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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호세아6강/13,14장/아침 이슬 같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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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936회 작성일 03-02-23 09:46

본문

2003년 호세아 제 6 강                                                         
말씀 / 호세아 13:1-14:9
요절 / 호세아 14:5

아침 이슬 같으신 하나님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이제 호세아서 마지막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13장은 이스라엘의 송아지 숭배(1-4)와 피할 길 없는 파멸(5-16)을 말씀하고 14장은 축복에 대한 약속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포기치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의지하고 그 앞에 죄를 고백하며 계속해서 믿음의 선한 전진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점점 변화시키시고 열매가 풍성하고 백합화와 같이 피어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13장 1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족속이요,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족속이었습니다. 지금 통치하고 있는 여로보암 2세도 에브라임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 정도로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도자의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겨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였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이신 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잘난 체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교만하게 되자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습니다. 교만과 우상 숭배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맘대로 우상을 만들어 자기 편한 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고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서 우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자기 맘대로 우상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고 합니다. 예배가 이렇게 쉽고 간단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이 나와서 태워 버리기도 하고 급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교만해지기 시작하니 예배가 자기 편한 대로 바뀌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그들은 가벼워졌습니다. 그들은 쉽게 사라지는 이슬과 같고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고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잘 나가는 것 같다가 금방 망해 버립니다. 성공하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알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자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광야 마른 땅에서 그를 권고하셨습니다. 권고하셨다는 말은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광야 마른 땅에서는 그들의 사정을 알고 낮에는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따뜻하게 하시고 그들이 배고플 때에 만나를 내려 먹여 주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6).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배부름과 교만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신명기 8:12-14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잠언 기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8,9)” 사람이 배가 부르면 교만하게 됩니다. 교만하면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배부름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그런데 교만의 진짜 위기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하는 것이 지식이든, 건강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이런 것들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마침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에 SK의 회장은 959억원을 거저 먹으려고 하다가 덜미가 잡혔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교만해졌습니까?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 그만일까요?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 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하나님은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이, 굶주린 사자 같이 저희를 찢어 삼켜 버리십니다. 영적인 파괴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어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배불러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도와 주는 하나님을 대적하니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분별력을 잃어버려 자기를 도와주는 자를 대적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알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나라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왕되신 하나님의 다스림 받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만과 반역하는 마음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던 왕들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앗수르에서 그들을 구원할 왕이 어디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도 보채기 때문에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왕을 폐하였습니다.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겨야 하는데 자기 욕심대로 섬기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왕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만을 섬겨야 하는데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앞장을 섰습니다. 그들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습니다(12). 그들은 죄에 죄를 더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토해내야 하는데 감추려고만 들었습니다. 이러한 에브라임이 다시 태어나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가 되었는데도 태를 열고 나올 줄 모르는 미련한 아들과 같았습니다. 진통이 시작되면 빨리 애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 아이는 산문에서 지체하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죽음 직전에 까지 왔습니다. 회개치 않는 그들에게 파멸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게 됩니다. 그들은 처참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비록 죽음 직전에 있다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소망을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아오는 자는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며 사망의 권세가 깨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부활의 권능자이십니다. 그들이 비록 죽게 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드는 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율법이 저주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절대로 뉘우쳐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죄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저장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일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14: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호세아서의 주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6:1, 14:1). 왜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고멜과 같이 또 죄악으로 달려가는 삶에서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으면 아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함으로 엎드러졌습니다. 우리가 왜 멸망합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가 몰락되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죄악에 뿌리 박혀 있는 인간이 이것을 행할 수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살아야 합니까? 2-4절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씀을 버리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특히 지금 들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를 받아 주소서”라는 고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은혜로 받아 달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자격이 없습니다”이런 고백이 없으면 구제불능입니다. 힘이 없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수송아지를 드리는 것보다 더 좋은 제사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우리가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제 다른 것으로는 안되는 줄 알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앗수스로 해결되었습니까? 오히려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말과 기병만 있으면 됩니까? 안됩니다. 모세가 이미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신17:16).” 이런 고백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십니다(4). 등을 돌리고 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은 고치시는데 바로 우리의 고백을 듣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즐거이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기쁘게 사랑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힘은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죄 사함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죄의 해결은 죄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고백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삽니다. 패역을 고치시는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되고 즐거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요일 1: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그대로 용서해주십니다. 호세아를 구약의 사랑의 선지자라고 한다면 사도 요한은 신약의 사랑의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잘한다고 해 봐야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끊임없이 내 마음에서 분노, 이기심, 정욕 등 죄악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어찌 그것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말로 고백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게 되고 기꺼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런던 폭격 계획을 가진 독일 편에서 로켓 제조 실험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연구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별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한번은 그의 상관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때까지 6,5121번의 실패가 계속 된 참이었습니다. 상관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실패를 해야하겠소?” 그는 아직도 오천 번쯤, 아니면 그 이상 실패해야 성공할 수 있을 거이라고 대답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로켓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6,5000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3,0000번 정도 실패를 했지요. 물론 미국은 아직 실패 한 번 못 저질러 본 상태지요.” 전쟁 말기에 독일은 폰 브라운의 탄도탄으로 영국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무기를 갖춘 나라는 독일 외에 없었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폰 부라운은 미국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주도하여 마침내 세계 최초로 인류를 달에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삶은 마치 로켓을 개발하기 위해 실패한 폰 브라운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패 이후에 올바른 깨달음과 고백이 있으면 삶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실패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인식과 정확한 고백이 진짜 중요합니다. 실패 후에도 다시 한 번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5-7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이슬과 같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 이슬은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분명하게 나누어지는데 건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말라 죽기에 충분할 만큼 태양열이 뜨겁습니다. 건기에 식물이 말라 죽으면 수확을 할 수 없습니다. 이 건기를 죽지 않고 지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밤 사이에 내리는 이슬입니다. 이슬이 없으면 건기 동안 모든 식물은 고사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은 건기에 수분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고 마는 가장 중요한 수분 공급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슬과 같다는 것은 이것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열매고, 수확이고, 소출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둘째, 이슬의 특징은 밤 사이에 내린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슬이 밤이 아니라 뜨거운 낮에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수분 공급이 되기도 전에 금방 말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는 이슬은 가장 적절할 때에 내립니다. 가장 확실한 도움이 되는 순간에 내립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를 아시고 그때에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셋째, 이슬은 날마다 내리는 축복입니다. 한꺼번에 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일년치를 다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이슬의 축복입니다.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또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한꺼번에 왕창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필요한 양만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으면 삶이 어떻게 바뀔까요?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입니다. 백합화는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뿌리에 5,60개의 가지가 뻗어 나가는 식물입니다.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백합화 같이 급성장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려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깊이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가 내리지 않으면 금방 시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신앙의 깊이를 가져옵니다. 뿌리는 내리고 그 가지는 펴집니다. 풍성한 가지가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 그늘에서 쉼을 얻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 아래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슬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가장 듣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러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더 이상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들을 찾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바알을, 물질을 나의 신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인생의 쾌락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명예를 향해서도 나의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들으실 때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리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일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realize 로서 구체화시키다, 실감나게 체득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귀로 듣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제껏 들은 것을 현실의 삶으로 바꾸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되었습니다. 우리가 배운 바 한 말씀을 붙잡고 실제 삶에서 실현시키는 가운데 말씀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나기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과 같은 사랑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고 영혼을 적시는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백합화 같이 피어나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히게 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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