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21년 추수감사절(시95편)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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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추수감사절 특강 찬송 391
말씀 | 시편 95:1-11
요절 | 시편 95:2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이 시편은 추수감사절 예배에 사용된 찬양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확인할 때면 언제나 불렀던 시입니다. 우리가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며, 통치자이십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일을 교훈 삼아 똑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한 해 동안 구원의 반석이시며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생각하면서 시와 찬양과 악기로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은 예배자들을 초청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그를 찬송하기는 아깝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남들을 청하여 그 찬송에 참여하자고 합니다. ‘오라’는 부름은 공간적 이동보다는 마음을 열고 움직이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축제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축제의 기쁜 노래를 부르자고 선창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하려면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에 기쁨이 생길까요? 먼저 감사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감사할 것들을 찾을 때 마음이 열리고 기쁨이 생깁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 볼 때 잃은 것을 생각하기보다 얻을 것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던 복자천에게도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복자천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벼슬을 하면서도 공멸은 잃은 것이 세 가지가 되고, 복자천은 얻은 것이 세 가지가 됩니다. 잃은 것을 센 공멸은 벼슬하는 것이 고달프고, 얻은 것을 센 복자천은 벼슬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더해집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또한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뻐하고자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4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어떤 도시에 이르러 그 도시를 포위하였을 때에, 그 도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그 때는 마침 부활절이었는데, 그 도시 교회들의 지도자들은 이런 때일수록 부활절을 기쁘게 지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내의 모든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제히 종을 쳤는데, 나폴레옹 군대는 그 종소리를 듣고 다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용단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현실만을 바라보면 별로 찬양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병에 걸려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염려와 걱정이 됩니다. 소화기능도 좋지 않고, 체력도 좋지 않은데 투병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자녀들이 수능을 보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원하는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마음이 눌립니다. 노후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도 없는데 장래를 생각하면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눈을 들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적극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예배의 자리로, 찬양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구원의 반석”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반석 위에 인생을 세웁니다. 이 세상은 진동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주가도 흔들리고, 가치도 흔들립니다. 국민 70%가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파감염으로 확진자가 불어나 불안합니다.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든든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초요 반석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광풍 속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풍 가운데서도 편히 주무셨습니다. 이를 보고 제자들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막4:38)?”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예수님이 그들 곁에서 잠만 자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슬프고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분 곁에서 잠만 잤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폭풍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하나님의 공의의 막대기에 맞으시고 사막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는 예수님은 모세의 반석보다 더 나은 진정한 반석이십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음에 안정을 찾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반석은 ‘혼돈 속의 안정’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안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문제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환란과 혼돈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반석 위에 세우는 분이십니다.
8절에 보면 물이 없어 영적인 위기가 오는 곳이 나옵니다. 므리바와 맛사(출17:7, 민20:2)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배울 므리바 사건과 민수기에서 배울 맛사 사건이 나옵니다. 므리바는 다툼이란 뜻이고, 맛사는 시험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고통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38년의 간격이 있었고, 장소적으로도 시내반도 남북 약 320Km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상 반석에서 시원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여러 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목마른 그들에게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서 있어야 할 견고한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반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변치 않는 복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돈과 인간의 사랑과 권세는 결코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반석이요 복음이 반석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우리의 구원의 반석입니다. 구원의 반석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고 합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을 묘사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고 합니다. 이 대목은 본래 왕에게 합당한 노래와 환호성을 지를 때 사용했습니다. “즐거이 외치자”는 환호하며 박수치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왕의 대관식 때에 백성들이 기뻐서 소리칠 때 사용되었던 동사입니다. 가끔 전쟁에서 경고의 소리를 뜻하기도 하며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바라보며 지르는 소리입니다. 즉 군인들이 전쟁에서 적군을 향해 돌격할 때 외치는 함성이요, 우리를 온갖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가장 큰 소리로 기쁨의 함성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형편만 생각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가 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즐거이 함성을 지르며 열정적으로 노래하자고 합니다. 시끄러운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축제 때 흥분한 사람들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예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찬양을 듣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오라, 노래하라, 즐거이 외치자는 동사는 모두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현실이 어떠하건 간에 우리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주님께 나아와서 노래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과 슬픔에 매몰되고 눌리게 됩니다. 사탄은 자꾸 어두운 생각, 부정적인 생각, 원망과 불평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노래하고 외칩시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노래하자(2).” 감사함이란 감사 제물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가득 담긴 시와 찬양이 들려질 때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부른 슬픈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시와 노래처럼 아름다운 말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믿음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올 때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도 있었고(시23편),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시40장). 자녀와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고, 왕에게도 쫓김을 당하고, 죄를 범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지으며 고통을 승화시켰고, 노래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성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 불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탁월하고 우월한 통치자이십니다. 세상에 크고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스위스의 융프라우나 나이아가라 폭포나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마리포사 나무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볼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단풍의 그 아름다운 색깔과 조화들, 사계절의 신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의 손 안에 있고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 사는 모든 생명도 창조하시고 관리하십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편 8편)”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는 자기숭배라고 합니다. 자기 숭배란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즐기기 위해 가장 원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었습니다. 윌리엄스 교수는 십계명을 대체할 육계명도 등장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진리의 근원이자 기준이다. 당신의 감정은 권위가 있다. 당신은 주권자다. 당신은 위대하다. 당신은 최고선이다. 당신은 창조주다. 그러나 자기 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고자 하면 서서히 미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만족의 근원을 찾으려 할 때 비참한 난파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기워하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일까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6,7a).” 굽혀 경배하는 것은 백성이 자기 왕에게 취하는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앞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방목하지 않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정성껏 돌보듯이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풍성한 꼴을 먹여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올 한 해 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어떻게 인도해주셨나요?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올해도 나를 길러 주시고 돌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출애굽기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60주년 세계선교보고대회와 선교사수양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어려운 시대 가운데서 우리의 필요를 때마다 채워주셨습니다. 직장을 주시고, 직장에서 예기치 못한 승진과 직분을 주셨습니다. 또한 윤석재목자와 신슬아 자매의 결혼 역사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친 형제들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세명의 자녀에게 유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예수님을 좀 더 닮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 불순종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서도 그를 시험하고 조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온갖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들은 마음이 굳어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로 가지 않고 미혹 되어서 딴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역겨워 진노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방황하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에도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해방을 맞이하고 자유를 얻었지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땅의 것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어먹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런 조상들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물질과 번영의 축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축복과 세상의 영광은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일에 쓰임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땅의 것을 팔아 천국을 소유해야지, 천국을 팔아 땅의 것을 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얼마든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완고함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완고하게 되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경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올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새 양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분들도 있습니다. 자녀양육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건강문제에 이상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습니다.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더욱 말씀을 간절히 읽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졌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일상 속의 기적>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을 해댔다.
언제까지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이때 중국 속담이 떠올랐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예전에 싱겁게 웃어 넘겼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건,
반듯하고 짱짱하게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과 후’가
이렇게 명확하게 갈리는 게 몸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중략
우리들이 입으로는
감사를 외치지만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이라고 하니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 데는
3천만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답니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몸에 51억원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도로 한 가운데를 질주하는
어떤 자동차보다 비싼
훌륭한 두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산소호흡기를 쓰면
한 시간에 36만원을 내야 한다니
눈, 코, 입 다 가지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면서 공기를
공짜로 마시고 있다면
하루에 860만원씩 버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51억짜리 몸에
하루에 860만원씩
공짜로 받을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요?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건
욕심 때문이겠지요.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이라는 정상에
이미 올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오늘부터
지금부터
숨 쉴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모두들
힘냅시다
그리고
오늘을 감사하게 삽시다!”
우리가 여러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립니다.
말씀 | 시편 95:1-11
요절 | 시편 95:2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이 시편은 추수감사절 예배에 사용된 찬양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확인할 때면 언제나 불렀던 시입니다. 우리가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며, 통치자이십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일을 교훈 삼아 똑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한 해 동안 구원의 반석이시며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생각하면서 시와 찬양과 악기로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은 예배자들을 초청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그를 찬송하기는 아깝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남들을 청하여 그 찬송에 참여하자고 합니다. ‘오라’는 부름은 공간적 이동보다는 마음을 열고 움직이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축제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축제의 기쁜 노래를 부르자고 선창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하려면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에 기쁨이 생길까요? 먼저 감사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감사할 것들을 찾을 때 마음이 열리고 기쁨이 생깁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 볼 때 잃은 것을 생각하기보다 얻을 것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공자가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던 복자천에게도 물었습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복자천이 그 물음에 답했습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벼슬을 하면서도 공멸은 잃은 것이 세 가지가 되고, 복자천은 얻은 것이 세 가지가 됩니다. 잃은 것을 센 공멸은 벼슬하는 것이 고달프고, 얻은 것을 센 복자천은 벼슬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더해집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또한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뻐하고자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4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어떤 도시에 이르러 그 도시를 포위하였을 때에, 그 도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그 때는 마침 부활절이었는데, 그 도시 교회들의 지도자들은 이런 때일수록 부활절을 기쁘게 지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내의 모든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제히 종을 쳤는데, 나폴레옹 군대는 그 종소리를 듣고 다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용단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현실만을 바라보면 별로 찬양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병에 걸려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염려와 걱정이 됩니다. 소화기능도 좋지 않고, 체력도 좋지 않은데 투병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자녀들이 수능을 보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원하는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마음이 눌립니다. 노후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도 없는데 장래를 생각하면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눈을 들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적극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예배의 자리로, 찬양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구원의 반석”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반석 위에 인생을 세웁니다. 이 세상은 진동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주가도 흔들리고, 가치도 흔들립니다. 국민 70%가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파감염으로 확진자가 불어나 불안합니다.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든든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초요 반석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광풍 속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풍 가운데서도 편히 주무셨습니다. 이를 보고 제자들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막4:38)?”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예수님이 그들 곁에서 잠만 자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슬프고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분 곁에서 잠만 잤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폭풍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하나님의 공의의 막대기에 맞으시고 사막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는 예수님은 모세의 반석보다 더 나은 진정한 반석이십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음에 안정을 찾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반석은 ‘혼돈 속의 안정’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안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문제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환란과 혼돈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반석 위에 세우는 분이십니다.
8절에 보면 물이 없어 영적인 위기가 오는 곳이 나옵니다. 므리바와 맛사(출17:7, 민20:2)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배울 므리바 사건과 민수기에서 배울 맛사 사건이 나옵니다. 므리바는 다툼이란 뜻이고, 맛사는 시험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고통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38년의 간격이 있었고, 장소적으로도 시내반도 남북 약 320Km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상 반석에서 시원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여러 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목마른 그들에게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서 있어야 할 견고한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반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변치 않는 복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돈과 인간의 사랑과 권세는 결코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반석이요 복음이 반석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우리의 구원의 반석입니다. 구원의 반석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고 합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을 묘사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고 합니다. 이 대목은 본래 왕에게 합당한 노래와 환호성을 지를 때 사용했습니다. “즐거이 외치자”는 환호하며 박수치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왕의 대관식 때에 백성들이 기뻐서 소리칠 때 사용되었던 동사입니다. 가끔 전쟁에서 경고의 소리를 뜻하기도 하며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바라보며 지르는 소리입니다. 즉 군인들이 전쟁에서 적군을 향해 돌격할 때 외치는 함성이요, 우리를 온갖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가장 큰 소리로 기쁨의 함성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형편만 생각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가 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즐거이 함성을 지르며 열정적으로 노래하자고 합니다. 시끄러운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축제 때 흥분한 사람들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예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찬양을 듣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오라, 노래하라, 즐거이 외치자는 동사는 모두 적극적이고 역동적입니다. 현실이 어떠하건 간에 우리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주님께 나아와서 노래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과 슬픔에 매몰되고 눌리게 됩니다. 사탄은 자꾸 어두운 생각, 부정적인 생각, 원망과 불평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노래하고 외칩시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노래하자(2).” 감사함이란 감사 제물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가득 담긴 시와 찬양이 들려질 때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부른 슬픈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시와 노래처럼 아름다운 말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믿음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올 때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도 있었고(시23편),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시40장). 자녀와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고, 왕에게도 쫓김을 당하고, 죄를 범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지으며 고통을 승화시켰고, 노래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성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 불가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탁월하고 우월한 통치자이십니다. 세상에 크고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스위스의 융프라우나 나이아가라 폭포나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마리포사 나무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볼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단풍의 그 아름다운 색깔과 조화들, 사계절의 신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의 손 안에 있고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 사는 모든 생명도 창조하시고 관리하십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편 8편)”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는 자기숭배라고 합니다. 자기 숭배란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즐기기 위해 가장 원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었습니다. 윌리엄스 교수는 십계명을 대체할 육계명도 등장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진리의 근원이자 기준이다. 당신의 감정은 권위가 있다. 당신은 주권자다. 당신은 위대하다. 당신은 최고선이다. 당신은 창조주다. 그러나 자기 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고자 하면 서서히 미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만족의 근원을 찾으려 할 때 비참한 난파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기워하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일까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6,7a).” 굽혀 경배하는 것은 백성이 자기 왕에게 취하는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앞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방목하지 않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정성껏 돌보듯이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풍성한 꼴을 먹여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올 한 해 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어떻게 인도해주셨나요?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올해도 나를 길러 주시고 돌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출애굽기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60주년 세계선교보고대회와 선교사수양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어려운 시대 가운데서 우리의 필요를 때마다 채워주셨습니다. 직장을 주시고, 직장에서 예기치 못한 승진과 직분을 주셨습니다. 또한 윤석재목자와 신슬아 자매의 결혼 역사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친 형제들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세명의 자녀에게 유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예수님을 좀 더 닮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 불순종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서도 그를 시험하고 조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온갖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들은 마음이 굳어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로 가지 않고 미혹 되어서 딴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이 역겨워 진노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방황하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에도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해방을 맞이하고 자유를 얻었지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땅의 것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어먹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런 조상들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물질과 번영의 축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축복과 세상의 영광은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일에 쓰임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땅의 것을 팔아 천국을 소유해야지, 천국을 팔아 땅의 것을 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얼마든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완고함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완고하게 되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경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올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새 양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분들도 있습니다. 자녀양육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건강문제에 이상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습니다.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더욱 말씀을 간절히 읽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졌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일상 속의 기적>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을 해댔다.
언제까지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이때 중국 속담이 떠올랐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예전에 싱겁게 웃어 넘겼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건,
반듯하고 짱짱하게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과 후’가
이렇게 명확하게 갈리는 게 몸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중략
우리들이 입으로는
감사를 외치지만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이라고 하니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 데는
3천만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답니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몸에 51억원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도로 한 가운데를 질주하는
어떤 자동차보다 비싼
훌륭한 두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산소호흡기를 쓰면
한 시간에 36만원을 내야 한다니
눈, 코, 입 다 가지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면서 공기를
공짜로 마시고 있다면
하루에 860만원씩 버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51억짜리 몸에
하루에 860만원씩
공짜로 받을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요?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건
욕심 때문이겠지요.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이라는 정상에
이미 올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오늘부터
지금부터
숨 쉴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모두들
힘냅시다
그리고
오늘을 감사하게 삽시다!”
우리가 여러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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