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호세아2강(4:1-6:3)/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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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호세아서 제 2 강 330
말씀 / 호세아 4:1-6:3
요절 / 호세아 6:3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이며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특권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힘을 쓸 때 다른 것이 부족해도 제대로 가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 않고 자잘한 것을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일에 힘을 써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I. 지식을 버린 이스라엘 (4:1-5:7)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듣고자 해야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살고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십니다. ‘쟁변한다’는 말은 무엇이 옳은 지 다투는 것입니다. 즉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그들을 쫓아내든지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1b)”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진실하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것은 서로 속이지 않고 정직한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마음을 열 때 믿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책임지는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트레이드마크는 사랑입니다. 또 이스라엘에게 가장 귀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선한 이웃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단순한 신학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헛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숭배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벌고 쾌락을 즐기고 좀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풍요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주하면서 거짓 맹세를 했습니다. 사위라는 것은 며느리 사위가 아니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투절이란 도둑질하는 것, 자기 힘을 이용해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끝없는 복수극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서로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결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지옥과 같은 세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나라는 금수강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직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사회라면 금수(禽獸)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지고 계신 불만은 그들이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맛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제사장이 되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이방을 향해서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이방인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나안 땅에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하게 하시고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게 하십니다(3).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입니다(4).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책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도 드러내 놓고 또는 은밀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누구 잘못이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말고 비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첫째, 지식을 버린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한절에 속에 “지식이 없으므로, 지식을 버렸으니,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백성들과 제사장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부자되는 것에 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파서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니까 백성들도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반복을 해도 새롭게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똑 같은 말씀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어떻게 다 지키며 살 수 있는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도리어 상대주의를 절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자 삶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기준을 잃어버리게 되자 세상의 유행을 따라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번성할수록 하나님께 범죄를 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둘째, 제사장들의 죄악은 탐욕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본래 제사장들은 재산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내는 제물과 십일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감사제나 서원제는 제사장의 것이 되지만 속죄제물은 태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속죄제물까지 먹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더 죄짓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존귀한지 모르고 그 직분에 만족하지 않고 부자가 되고자 재물에 탐을 냈습니다. 그 결과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이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자손의 수효가 더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 좇기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묵은 포도주를 먹고 나서 그것이 다 떨어질 때 쯤이면 새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포도주는 음행과 함께 가나안 생활의 쾌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술취함과 음행으로 쾌락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그 포도주 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죄의 맛을 끊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나서 즐기는 죄의 쾌락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여기서 나무와 그 막대기는 우상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데 아세라와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큰 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를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나무 그늘 아래서 풍년을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딸들이 그 나무 그늘 아래서 행음하며 그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창기는 바알의 여자 사제를 말합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서 음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들은 패망할 줄도 모르고 죄를 지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는 완강한 암소 같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상과는 찰떡궁합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과 갈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상 속에서 만족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도록 말씀을 주셔도 우상과 갈등을 느끼지 않는 그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바람 날개로 싸서 날려버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도 그들은 돌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욱 조직적으로 악을 행했습니다.
5장 1,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5:6).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령이 떠나 버리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풍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알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어쩔 수 없이 음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좋아서 하나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고 또 자기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사람을 포로로 삼아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의식하고 죄짓기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속에 음란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 영적 진보를 이루실 것입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5:8-6:3)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되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에브라임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기 보다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은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배우지 않고 자구에 매여서 본질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좀 같으며 썩이는 것 같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먹기 위해서 잘 보관해 놓았던 것들이 좀이 슬고 곰팡이가 들어서 먹을 수 없게 됨 같이 그들은 쓸모 없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좀과 곰팡이는 은근히 들어가서 썩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병을 깨닫고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 도움을 청하기 보다 앗수르로 가서 싸움꾼인 야렙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환난 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영혼의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절망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기다리십니다.
6:1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들이 돌아오고자 결단을 하면 하나님은 속히 그들을 살리시며 치료하십니다. 다 죽어가는 그들이라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고치십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지금 마음 속으로 ‘내 병은 약으로도, 돈으로도 안돼. 오직 하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낫는 병이야’ 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겁니다. 쫄딱 망했습니다. 찢어져도 너무 찢어졌고 상처를 입었어도 너무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음 속에 아주 희미하게 나마 ‘내가 이렇게 망할 줄 알았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데’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때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나면 오라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너무 염치없고 부끄럽고 뻔뻔스러운 것 같아도 마음 속에 ‘하나님 만이 길이다. 하나님 외에는 내 아픔을 치유해주실 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그들에게 큰 복을 내리어 주십니다.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말은 너무나 숨가쁜 초청입니다. 어떤 진귀한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을 붙들고 “내가 굉장히 귀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하나님의 귀한 성품을 발견했어요. 그러니 우리 하나님을 압시다. 빨리 와서 우리 하나님을 배웁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일정하십니다. 밤이 깊어질 때 보면 다시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고 영원히 밤만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새벽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고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습니다. 밤에 보초를 서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군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버립니다. 하늘이 점점 더 캄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너무나 갑자기 옵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것 같고 나를 버린 것 같지요. 아무리 기도해도 새벽이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이 와버립니다. 새벽빛은 언제오나 하지만 금방 해가 중천에 떠버립니다. 새벽 빛이 뜨게 되면 만물이 따스해 집니다. 희망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년에 비가 두 차례 오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이 말라서 먼지를 날립니다. 그러나 늦은 비가 내리면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며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는 갈망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땅을 적시는 비같이 반드시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 주시고 치료하시고 그 모든 아픔을 제하고도 남는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새벽빛과 늦은 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녁이 지나고 새벽이 틀림없이 오듯이 하나님은 그처럼 신실하십니다. 사람은 변덕이 심하지만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상을 숭배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결국 망하게 됨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절망할 때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할 일이 보입니다. 나아갈 방향이 보입니다. 비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안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충만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호세아 4:1-6:3
요절 / 호세아 6:3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이며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특권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힘을 쓸 때 다른 것이 부족해도 제대로 가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 않고 자잘한 것을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신앙 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일에 힘을 써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I. 지식을 버린 이스라엘 (4:1-5:7)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듣고자 해야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살고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십니다. ‘쟁변한다’는 말은 무엇이 옳은 지 다투는 것입니다. 즉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그들을 쫓아내든지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1b)”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진실하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것은 서로 속이지 않고 정직한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마음을 열 때 믿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책임지는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트레이드마크는 사랑입니다. 또 이스라엘에게 가장 귀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선한 이웃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단순한 신학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헛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숭배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벌고 쾌락을 즐기고 좀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풍요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주하면서 거짓 맹세를 했습니다. 사위라는 것은 며느리 사위가 아니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투절이란 도둑질하는 것, 자기 힘을 이용해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끝없는 복수극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서로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결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지옥과 같은 세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나라는 금수강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직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사회라면 금수(禽獸)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지고 계신 불만은 그들이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맛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제사장이 되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이방을 향해서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이방인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나안 땅에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하게 하시고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게 하십니다(3).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입니다(4).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책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도 드러내 놓고 또는 은밀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누구 잘못이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말고 비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첫째, 지식을 버린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한절에 속에 “지식이 없으므로, 지식을 버렸으니,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백성들과 제사장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부자되는 것에 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파서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니까 백성들도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반복을 해도 새롭게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똑 같은 말씀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어떻게 다 지키며 살 수 있는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도리어 상대주의를 절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자 삶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기준을 잃어버리게 되자 세상의 유행을 따라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번성할수록 하나님께 범죄를 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둘째, 제사장들의 죄악은 탐욕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본래 제사장들은 재산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내는 제물과 십일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감사제나 서원제는 제사장의 것이 되지만 속죄제물은 태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속죄제물까지 먹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더 죄짓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존귀한지 모르고 그 직분에 만족하지 않고 부자가 되고자 재물에 탐을 냈습니다. 그 결과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이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자손의 수효가 더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 좇기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묵은 포도주를 먹고 나서 그것이 다 떨어질 때 쯤이면 새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포도주는 음행과 함께 가나안 생활의 쾌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술취함과 음행으로 쾌락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그 포도주 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죄의 맛을 끊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나서 즐기는 죄의 쾌락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여기서 나무와 그 막대기는 우상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데 아세라와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큰 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를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나무 그늘 아래서 풍년을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딸들이 그 나무 그늘 아래서 행음하며 그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창기는 바알의 여자 사제를 말합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서 음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들은 패망할 줄도 모르고 죄를 지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는 완강한 암소 같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상과는 찰떡궁합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과 갈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상 속에서 만족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도록 말씀을 주셔도 우상과 갈등을 느끼지 않는 그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바람 날개로 싸서 날려버리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도 그들은 돌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돌이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욱 조직적으로 악을 행했습니다.
5장 1,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배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5:6).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령이 떠나 버리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풍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알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어쩔 수 없이 음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좋아서 하나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고 또 자기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사람을 포로로 삼아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의식하고 죄짓기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또 죄를 지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속에 음란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 영적 진보를 이루실 것입니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5:8-6:3)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되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에브라임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기 보다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은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배우지 않고 자구에 매여서 본질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좀 같으며 썩이는 것 같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먹기 위해서 잘 보관해 놓았던 것들이 좀이 슬고 곰팡이가 들어서 먹을 수 없게 됨 같이 그들은 쓸모 없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좀과 곰팡이는 은근히 들어가서 썩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가치관을 따라서 행동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병을 깨닫고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 도움을 청하기 보다 앗수르로 가서 싸움꾼인 야렙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환난 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영혼의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절망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기다리십니다.
6:1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들이 돌아오고자 결단을 하면 하나님은 속히 그들을 살리시며 치료하십니다. 다 죽어가는 그들이라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고치십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지금 마음 속으로 ‘내 병은 약으로도, 돈으로도 안돼. 오직 하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낫는 병이야’ 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겁니다. 쫄딱 망했습니다. 찢어져도 너무 찢어졌고 상처를 입었어도 너무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음 속에 아주 희미하게 나마 ‘내가 이렇게 망할 줄 알았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데’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때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나면 오라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너무 염치없고 부끄럽고 뻔뻔스러운 것 같아도 마음 속에 ‘하나님 만이 길이다. 하나님 외에는 내 아픔을 치유해주실 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그들에게 큰 복을 내리어 주십니다.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말은 너무나 숨가쁜 초청입니다. 어떤 진귀한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을 붙들고 “내가 굉장히 귀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하나님의 귀한 성품을 발견했어요. 그러니 우리 하나님을 압시다. 빨리 와서 우리 하나님을 배웁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일정하십니다. 밤이 깊어질 때 보면 다시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고 영원히 밤만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새벽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고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습니다. 밤에 보초를 서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군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버립니다. 하늘이 점점 더 캄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너무나 갑자기 옵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것 같고 나를 버린 것 같지요. 아무리 기도해도 새벽이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이 와버립니다. 새벽빛은 언제오나 하지만 금방 해가 중천에 떠버립니다. 새벽 빛이 뜨게 되면 만물이 따스해 집니다. 희망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년에 비가 두 차례 오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이 말라서 먼지를 날립니다. 그러나 늦은 비가 내리면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며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는 갈망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땅을 적시는 비같이 반드시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 주시고 치료하시고 그 모든 아픔을 제하고도 남는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새벽빛과 늦은 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녁이 지나고 새벽이 틀림없이 오듯이 하나님은 그처럼 신실하십니다. 사람은 변덕이 심하지만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상을 숭배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결국 망하게 됨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절망할 때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할 일이 보입니다. 나아갈 방향이 보입니다. 비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안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충만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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