 십자가 제단에 뿌리셨습니다. 그 피는 흠 없고 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능히 사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언제든지 주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시은좌가 이제는 은혜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그 보좌는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에. 덜덜 떨면서, 마음조이며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당당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십니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습니다. 하늘이 땅에서 먼 것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고,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 뿐임을 아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죄를 사함 받고 진정한 위로와 힘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고 박윤선 목사님은 성경 66권을 주석한 학자이면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부산에 한 동안 계실 때는 산에 기도의 굴이 있었는데 이재만 목사님 굴과 또 하나는 박윤선 목사님의 굴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기도할 때 박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산 밑 아래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기도의 주요 내용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인데 한두 마디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한 소리로 엄청나게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기도에 있어서 긍휼을 많이 구하시고, 끝까지 기도하시는 분임을 김수홍목사님이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아침에 올라가서 오후 두 시까지 계셨던 적도 있고 식사도 하지 않으면서 기도에 전념하셨다고 합니다.

  둘째, 사람을 위하는 대제사장(5:1-3). 5:1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택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연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지만 ‘사람 가운데’서 택함 받고 ‘사람을 위하여’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사람 속에 있고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2절을 볼 때 사람은 무식하고 미혹을 잘 받습니다. 연약합니다. 사람은 무지 가운데 살아갑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는 무엇을 알고자 할수록 그 범위가 넓어갑니다. 사람은 아는 것이 많아지는 만큼 모르는 것이 많아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사람은 무지한 가운데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남을 원망합니다. 또 사람은 양과 같이 제 갈 길로 가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입니다. 미혹에 잘 빠집니다. 이런 우리의 악한 행동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드려진 희생 제물을 통하여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지게 됩니다.

  이 대제사장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대제사장은 무식한 자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진심으로 무식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대제사장은 '미혹한 자'를 용납하여 그들을 곁길 즉 잘못된 길에서 이끌어 내어 바른 길로 인도할 만한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에게는 큰 인내와 자비, 즉 하나님의 긍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또한 연약에 휩싸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더욱 동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광야를 걸으며 피곤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섬기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으로 적합하게 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죄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고 그 후에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속죄제는 드릴 필요가 없으십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죄가 없기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속죄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고, 동시에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단 한 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나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대해주십니다. 그 연약의 결과를 감당해 주실 뿐만 아니라 약함을 극복하도록 은혜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강해질 수 있습니다(딤후 2:1).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샘물과 같이 솟아나는 은혜,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제사장(4-6). 4절을 보십시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오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존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저자는 대제사장직을 존귀(honor)라고 표현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대제사장의 옷이 영화롭고 아름답다 하므로(출28:2)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이 얼마나 존귀한지 보여줍니다. 이 직분은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했습니다. 아론이 그러했고, 그 후계자가 그러했습니다(민 20:26). 인간의 존귀는 직분에서 오는데, 사람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고라는 제사장직을 스스로 취하려 하다가 멸망했습니다(민16장). 웃시야 왕은 강성해지매 마음이 교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 분향하려다가 그 이마에 나병이 생겼습니다(대하 26:18).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닌가,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를 구태여 따를 필요가 있는가? 그를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정통성이 있는 아론의 대제사장 됨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5,6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내용은 7장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대제사장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대제사장직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다다를 수 있는 다리가 되십니다. 

  넷째, 고난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예수님(7-10).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써 자기를 부인하시고 순종의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짐승이 울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어서 온갖 아픔과 슬픔을 감당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아픔, 슬픔,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아픔이 얼마나 큽니까? 통곡과 눈물, 몸부림을 치는 것은 구원역사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간구와 소원을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마 26:36-46)와 연관시킬 수 있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 통곡과 눈물의 기도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님이 뜨거운 심정과 눈물의 기도로 감당하신 대제사장 직분의 열매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도 예수님 같은 기도와 눈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살리는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경건하심으로 하나님께 들으심을 얻었는데 그 경건하심의 구체적인 내용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고난을 받거나 순종을 배울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고난을 받고 순종을 배움으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표를 성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죄 많은 인간에게는 고난이 필요하고 고난에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 그릇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정신 차리고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시 119:67,71).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도 고난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분이신데 왜 고난과 순종의 길을 가셨을까요? 9b절을 보면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순종을 배워서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구원이 되십니다. 그는 항상, 필요할 때마다 어디서든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이 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흘러나오는 원천이십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현재 낮아져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 예수님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하나(3:14) 말아야 하나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예수님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훈련을 순종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사람을 섬기며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 일이 다 힘들지만 나와 다른 사람을 감당하는 삶이 스트레스가 많고 힘듭니다. 목자 생활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 부리며 싸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예수님을 배우는 통로요 순종의 기회입니다. 순종을 배울 때 예수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때 구원의 강물이 흘러 들어와 끝까지 사명의 길을 가게 합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더라도 순종을 배워 성숙함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순종은 온전함을 낳습니다.

  결론적으로 존귀한 직분은 사람이 세워준다고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은혜를 붙들고 낮은 자리에서 순종의 길을 가며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이 인정하고 높여 주십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혈통으로 세습이 되었지만 신약시대에 왕 같은 제사장은 고난과 순종을 통해서 온전케 됩니다. 구원의 창시자 되신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원석에 작품을 새길 때 작가는 끌과 정으로 돌의 쓸모없는 부분들을 떼어냅니다.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 속에 쓸모없는 부분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고난과 순종의 길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우리도 내가 처한 상황에서 고난을 받고 고난을 통해서 나와 다른 사람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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