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히브리서 2015년 히3강(3:1-4:13) 끝까지 견고함을 잡으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20회 작성일 15-11-01 14:17

본문

2015년 히브리서 제 3 강
말씀 | 히브리서 3:1-4:13
요절 | 히브리서 3:14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오늘 말씀은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와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입성은 안식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떻게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씀에서 답을 찾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님(3:1-17). 저자는 믿는 우리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해 있으면서 땅에 속한 가치관을 따라 살던 사람들을 하늘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땅의 소유에 집착하며 살 우리를 하늘의 보화를 누리며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히브리 신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데 과거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믿으며 생활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란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사도시오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신실하고 자비로우십니다. 긍휼이 충만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중보기도해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인격적인 만남이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좋은 환경과 처지에 있으면서도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시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자는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이었지만 모세는 실제적으로 대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지시를 받아서 대제사장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신실하셨습니다. 모세는 거역하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까지 신실하게 인도했습니다. 그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 하나님과 자기를 거역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으면서 맡은 바 사명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출애굽역사에 헌신했습니다. 그 완악한 바로와 장장 10라운드에 이르는 혈전을 치루었습니다. 마침내 장자 재앙 때 바로가 항복했습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은 자유의 기쁨을 노래한 것도 잠시 “길이 험하다, 물이 없다, 배고 고프다” 계속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이고자 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가 40주야로 금식하며 있을 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그들을 품고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실지언정 이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절히 중보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가 물 없다고 불평하는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은 물을 내라고 말로 하라고 했는데 그는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그의 손은 반석을 쳤지만 그의 마음은 백성들을 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반석을 친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반석을 쳤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의 평생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니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며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때도 백성을 생각했습니다. 민수기 27:16,17절.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고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모세는 정말 신실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했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신실하사 이를 거부하고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사건에서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하셨습니다. 6a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바다를 건너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의 피로서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때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중보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습니다.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만 합니다. 이는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과 같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집이라면 예수님은 집을 지으신 건축주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입니다. 우리가 그의 집이라는 말은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가족, 그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확실성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과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소유한 것을 자랑합니다. 이것들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나에게 소망의 확신과 자랑이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을 잃고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참된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거짓된 소망을 바라보고 부러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라는 확신과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우리 마음을 완고하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번 이상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멸절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데 마음을 완악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딱딱해 지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힘들어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고, 나 혼자서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할 때 마음이 완악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지금 취업, 연애, 결혼, 출산, 내집 마련, 대인관계, 꿈을 포기한 N포 세대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의 무교성향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어느 단체에 가입하는 것도 꺼리고 개인주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들의 고민에 공감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힘들 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을 악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힘들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안에서 근거를 찾으려는 발악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자기 상실로 이어지고 참된 자기실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짐으로 인간을 독립적으로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자기상실이라는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맙니다. 죄의 유혹이란 물질을 숭배하는 것, 정욕의 유혹, 이생의 자랑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편안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으로 죄의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마음에 평안이 올까요? 누구나 경험하듯이 하나님을 떠날 때 마음이 공허하고 허무해집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허무를 극복해보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바쁘게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피곤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인생을 즐기다가 죽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망없던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에 힘쓰고 소감을 함께 나누고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유혹 가운데, 시작할 때 가졌던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를 건널 때 처음에는 얼마나 구원의 감격에 벅찼었고 하나님을 기뻐 찬양했었던가요. 그런데 광야 길을 가면서 어려움들을 만날 때 그들은 금방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거역했습니다. 시작할 때에 가졌던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려면 주기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의 현재 위치를 깨닫게 되고 나아갈 미래가 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마음에 밀려오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완고하게 하는 것은 마음을 굳히고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고집을 피우는 것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요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고집을 피우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나를 믿겠다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말입니까? 자기 분수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완고하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광야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사무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던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둘째,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18-4:13). 18,19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저자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지 아니함으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4:1).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예수님께 간다는 것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믿을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사람은 마음의 쉼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쉴  때 육신의 쉼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쉰다고 마음의 쉼도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무거운 죄의 짐, 근심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은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가볍고 상쾌하게 됩니다.

  저자가 왜 안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냐면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는 안식일 논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전쟁이 날 때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적에게 죽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던 행동을 바꾸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철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안식일의 개념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참된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가져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대교 크리스천들은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갈등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쉼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이며,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힘이 없습니다. 들은 바 말씀에 믿음을 결합시켜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의 말씀을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장차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당신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당신 안에 쉼을 얻기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때 마음에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우리가 그를 예배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고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면서 쉼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가나안의 안식은 안식의 모형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안식이 안식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쉽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경험하며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안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12,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내 마음 속에서 역사합니다. 말씀은 내 안에 영적인 소원을 일으키고 참 소망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저 안식에 들어갈 힘을 줍니다. 말씀은 찔러 쪼개고 드러냅니다. 말씀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말씀을 통해서 나의 죄가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납니다. 결국 우리는 나의 불순종, 나의 완악함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 문제로 인함입니다.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마음만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내 의지와 결심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광야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리라는 담대한 믿음을 끝까지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광야 길을 갈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됩니다. 많은 유혹들을 만나고 곤궁에도 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처하고 현실의 큰 두려움에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가운데서 유혹과 불순종의 죄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저 안식에 들어가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답은 예수님입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하늘의 안식에 주님과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8건 1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8 히브리서 이엘리야 109 03-10
17 히브리서 이엘리야 103 03-03
16 히브리서 이엘리야 110 02-25
15 히브리서 이엘리야 125 02-17
14 히브리서 이엘리야 113 02-14
13 히브리서 이엘리야 113 02-07
12 히브리서 이엘리야 104 01-31
11 히브리서 이엘리야 101 01-24
10 히브리서 이엘리야 119 01-17
9 히브리서 이엘리야 111 01-10
8 히브리서 이엘리야 119 01-03
7 히브리서 이엘리야 101 12-27
6 히브리서 이엘리야 94 11-29
5 히브리서 이엘리야 114 11-15
열람중 히브리서 이엘리야 121 11-0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