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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합1강/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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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5,326회 작성일 03-02-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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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하박국 제 1 강                                                                                                                      말씀 / 하박국 1:1-2:20
요절 / 하박국 2:4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모순되어 보이고 불공평한 상황으로 인해 불평이 터져나올 때가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항변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당장 징계하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의혹과 갈등, 좌절과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한 말씀을 심령에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I. 하박국의 첫번째 항변 (1:1-11)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유다 왕국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여호야김(B.C. 609-598) 왕 통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는 사람들이 악인의 손에서 고통하고 강포와 폭력, 불의와 부정과 부패로 깊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불의로 집을 짓고 사람을 고용하고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백향목으로 수억짜리 집짓기 경쟁을 하였습니다(렘22 :13,14). 그리고 권세있고 힘있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착취하고 압제했습니다. 그는 눈 앞에서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강포가 행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쓸데없는 변론과 분쟁만 일삼았습니다(3). 선지자 하박국은 이런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고 큰 의분과 슬픔에 빠져 고통했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조국을 위해 부르짖고 외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이에 그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니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의가 짓밟히는데도 하나님은 왜 잠잠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이 땅에 사악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등등, 하나님께서 가슴 아픈 상황들을 무심하게 바라만 보고 계시는 것 같이 생각되어 항의했습니다. 현실은 절망적이고 아무리 부르짖어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실망과 좌절로 인해 고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세상은 계속 이렇게 죄악 되어 간다면 믿는 자는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악한 시대에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상황은 그때와 거의 비슷합니다. 주택 보급률은 100%인데 집주인이 자기 집에 사는 것은 50%뿐이고 나머지는 전세, 월세를 주어서 서민들이 주거불안을 느낍니다. 병역비리는 조사하나 마나가 되었습니다. 매춘으로 인해서 나라가 음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코스닥에 상장한 회사의 회계가 투명하지 않고 사장들이 돈을 개인 용도로 많이 쓰기에 회사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여기 저기서 울분에 찬 소리, 원통한 소리, 한 숨소리를 듣습니다. 북한의 핵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국가 안보가 보장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돈만 퍼준다고 항의합니다. 의문사 문제도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저격 살인사건이 연일 터지고 러시아에서는 체첸 사람들이 모스크바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인 일들 등 이 세상은 온갖 강포와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이 절규 섞인 하소연에 응답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열국은 갈대아, 곧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도저히 믿지 못할 방법으로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사납고 성급합니다. 그들은 천하를 주름잡고 다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자비하고 강포한 이방인, 불신자들을 세워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심판하시되 무섭고도 철저하게 하십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무섭고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너무 깊이 병들어서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그들의 죄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온화한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나 말을 잘 듣지 않고 완악하게 굴 때는 심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그 동안 보고만 계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심판을 하시고자 한 나라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 일에 무관심한 방관자가 아니라 그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II.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항변 (1:12-2:20)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의 의지를 보이시자 하박국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 아주 속 시원히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어떻게 강포한 이방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물고기 같이 마구잡이로 죽이고 모기 목숨과 같이 가볍게 여기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유다 백성을 잡은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을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는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기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자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 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가 왜 파수하는 곳에 서 있는 것입니까? 그는 성루에 올라가서 멀리 내다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문제에 빠져있으면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문제를 객관화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파수군처럼 빈틈없이 경계하는 마음으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아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 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난 후 하나님이 그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믿음이 필요하지만, 기도한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은 정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일을 예고하고, 그것을 자기 종에게 계시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반드시 실현되되 그 예언이 정해진 바로 그 순간에 단 1초도 늦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예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홍수심판이 120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때가 되자 그 예언은 정확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후 놓임을 받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주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도 때가 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묵시에 대한 믿음을 심으신 후 의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4절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보라, 그 갈대아 사람의 마음은 교만하며 바르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불신자가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패망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의 철칙이다.”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그 시대의 영향이나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원어는 “확고부동한 것”입니다.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확고 부동한 자세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을 영위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서 우리의 생활 방식을 판단해 보고 우리의 삶을 설계해 나가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서 살 수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우리의 믿음대로 됩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마틴 루터가 부패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 동기가 된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 하면서 하박국서 2:4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고 믿음으로 사는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8절에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첫째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현실을 보고 하나님을 불신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은 죽었다”고 말한 그 사람의 사고방법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신앙이 없이 죽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막 12:24-27). ”하나님은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히 살아 계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계 1:8).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시며,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일일이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삶에 늘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이것은 어째서 이렇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며 따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이야 어떠하든 이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산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어떻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필요하다면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를 거절하면 투기장으로 보내 사자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했습니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믿고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원하시는 대로 섭리해 나가십니다. 당장에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죄에 대해 하박국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교만하고 거짓된 자들임을 알고 계시되 그 죄악을 그들의 머리카락 수를 하나 하나 세어 알고 계신 것처럼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 유다가 악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이 당장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잘못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일이 꼬이고 당장에 망하는 것 같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환경이나 사람들의 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의해 좌우됨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이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역경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한치도 착오 없이 진행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주관자는 과학자나 권력자나 재벌이 아닙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세상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로, 개인 신앙의 중요성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 믿음은 자기의 믿음(his faith)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개인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이는 남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목자님의 믿음, 남편이나 아내의 믿음, 부모님의 믿음을 의지해서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요 21:22). 우리는 남편의 믿음이나 아내의 믿음이나 부모님의 믿음을 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룹신앙이나 분위기 신앙으로 살지 말고 자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직통 전화를 개설해 놓은 것처럼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연결된 자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의인,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불의한 이 시대를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는 것이 문제라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벌고자 합니다. 돈을 버는 것은 좋지만 사명을 팽개쳐 가면서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내서 양을 쳐도 열매가 없을 때 낙심하고 사명을 포기하며 적당히 살고자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을 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면서 사명인의 길을 인내함으로,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학생은 학업과 사명을 동시에 감당해야 합니다. 주부는 가정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평신도 목자는 직장 일을 하면서 사명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지키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년 동안 수고했지만 남는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가 열매 맺기를 원하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무엇을 의지하기 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적인 성장보다 먼저 내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열매를 너무 사랑하니까 이것을 좀 늦게 주시면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덧입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기도생활을 보면 너무나 힘이 없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명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주시지 않는 대신에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내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먼저 내적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도를 해야 합니다. 일대일을 해야 합니다. 이삭 줍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2003학번 양들을 섬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불의한 세상을 이길 뿐 아니라 자기 한계와 죄와 사망 권세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 1서 5:4절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5-20절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어떻게 심판하고자 하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5절은 갈대아인들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술을 즐기며 속이기에 능하고 교만하며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무덤과도 같아서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6-20절에는 바벨론에게 정복당한 민족들이 바벨론을 저주하는 다섯 개의 풍자시를 통하여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풍자시를 통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죄악된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교만하고 죄 가운데 빠졌을 때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신 것 같이, 바벨론이 악을 행할 때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사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시지 않고 악을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강대국이라고 해서 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지만, 죄를 범하면 징계하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목자니까, 선교사니까 잘못을 해도 봐 주시겠지, 나는 그 동안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을 많이 했으니까 봐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만홀이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갈 6:7).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나 편벽됨이 없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14).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2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달리 살아계신 분으로서 거룩한 성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항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계시며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그 뜻대로 주관하는 분이시요, 공의로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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