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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09년 추수감사(하박국3:1-19)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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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453회 작성일 09-11-15 11:23

본문

2009년 추수감사절
말씀 하박국 3:1-19
요절 하박국 3:18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조건부적인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 3장은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시기오놋”은 극히 ‘감정적인 노래’ 또는 ‘열정적인 시가’와 같은 음악의 한 형태입니다. 그는 임박한 바벨론의 침공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 후에 있을 바벨론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두 사실을 동시에 내다볼 때, 열광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이 기도를 지어 노래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절에서 본문은 ‘기도’라고 말하였지만, 실상 기도는 2절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찬미와 감사입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를 들고 기도하려고 하였다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계획을 깨닫고 찬양으로 일관하였던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출애굽을 이루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2장에서 예언한대로 유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 멸망당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이 일을 듣고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그는 여호와께서 ‘주의 일을 부흥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출애굽 역사와 같은 주님의 ‘구원역사’를 말합니다.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가 부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부흥’이란 ‘주의 일이 생생하게’ 또는 ‘다시 생명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이 되면 사람들이 많아지고 건축이 이루어지고 헌금이 많아지고 교회가 항상 북적북적 거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흥의 결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친히 영혼 구원 역사를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생명력이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생기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기도에 대한 열정, 거룩한 기쁨으로 표출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들이 한 개인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생기고 들판에 불이 붙는 것같이 급속도록 퍼져나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드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흥의 결과는 항상 선교의 열정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열매들이었습니다.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이 선교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2008년에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했지만 그것으로 부흥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부흥은 어떤 프로그램을 잘 시작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개선되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부흥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부흥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부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은혜를 부어 주시고 영적인 갈망을 주십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 순종하며, 하나님을 더욱 뜨겁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깊이 있게, 진실 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도 사경회를 하는 가운데 회개함으로 촉발되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하는 것 외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진심과 기도를 받으시고 전적인 주권 가운데 행하시는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박국 시대에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신 것처럼 그 권능으로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 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택하신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백성의 죄를 제하시고 새롭게 하시고자 함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운데 그는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을 간구하였습니다.
 
  3절부터 15절은 심판주 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임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와 같이 앞으로도 임하실 장엄한 광경을 노래합니다.

  16-19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징계를 인하여 떨고(16-17), 그 다음에 올 회복을 확신하며 기뻐합니다(18-19).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인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 어떻게 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말씀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의 처지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소중한 농작물인 무화과나무가 쇠잔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게 됩니다. 감람나무도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밭에 나가도 거둘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양이나 소 같은 가축도 모두 없어진 극한의 흉년을 맞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폐허가 됩니다. 이런 가운데 선지자는 비참한 심정이 되어 슬퍼하며 고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합니까? 비록 그와 같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한다고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선지자는 임박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초연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러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첫째,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세상 사람들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마시고 회식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풀어버립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수록 레저산업, 유흥 산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업은 불황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 즐거움이 없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사실 하박국이 처한 상황은 즐거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슬퍼하고 애통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첫째가 우리 인생의 목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 즐겁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 자체가 즐거운 일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현실의 희비애락을 넘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세상 역사를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그 선하신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상황에 따라서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절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되 얼마만큼이나 위하십니까? 죄악된 우리, 경건치 않은 우리,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분명한 증거입니다(롬5:8).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주시더라도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시는 것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 되어 기뻐하는 것은 불신자들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신자들의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드시겠습니까? 아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때 그 고통은 존재를 말살하는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사람들 가운데 함께 있게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 죄인들입니까?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보다 더 높고 깊은 생각으로 일하고 계신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를 원망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자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처음1장에서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2-4).”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13-17).”

  그런데 이런 그가 어떻게 잠잠하게 되었습니까? 2장 3,4절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나서 모든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마틴 루터를 변화시켜 종교 개혁을 일으켰고, 요한 웨슬레를 변화시켰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신학 사상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또한 하박국 선지자가 붙든 말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대원칙이 되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갖게 된 그는 이제 침묵합니다. 2장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가 현실 문제 앞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항상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중환자실에 가보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숨을 쉬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산소 호흡기를 떼고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소경은 눈을 떠서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귀가 먹은 사람은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헨델의 메시야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UBF 가을 음악제에 가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귀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이런 차이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로 인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자체로 인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회복된 것을 감사하기보다는 어려운을 일을 당하기 전에 누리는 건강과 행복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잠잠히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귀에 확성기를 대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둘째,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먼저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나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체도 중요하고 국가도 중요한데 가장 먼저 나의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박국의 기도에서 “나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소연을 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웠습니다. 

  그는 임박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100년 뒤에 일어날 구원을 확신하며 고난 중에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로 인해서 기뻐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박국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자신의 문제와 국가의 문제, 현실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 그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그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나의 연약한 본성을 아시고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나의 부족함을 아시고 현재 부딪치는 그 문제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양 없는 문제, 제자 양성의 어려움으로 부터 결국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때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선지자에게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현실이 어렵고 고달파도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걷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그로 하여금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사슴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아서 위로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슴은 위험한 일을 당하면 위로 올라갑니다. 사나운 짐승이 자기를 공격하면 산악의 높은 곳에 빨리 올라가 피신합니다. 사슴은 높은 곳에서 웃으면서 원수를 바라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을 덧입어 세상과 구별된 영적 세계에 살며, 세상에서 오는 모든 악한 공격을 피합니다. 죄 많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곧 높은 하늘의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 시가는 지휘하는 사람, 곧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위하여 자신의 현악기인 수금에 맞추어 연주한 곡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자시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과 민족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운 문제에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차원 높은 감사를 드리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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