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호세아5강(11,12장) 불븥듯 하는 하나님의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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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호세아 제 5 강
말씀 / 호세아 11:1-12:14
요절 / 호세아 11:8
불붙듯 하는 하나님의 긍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 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는 사람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사랑을 하십니다. 한번 택하신 사람은 끈질기게 추적해서 사랑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불붙듯 하는 사랑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11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1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장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아들로 불러 내셨습니다. 애굽은 죄악된 땅이요, 우상의 땅이요, 노예로 산 땅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땅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아헤브’가 있는데 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이고(6:6), 아헤브는 선택하는 사랑입니다(11:1).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인정해주는 사랑, 선택하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다는 것은 나이가 어리거나 귀여울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나 선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경험이 모자라고 스스로 도울 힘이 없는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립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천박한 노예일 때 사랑해서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때 일꾼이나 잡역부가 아니라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매우 밀착 되어있습니다. 롬5: 6-8을 보면 ‘어릴 때’란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를 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로 고통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생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방향이 없으면 문제가 됩니다. 즉 살만하게 되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을 양육하시고 치료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그 팔로 안아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걸음마를 배울 때는 수없이 넘어집니다. 다른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의 땅에 들어오면 영적으로 완전히 초보이므로 걸음마부터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이 걷는 듯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자주 반복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자주 안아 주어야 하듯이 처음 믿은 새 신자들을 가르쳐 주고 안아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가 제대로 못한다고 나무라기만 하면 그 자녀는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고쳐 주고 교정시키기 위함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병들면 병원을 데리고 다니시며 치료해 주는 어머니와 같으셨습니다.
걸음마를 배우고 나면 다음에는 바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짐승은 목에 줄을 묶어서 끌고 가야 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줄고 끌뿐만 아니라 채찍과 매로 뒤에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과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의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사랑의 줄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많이 하고 실수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지만 짐승처럼 다루시지 않고 사랑의 줄로 이끄십니다. 아주 존귀한 사람으로 대해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목적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굴레 곧 죄의 굴레, 물질, 명예욕, 정욕의 모든 굴레를 벗겨 주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떠먹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끌고 가셔서 하나님이 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풍성히 먹이려고 하십니다. 신령하고 풍성한 것으로 먹여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러 내시고 가르치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기 아들을 사랑함과 같이 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그들은 탕자와 같이 결심을 하고 하나님에게서 물러갔습니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 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들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그들은 기를 쓰고 아들이 되지 않고 가나안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죽자 사자 땅의 것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거룩한 삶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바알을 섬기고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이 다시는 애굽 땅으로 가지 못하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하다가 그 종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훈련을 싫어하면 죄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기를 거부하고 거룩한 삶을 배우기 싫어하면 해방은 취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지겨워서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주는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죄의 종이 됩니다. 그들은 사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란하여졌습니다. 음란과 변태와 동성애가 가득 하였고 착취와 학대가 온 성을 채웠습니다. 이런 그들은 당장 유황 불을 내려서 꼬실라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다고 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하다 하다 안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클립행어’라는 영화에서는 산악대원이 한 동료 여인을 구조하다가 힘이 빠지게 되니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립니다. 돕는 사람이 힘이 없으면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이길 수 있고 그 죄악에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으로 택한 백성을 붙잡아 주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에게 “너는 내게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필요를 위해서 써 먹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포기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십니다. 제가 아이를 잡고 다리를 건널라치면 아이들은 제 손을 더욱 꽉 움켜 쥡니다. 만약 아이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도로로 뛰어 든다면 제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비록 아드마와 스보임같이 죄악되지만 어찌 그를 버리며 어찌 놓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택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사 죄사함의 길을 여십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곁에 있던 성읍들로서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진 도시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유황불로 멸망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이들을 택했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핑계거리를 대서든지 그들을 구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요, 살려 주고 싶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멸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9).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동시에 그들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고 노래했습니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한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부정과 부패를 자기 책임으로 돌리시며 자기 아들의 어깨에 돌려서 십자가에 매달고자 하시려는 계획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유황불 심판을 철폐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3:2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매우 의롭고 값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변화시키고야 마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포기치 않고 그들로 여호와를 좇게 하십니다. 그들이 서편으로부터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비둘기같이 떨며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듣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소리를 크게 지르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사자처럼 소리를 낸다는 것은 새끼를 부르는 어미 사자의 안타까움의 소리, 절실한 소리, 반드시 그 소리를 듣고 어미에게로 와야만 살게 되는 그런 소리입니다. 새끼를 얻을 때까지 어미 사자는 큰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지속적으로 외쳐댑니다. 사자처럼 발하는 소리는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올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언제나 부족한 줄 알고, 모자라는 순종인 줄 알고 겸허하게 뒤따라 갈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섬기고 나면 기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만큼 섬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큰소리치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좇아가야 합니다. 떨며 섬기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종인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뒤따라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 각 집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이는 영혼의 쉼과 안식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집을 예비하시고 그곳에서 쉼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는 새같이 신속하게 애굽과 앗수르 땅, 불순종의 땅,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시하는 땅에서 떨며 나와서 참 평안과 안식이 있는 집,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거짓이었습니다. 거짓과 속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의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그 일을 한다는 것에 거짓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짓의 영, 곧 사탄의 영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신뢰의 대상 문제입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그들은 앗수르와 애굽에 조공을 바치면서 그 나라들이 자기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고 따라갔습니다. 이런 그들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감과 같았습니다. 바람을 먹는다는 것은 허파에 바람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즉 생각이 허황되게 부풀어서 남이 추켜세워 주는 말을 믿고 자신을 엉뚱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도취되어 굉장한 인물로 착각합니다. 동풍은 뜨거운 바람인데 모든 채소와 곡식을 말라 죽이는 아주 무섭고 못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파멸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과 쟁변하시고 그 소위대로 보응하십니다(2).
바로 야곱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그는 배반하여 뒤에서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속여서 장자 자리를 바꾸어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거짓으로 인생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거짓으로 살아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평생 졌다거나 실패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안되면 속임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고야 마는 사람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외삼촌의 재산을 거짓으로 탈취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그는 연애하기 위해서 양을 치고 사람을 섬겼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7년간 종살이를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에서 만나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연애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게 연애를 했는지 7년을 하루 같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7년을 종살이 하고 첫날 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자기 품에 있던 여인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바람을 먹은 것입니다. 그가 죽도록 일하고 재산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얍복 나루터에서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 깐에 뇌물을 다 쓰고 해결책을 찾았지만 더 이상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얍복강ㅂ백사장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절대 고독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는데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그가 자기 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겨루어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그 순간 환도뼈가 탈골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굴복합니다. 자신의 힘이 무너지는 순간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야곱은 이때 자신의 존재가 정말로 무엇인지 깨닫자 울며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엎드릴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야곱의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기꾼에서 하나님의 황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야곱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5). 만군의 하나님이란 인간의 힘을 훨씬 능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 분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념해야 할, 그리고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라.” 하나님께서는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할 때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을 주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양들과 신경전을 벌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권면하고 훈련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으며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까! 또 지금도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십니까!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우리를 오래 참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격노하실까요? 7절을 보십시오.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에브라임은 상인이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이어늘”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장사꾼이 되어버렸습니다. 장사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업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장사를 하는데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장사에는 돈이 걸려 있습니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사업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영업, 사업을 통해서 연결되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돈과 부요함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최고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게 되면 손에 거짓 저울을 가져도 전혀 손이 떨리지 않습니다. 사기를 쳐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돈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도덕도 필요 없고 신앙도 필요 없고, 정직도 필요 없고 오직 사기치는 재미로 살게 됩니다. 그때부터 모든 가치들은 무력 증세에 빠지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는 돈을 버는데 프로가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되면 남을 속여 먹기가 쉽습니다. 그는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가 없으리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만큼 노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한 것입니다.
‘상고’라는 말은 아주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상고’는 ‘가나안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절대로 가나안 백성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상고 곧 가나안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풍요의 신을 좇아가는 일이 바로 가나안 백성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우상 숭배의 출발이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인정을 받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사람은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는 일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주시면 고난조차도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기쁨을 주시면 기쁨을 누립니다. 부유함을 허락하시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삶의 가장 우선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재물의 지배를 받지 말고 오히려 재물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재물은 내가 장사해서 번 것이 아닙니다. 전부 하나님이 선물로 내게 주신 복입니다. 이 복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둘 것이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둘 것입니다(고후9:6). 여러분이 주님께 드린 것은 냉수 한잔 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마 10:42).
말씀 / 호세아 11:1-12:14
요절 / 호세아 11:8
불붙듯 하는 하나님의 긍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 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는 사람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사랑을 하십니다. 한번 택하신 사람은 끈질기게 추적해서 사랑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불붙듯 하는 사랑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11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1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장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아들로 불러 내셨습니다. 애굽은 죄악된 땅이요, 우상의 땅이요, 노예로 산 땅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땅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아헤브’가 있는데 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이고(6:6), 아헤브는 선택하는 사랑입니다(11:1).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인정해주는 사랑, 선택하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다는 것은 나이가 어리거나 귀여울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나 선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경험이 모자라고 스스로 도울 힘이 없는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립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천박한 노예일 때 사랑해서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실 때 일꾼이나 잡역부가 아니라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매우 밀착 되어있습니다. 롬5: 6-8을 보면 ‘어릴 때’란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를 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로 고통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생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방향이 없으면 문제가 됩니다. 즉 살만하게 되면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을 양육하시고 치료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그 팔로 안아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걸음마를 배울 때는 수없이 넘어집니다. 다른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의 땅에 들어오면 영적으로 완전히 초보이므로 걸음마부터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이 걷는 듯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자주 반복됩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자주 안아 주어야 하듯이 처음 믿은 새 신자들을 가르쳐 주고 안아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 자녀가 제대로 못한다고 나무라기만 하면 그 자녀는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고쳐 주고 교정시키기 위함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병들면 병원을 데리고 다니시며 치료해 주는 어머니와 같으셨습니다.
걸음마를 배우고 나면 다음에는 바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짐승은 목에 줄을 묶어서 끌고 가야 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줄고 끌뿐만 아니라 채찍과 매로 뒤에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과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의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사랑의 줄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많이 하고 실수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지만 짐승처럼 다루시지 않고 사랑의 줄로 이끄십니다. 아주 존귀한 사람으로 대해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목적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굴레 곧 죄의 굴레, 물질, 명예욕, 정욕의 모든 굴레를 벗겨 주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떠먹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끌고 가셔서 하나님이 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풍성히 먹이려고 하십니다. 신령하고 풍성한 것으로 먹여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러 내시고 가르치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기 아들을 사랑함과 같이 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그들은 탕자와 같이 결심을 하고 하나님에게서 물러갔습니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 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들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그들은 기를 쓰고 아들이 되지 않고 가나안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죽자 사자 땅의 것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거룩한 삶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바알을 섬기고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이 다시는 애굽 땅으로 가지 못하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하다가 그 종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훈련을 싫어하면 죄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기를 거부하고 거룩한 삶을 배우기 싫어하면 해방은 취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지겨워서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주는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죄의 종이 됩니다. 그들은 사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란하여졌습니다. 음란과 변태와 동성애가 가득 하였고 착취와 학대가 온 성을 채웠습니다. 이런 그들은 당장 유황 불을 내려서 꼬실라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다고 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하다 하다 안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클립행어’라는 영화에서는 산악대원이 한 동료 여인을 구조하다가 힘이 빠지게 되니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립니다. 돕는 사람이 힘이 없으면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이길 수 있고 그 죄악에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으로 택한 백성을 붙잡아 주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쓸모가 없는 사람에게 “너는 내게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필요를 위해서 써 먹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포기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십니다. 제가 아이를 잡고 다리를 건널라치면 아이들은 제 손을 더욱 꽉 움켜 쥡니다. 만약 아이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도로로 뛰어 든다면 제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비록 아드마와 스보임같이 죄악되지만 어찌 그를 버리며 어찌 놓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택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사 죄사함의 길을 여십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곁에 있던 성읍들로서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진 도시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유황불로 멸망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이들을 택했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핑계거리를 대서든지 그들을 구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요, 살려 주고 싶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멸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9).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동시에 그들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고 노래했습니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한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부정과 부패를 자기 책임으로 돌리시며 자기 아들의 어깨에 돌려서 십자가에 매달고자 하시려는 계획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유황불 심판을 철폐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롬 3:2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매우 의롭고 값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변화시키고야 마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포기치 않고 그들로 여호와를 좇게 하십니다. 그들이 서편으로부터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비둘기같이 떨며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듣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소리를 크게 지르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사자처럼 소리를 낸다는 것은 새끼를 부르는 어미 사자의 안타까움의 소리, 절실한 소리, 반드시 그 소리를 듣고 어미에게로 와야만 살게 되는 그런 소리입니다. 새끼를 얻을 때까지 어미 사자는 큰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지속적으로 외쳐댑니다. 사자처럼 발하는 소리는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올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언제나 부족한 줄 알고, 모자라는 순종인 줄 알고 겸허하게 뒤따라 갈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섬기고 나면 기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만큼 섬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큰소리치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좇아가야 합니다. 떨며 섬기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종인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뒤따라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 각 집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이는 영혼의 쉼과 안식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집을 예비하시고 그곳에서 쉼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는 새같이 신속하게 애굽과 앗수르 땅, 불순종의 땅,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시하는 땅에서 떨며 나와서 참 평안과 안식이 있는 집,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거짓이었습니다. 거짓과 속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의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그 일을 한다는 것에 거짓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짓의 영, 곧 사탄의 영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신뢰의 대상 문제입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그들은 앗수르와 애굽에 조공을 바치면서 그 나라들이 자기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고 따라갔습니다. 이런 그들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감과 같았습니다. 바람을 먹는다는 것은 허파에 바람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즉 생각이 허황되게 부풀어서 남이 추켜세워 주는 말을 믿고 자신을 엉뚱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도취되어 굉장한 인물로 착각합니다. 동풍은 뜨거운 바람인데 모든 채소와 곡식을 말라 죽이는 아주 무섭고 못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파멸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과 쟁변하시고 그 소위대로 보응하십니다(2).
바로 야곱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그는 배반하여 뒤에서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속여서 장자 자리를 바꾸어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거짓으로 인생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거짓으로 살아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평생 졌다거나 실패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안되면 속임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고야 마는 사람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외삼촌의 재산을 거짓으로 탈취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그는 연애하기 위해서 양을 치고 사람을 섬겼습니다. 라헬을 사랑해서 7년간 종살이를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에서 만나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연애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게 연애를 했는지 7년을 하루 같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7년을 종살이 하고 첫날 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자기 품에 있던 여인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바람을 먹은 것입니다. 그가 죽도록 일하고 재산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얍복 나루터에서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 깐에 뇌물을 다 쓰고 해결책을 찾았지만 더 이상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얍복강ㅂ백사장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절대 고독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는데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그가 자기 힘을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겨루어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그 순간 환도뼈가 탈골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굴복합니다. 자신의 힘이 무너지는 순간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야곱은 이때 자신의 존재가 정말로 무엇인지 깨닫자 울며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엎드릴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야곱의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기꾼에서 하나님의 황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야곱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5). 만군의 하나님이란 인간의 힘을 훨씬 능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 분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념해야 할, 그리고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라.” 하나님께서는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할 때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을 주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면 양들과 신경전을 벌이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권면하고 훈련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으며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까! 또 지금도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십니까!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우리를 오래 참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격노하실까요? 7절을 보십시오.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에브라임은 상인이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이어늘”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장사꾼이 되어버렸습니다. 장사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업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장사를 하는데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장사에는 돈이 걸려 있습니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사업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영업, 사업을 통해서 연결되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돈과 부요함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최고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게 되면 손에 거짓 저울을 가져도 전혀 손이 떨리지 않습니다. 사기를 쳐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면 돈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도덕도 필요 없고 신앙도 필요 없고, 정직도 필요 없고 오직 사기치는 재미로 살게 됩니다. 그때부터 모든 가치들은 무력 증세에 빠지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는 돈을 버는데 프로가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되면 남을 속여 먹기가 쉽습니다. 그는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가 없으리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만큼 노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한 것입니다.
‘상고’라는 말은 아주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상고’는 ‘가나안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절대로 가나안 백성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상고 곧 가나안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풍요의 신을 좇아가는 일이 바로 가나안 백성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우상 숭배의 출발이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인정을 받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사람은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는 일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주시면 고난조차도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기쁨을 주시면 기쁨을 누립니다. 부유함을 허락하시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삶의 가장 우선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재물의 지배를 받지 말고 오히려 재물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재물은 내가 장사해서 번 것이 아닙니다. 전부 하나님이 선물로 내게 주신 복입니다. 이 복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둘 것이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둘 것입니다(고후9:6). 여러분이 주님께 드린 것은 냉수 한잔 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마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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