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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호세아 1강/음란한 이스라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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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790회 작성일 03-01-19 10:34

본문

2003년 호세아서 공부 제 1 강   
말씀 / 호세아 1:1-3:5
요절 / 호세아 3:1

음란한 이스라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호세아서 전체의 서론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가정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회복의 역사에 대한 복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하게 하심으로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겨 영적으로 타락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음란한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새롭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음란한 이스라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I.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 (1장)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한 것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였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왕을 언급하면서 유다 왕의 연표를 사용함으로 북이스라엘 왕가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호세아가 사역하던 시대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 II세라고 불렸는데 41년 동안 통치해서 강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왕국 분열 이후 가장 번창하고 호화로웠습니다. 그러나 종교, 윤리적으로는 매우 타락해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호세아 선지자가 처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상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2).” 여기서 음란한 아내란 평소 생활이 음란한 여자를 말합니다. 한두 번 음란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음란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다 아는 그렇고 그런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런 여인과 결혼을 하도록 하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가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웬만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이런 충격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아마 호세아의 결혼 소식은 당시 사회에서 빅뉴스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감각한 백성들에게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의 결혼과 가정을 쓰고자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결혼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보다 바알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여자와 같았습니다. 요즈음도 겉모양은 신자인데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결혼 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깊어집니다. 또 사랑할 때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잃어버린 신앙생활 속에서는 뜨거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미지근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뜨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생활은 어떠했습니까? 호세아는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습니다. 결혼 지참금을 내고 고멜을 데려와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위해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저런 여자가 사모님이 되다니 앞으로 어떡해”, “사람 팔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 저가 잉태하여 미심쩍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2장4,5절을 볼 때 이는 호세아의 몸에서 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르엘은 북쪽에 있는 평지의 이름인데 여로보암의 조상인 예후가 아합의 가족들을 이곳에서 몰살시켰던 곳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과 아들 70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한마디로 아합 왕가의 멸망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합 왕가를 멸한 예후 왕가를 결단내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이렇게 붙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예후의 왕가를 멸하시는가 하면 여로보암이 아합 왕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기 때문입니다. 고멜은 제비족이 유혹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찾아다니면서 음란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속에서 끓고 있는 죄의 소욕을 다스리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하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4b).

  고멜이 또 잉태하여 둘째 딸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 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어주셨습니다. 루하마는 긍휼, 은혜라는 뜻인데 로가 붙으면 무자비가 됩니다. 즉 긍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는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말씀이 심령에 있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이 있고 건강이 있어도 말씀이 없으면 로루하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해 볼 때 말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 은혜가 멀어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는데 이후 700년 만에 예수님이 오셔서 갈릴리 땅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보다는 현실을 바라볼 때, 은혜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더 중요시할 때 문제가 됩니다. 우선순위가 문제인 것입니다. 말씀 공부에 대한 절대성을 상실하면 그때부터 한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이름을 로암미로 불러주셨습니다. 암미는 내 백성이란 뜻인데 로암미는 너희는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나는 더 이상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말씀입니다. 원어로는 나는 더 이상 너희들에게 대하여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이제 우리의 모든 관계는 깨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 왔는데 더 이상 선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호적 파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버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음란하기 때문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음란한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에 연약한 자들이란 것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부정하다고 해서 택한 자들을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부정한 자인 줄 알고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고멜과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입니다. 이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자신의 외적인 조건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죄악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고멜은 자녀 셋을 낳고는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습니다.

  II.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2,3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과 음행을 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벌하겠다고 하십니까?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하십니다(2:3). 이 말씀은 여자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행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이스라엘이 음행하는 이유는 연애하는 자가 자기를 따라오면 이러 이러한 것을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내 떡, 내 물, 내 양털, 내 삼, 내 기름, 내 술, 내 것을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내 물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모두 내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편을 버리고 쫓아가는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이런 것들을 내 것으로 주겠다는 말만 듣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고 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다 보니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내 시간, 내 사업, 내 옷, 내 집, 내 자동차, 등 내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변질된 이유가 바로 물질적인 욕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쫓아가는 그 백성들에게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연단을 받을수록 하나님을 멀리 하기만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바치고 은과 금도 더하여 준 것인데 바알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마치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외간 남자에게 갖다 주면서 음란을 즐기는 여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밭을 일구고 김을 매고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일할 지혜와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유목생활 할 때나 가나안 생활을 할 때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면서 오히려 그 사회를 변화시키라고 하십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따라가려 한다면 모든 것을 도로 빼앗아 가실 것입니다. 9-13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자기 것을 도로 찾겠다고 하십니다. 내 곡식, 내 포도주를 찾고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고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서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즐거움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을 섬긴 시일을 따라서 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훈련의 시간을 거친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주고  절망과 고통의 골짜기였던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십니다.
 
  본문은 여호와와 바알, 남편과 정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과 정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정부는 잘 해주지만 결국 여자를 이용하는 자입니다. 여자도 정부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욕망에 따라서 결합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책임도 없고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부부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단지 나의 유익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인지, 정직과 헌신된 관계인지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것을 다 잃기 전에는 깨닫지 못할 만큼 어렵고 미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돌이키면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장가든다(betroth = be + truth)는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녀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결혼입니다. 실패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버림받았던 아픈 과거를 다 깨끗이 없애주시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그들을 맞이해서 결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로 깊이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장가들되 의와 공변됨 , 은총과 긍휼로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장가드십니다. 그들은 의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을 의롭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과거를 조금도 기억 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의 때문에 이스라엘은 과거의 죄가 다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3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건포도 떡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축복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만 먹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들은 포도를 떡 안에 넣은 건포도 떡을 먹었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 제공하는 행복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바알에게 제사하며 건포도 떡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1b-3절을 보십시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고멜은 남편을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렸습니다. 그 남자에게 붙어살다가 이제는 빚을 많이 지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호세아가 고멜에게 아무리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고멜은 호세아에게 돌아올 수 없습니다.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값을 지불하고 사 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을 다른 데 팔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 중에 음란한 이스라엘로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왔습니다. 이제 고멜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호세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구속은 경제 용어입니다. 노예를 값 주고 사는 것입니다. 사버리면 옛 주인과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구속은 신자의 구원을 확실히 보장해줍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없습니다. 죄와 우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옛날에 지은 죄가 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옛 기억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침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무엇이 나를 움직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해서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한 가지를 발견하고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자 힘써야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를 따르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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