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호세아3강(6:4-8:14)/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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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호세아 제 3 강
말씀/호세아 6:4-8:14
요절/호세아 6:6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의로 회개하기를 거절하며 더욱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민족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이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실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새벽빛과 같고 늦은 비와 같이 신실한 분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도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라.” 그들을 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깝고 답답하셨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인애는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그들은 변덕이 심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감정적이었습니다. 결심은 잘 하는데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 하는데 행동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무언가 일어나겠구나 생각이 되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가 몇 시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짓되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뜻을 세우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쉽게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로 돌아오면 욕심을 따라서 행하기를 잘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무작정 감싸 주시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면 책망과 심판을 통해서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서 살도록 계속 도우셨습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길 때 제사와 번제라는 형식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분리되지 않아야 하고 함께 필요합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한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고 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 멋있게 하는 것에 온 마음을 씁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꼬박 꼬박 지키고 십일조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외식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인애. 인애란 히브리어로는 ‘ (헤세드)’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Mercy, Steadfast love로 번역하였습니다. 인애는 보통 너그럽고 두터운 사랑을 말하지만, 구약에 있어서는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steadfast love)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헤세드]는 245회 나오는 말인데, 이것은 히브리 사상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은혜, 인애, 인자, 자비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약을 믿고 그 언약에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생에 따라 자동적으로 어떤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 관계입니다. 자연발생적인 관계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인 관계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정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성한 사람이 될 때까지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고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밉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한번 태어나면 영원히 내 자식이고, 자식인 이상 돌봐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 관계는 서로의 약속과 헌신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부부사이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서로 헌신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신앙은 자연발생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관계를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했거나 못했거나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낸 신앙이 바로 송아지 신앙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애는 변함없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인데 특히 언약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과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사랑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사랑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남편을 두고 정부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헌신이 없는 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도 중요하고 사업도 중요하고 이벤트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하려면 그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깊이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사랑이 한량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어느 정도 알면 질려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묵상해도 질리지 않고 또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그의 거룩함과 희생, 사랑과 의, 은혜와 순결함 등 그의 아름다운 형상은 일생토록 닮아가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원하시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이 세상의 명예나 귀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성프란시스도 일생 동안 하나님을 알기 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체험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 정답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많이 하는 것 보다는 깊이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말씀을 많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한 말씀을 영접하고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양을 쳐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섬기는 자세, 한 가지 일을 해도 마음을 다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만족이 있고 열매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시작한 일에 끝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씀만이라도 깊이 영접하고 순종하면 태산이라도 바다에 빠뜨리는 엄청난 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2절을 볼 때 놀라운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8: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그들은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개인 신앙이 없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에는 말씀이 있다, 우리 이스라엘은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믿음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하셨습니다. 마 7: 21,22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가르쳤고 귀신도 쫓아 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은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율법 전체를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양을 치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살아 있어서 삶의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고 성숙하여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요 그 속에 영생의 기쁨과 행복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8: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여 다양하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지만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지키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한 마디 말씀도 영접하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옛날에나 소용되는 것이지 이 시대에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옛 말씀은 지금도 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관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읽기 선교회에 다니고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엄청나게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방황하고 토론하면서도 성경은 읽지 않습니다.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 한 장만 진지하게 읽어도, 설교 한 번만 진지하게 들어도 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떨쳐 버리고 자기의 목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경을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열심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6:7절 이하를 보십시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아담은 에덴 동산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얼마나 신속히 하나님을 떠났는지 성경은 그의 창조와 함께 바로 그의 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신속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들의 죄는 도피성인 길르앗과 세겜에서 행해진 일들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피의 복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된 성읍이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이 여섯, 즉 요단강 동부에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의 세 곳과, 요단강 서부에 헤브론, 세겜, 게데스의 세 곳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민 35:6-32). 이들 성읍의 위치는 도망자가, 그 중 어느 도피성에든 하룻길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습니다(48km 이내). 그곳에 도피하면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가 있어, 피의 복수를 면했습니다. 물론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이 보호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피성 길르앗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어 피 발자취가 편만했습니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셨습니다.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악이 편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실 때마다 그들의 죄와 악이 드러났습니다. 마치 치료하려고 배를 쨌는데 암이 온 몸에 퍼져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들의 안이나 밖이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지어 노략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저희를 에워싸고 하나님의 목전에 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뇌물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자기 돈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돈으로 이렇게 퍼마셨습니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였습니다.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이 언제나 죄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지을 환경과 기회만 주어지만 이것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 육체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스라엘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죄의식에 무감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다 화덕과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열방에 혼잡되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았습니다. 한쪽은 타고 한 쪽은 설익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세속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는 합리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인간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은 탐욕이요 교만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숫자를 의지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쌓아 놓은 부를 의지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도 선교사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파송했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또 과거에 학생 운동 단체로서 이름을 날렸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재 제자 양성을 얼마나 하고 있으며 얼마나 믿음이 자라고 있으며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맺히고 있습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운 환란을 당하여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비둘기와 같았습니다.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합니다. 노아가 물이 얼마나 빠졌는가를 알기 위해 방주에서 비둘기를 보낸 것은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얼굴은 애굽으로 향하면서 몸은 앗수르로 갔습니다. 그들은 얼굴은 소돔 땅을 향하면서 도망가는 롯과 같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노예 생활로 돌아간다는 뜻이요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서 종 노릇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앗수르에 구원을 얻으러 갔는데 그 그물에 잡혀버렸습니다.
8:1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하나님의 심판은 독수리처럼 갑자기 여호와의 집에 임합니다. 그들은 성전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신자가 이렇게 많고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 할 때에 이스라엘의 변명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기 때문에 대적이 저를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왕들을 세웠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방백들을 세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바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과 방백들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하는 지도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에 대적하기 위해서 왕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적하고 자기 맘대로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제단이 저희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전각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든 우상을 어떻게 처치하십니까? 8:5-9절을 보면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버려지고 부숴뜨려집니다. 이제 앗수르는 사마리아의 금 송아지를 잡아다가 그 신 앞에 무릎을 꿇립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합니다(7).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 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과 같습니다. 본차이나라 해도 이빨 빠진 그릇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자는 수치를 당하고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처럼 해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도 많습니다. 대부분 물질을 사랑하고 돈 버는 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또 여러 가지 정보와 지식에 굶주리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혼합주의의 물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보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런 삶은 많이 수고하고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때 주시는 말씀과 연요절로 잡은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호세아 6:4-8:14
요절/호세아 6:6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의로 회개하기를 거절하며 더욱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민족의 장래가 어떠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이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실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새벽빛과 같고 늦은 비와 같이 신실한 분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도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라.” 그들을 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깝고 답답하셨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인애는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그들은 변덕이 심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감정적이었습니다. 결심은 잘 하는데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 하는데 행동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무언가 일어나겠구나 생각이 되었는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가 몇 시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짓되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뜻을 세우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쉽게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로 돌아오면 욕심을 따라서 행하기를 잘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무작정 감싸 주시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면 책망과 심판을 통해서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서 살도록 계속 도우셨습니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길 때 제사와 번제라는 형식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분리되지 않아야 하고 함께 필요합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한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고 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 멋있게 하는 것에 온 마음을 씁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꼬박 꼬박 지키고 십일조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외식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인애. 인애란 히브리어로는 ‘ (헤세드)’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Mercy, Steadfast love로 번역하였습니다. 인애는 보통 너그럽고 두터운 사랑을 말하지만, 구약에 있어서는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steadfast love)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헤세드]는 245회 나오는 말인데, 이것은 히브리 사상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은혜, 인애, 인자, 자비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약을 믿고 그 언약에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생에 따라 자동적으로 어떤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 관계입니다. 자연발생적인 관계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인 관계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정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성한 사람이 될 때까지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고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밉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한번 태어나면 영원히 내 자식이고, 자식인 이상 돌봐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 관계는 서로의 약속과 헌신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부부사이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서로 헌신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신앙은 자연발생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관계를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했거나 못했거나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낸 신앙이 바로 송아지 신앙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애는 변함없는 사랑, 한량없는 사랑인데 특히 언약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과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사랑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사랑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남편을 두고 정부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헌신이 없는 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도 중요하고 사업도 중요하고 이벤트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하려면 그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깊이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사랑이 한량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어느 정도 알면 질려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묵상해도 질리지 않고 또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그의 거룩함과 희생, 사랑과 의, 은혜와 순결함 등 그의 아름다운 형상은 일생토록 닮아가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원하시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이 세상의 명예나 귀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성프란시스도 일생 동안 하나님을 알기 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체험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 정답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많이 하는 것 보다는 깊이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말씀을 많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한 말씀을 영접하고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양을 쳐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섬기는 자세, 한 가지 일을 해도 마음을 다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만족이 있고 열매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시작한 일에 끝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씀만이라도 깊이 영접하고 순종하면 태산이라도 바다에 빠뜨리는 엄청난 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2절을 볼 때 놀라운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8: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그들은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개인 신앙이 없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에는 말씀이 있다, 우리 이스라엘은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믿음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하셨습니다. 마 7: 21,22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가르쳤고 귀신도 쫓아 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은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율법 전체를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양을 치고 헌신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살아 있어서 삶의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고 성숙하여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요 그 속에 영생의 기쁨과 행복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8: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여 다양하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지만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다 지키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한 마디 말씀도 영접하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옛날에나 소용되는 것이지 이 시대에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옛 말씀은 지금도 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관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읽기 선교회에 다니고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엄청나게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방황하고 토론하면서도 성경은 읽지 않습니다.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 한 장만 진지하게 읽어도, 설교 한 번만 진지하게 들어도 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떨쳐 버리고 자기의 목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경을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열심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6:7절 이하를 보십시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아담은 에덴 동산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는 얼마나 신속히 하나님을 떠났는지 성경은 그의 창조와 함께 바로 그의 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신속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들의 죄는 도피성인 길르앗과 세겜에서 행해진 일들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피의 복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된 성읍이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이 여섯, 즉 요단강 동부에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의 세 곳과, 요단강 서부에 헤브론, 세겜, 게데스의 세 곳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민 35:6-32). 이들 성읍의 위치는 도망자가, 그 중 어느 도피성에든 하룻길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습니다(48km 이내). 그곳에 도피하면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가 있어, 피의 복수를 면했습니다. 물론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이 보호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피성 길르앗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어 피 발자취가 편만했습니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셨습니다.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악이 편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실 때마다 그들의 죄와 악이 드러났습니다. 마치 치료하려고 배를 쨌는데 암이 온 몸에 퍼져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들의 안이나 밖이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지어 노략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저희를 에워싸고 하나님의 목전에 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뇌물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자기 돈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돈으로 이렇게 퍼마셨습니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였습니다.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이 언제나 죄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지을 환경과 기회만 주어지만 이것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 육체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스라엘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죄의식에 무감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다 화덕과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열방에 혼잡되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았습니다. 한쪽은 타고 한 쪽은 설익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세속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는 합리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인간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은 탐욕이요 교만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숫자를 의지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쌓아 놓은 부를 의지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도 선교사를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파송했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또 과거에 학생 운동 단체로서 이름을 날렸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재 제자 양성을 얼마나 하고 있으며 얼마나 믿음이 자라고 있으며 성령의 열매가 얼마나 맺히고 있습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운 환란을 당하여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비둘기와 같았습니다.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합니다. 노아가 물이 얼마나 빠졌는가를 알기 위해 방주에서 비둘기를 보낸 것은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얼굴은 애굽으로 향하면서 몸은 앗수르로 갔습니다. 그들은 얼굴은 소돔 땅을 향하면서 도망가는 롯과 같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노예 생활로 돌아간다는 뜻이요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서 종 노릇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앗수르에 구원을 얻으러 갔는데 그 그물에 잡혀버렸습니다.
8:1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하나님의 심판은 독수리처럼 갑자기 여호와의 집에 임합니다. 그들은 성전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신자가 이렇게 많고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 할 때에 이스라엘의 변명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기 때문에 대적이 저를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왕들을 세웠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방백들을 세웠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바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왕과 방백들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하는 지도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에 대적하기 위해서 왕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적하고 자기 맘대로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제단이 저희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전각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든 우상을 어떻게 처치하십니까? 8:5-9절을 보면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버려지고 부숴뜨려집니다. 이제 앗수르는 사마리아의 금 송아지를 잡아다가 그 신 앞에 무릎을 꿇립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합니다(7).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 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과 같습니다. 본차이나라 해도 이빨 빠진 그릇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자는 수치를 당하고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처럼 해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도 많습니다. 대부분 물질을 사랑하고 돈 버는 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또 여러 가지 정보와 지식에 굶주리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혼합주의의 물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보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런 삶은 많이 수고하고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때 주시는 말씀과 연요절로 잡은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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