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9년 성탄 1 강 (마태복음 1:1-25)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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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성탄 제 1 강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의 의미와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탄의 은혜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I. 성령으로 나심(18-21)
우리는 흔히 ‘사람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구분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이런 식으로 세상의 가치관이 기준 되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세상에서 대접받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치면서 공부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인 것보다는 세상에서 대접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얘기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6절의 족보를 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사람들의 삶은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족보는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왕이었다는 것도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이름만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것으로 낙심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으로 실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하찮게 취급한다고 해도 내게는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내 속에 확고하게 세워진다면 그때부터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해결책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16절까지 등장하는 족보를 보면 모두 사람이 사람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태어남은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사람이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 아래 죽음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는 단지 육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간의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해도 결국 ‘죽음’이라는 저주에 붙들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역사는 계속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죽음이라는 저주로 이어지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속에 하나님은 저주에서 벗어날 길을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약속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내셨으며 약속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세상에 바로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기독교를 신비화시키거나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사람으로부터 난 사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난 전혀 다른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롬 8:5-6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자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낳은 사람, 즉 육신이 낳은 육신은 육신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영의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처럼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영의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로 존재하면서 어떤 성공을 이루고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록 세상으로부터는 환호를 받고 그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영원히 사망에 처할 육의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놓치고 살면 안됩니다. 이것을 놓치기 때문에 세상처럼 세상에서 육신의 이름이 높임 받기 위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실망과 낙심과 함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고, 신자는 이 능력에 의해서 죄에서 건짐 받고 죄 없는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예수님은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분일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신자가 영원히 높여야 할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이름, 육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름이야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그 일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는 길을 거부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긴다면 진심으로 이러한 신자로 존재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신자라면 예수님이 베푸신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도,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도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는 세상의 무엇보다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소망하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으로 새롭게 난 자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세상에서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을 믿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성령으로 오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낮아짐,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로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임마누엘(22-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임마누엘이란 말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 말이 왜 좋습니까? 혹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자를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주시고, 소원대로 이뤄주시고, 도와주시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사 7:14절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은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하나님이 유다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애당초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징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에 의해 침략의 위협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으로 인해서 유다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아하스는 그 어떤 대적이 공격한다고 해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여호와께 어떤 징조라도 구하라고 하였지만 징조 구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하스에게는 이미 앗수르라고 하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앗수르라는 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3,14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이 징조가 과연 유다를 복주시겠다는 의미의 징조일까요? 하나님이 직접 주신 징조인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를 복 주는 하나님을 생각할 뿐 심판하는 하나님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을 자신을 도우시고 복 주시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복 주고 세상의 삶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부인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에게만 복 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는커녕 반대로 자기 존재만큼은 세상에 굳건히 세우겠다는 욕망의 흔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일까요? 과연 굳게 세움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깊은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는커녕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은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의 오심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마땅한 자를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감사와 찬양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존재성이 부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루 세끼 먹고 살 자격도 없는 부패한 썩은 존재입니다’라는 자기 무너짐이 없기 때문에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는?’이라는 불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나를 향한 그러한 욕망들을 잘라내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마누엘입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신을 굳건히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이기에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과 욕망을 잘라내고 무너뜨립니다. 하나하나 무너뜨리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인되는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꽃피우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임마누엘 하심으로 그 은혜에 둘러앉아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인생이, 저주 아래 있던 인생이 심판과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부족함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죄로 인해 심판받아 마땅한 자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날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의 의미와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탄의 은혜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I. 성령으로 나심(18-21)
우리는 흔히 ‘사람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구분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이런 식으로 세상의 가치관이 기준 되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세상에서 대접받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치면서 공부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인 것보다는 세상에서 대접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얘기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6절의 족보를 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사람들의 삶은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족보는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왕이었다는 것도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이름만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것으로 낙심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으로 실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하찮게 취급한다고 해도 내게는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내 속에 확고하게 세워진다면 그때부터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해결책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16절까지 등장하는 족보를 보면 모두 사람이 사람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태어남은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사람이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 아래 죽음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는 단지 육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간의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해도 결국 ‘죽음’이라는 저주에 붙들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역사는 계속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죽음이라는 저주로 이어지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속에 하나님은 저주에서 벗어날 길을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약속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내셨으며 약속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세상에 바로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기독교를 신비화시키거나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사람으로부터 난 사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난 전혀 다른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롬 8:5-6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자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낳은 사람, 즉 육신이 낳은 육신은 육신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영의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처럼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영의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로 존재하면서 어떤 성공을 이루고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록 세상으로부터는 환호를 받고 그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영원히 사망에 처할 육의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놓치고 살면 안됩니다. 이것을 놓치기 때문에 세상처럼 세상에서 육신의 이름이 높임 받기 위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실망과 낙심과 함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고, 신자는 이 능력에 의해서 죄에서 건짐 받고 죄 없는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예수님은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분일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신자가 영원히 높여야 할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이름, 육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름이야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그 일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는 길을 거부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긴다면 진심으로 이러한 신자로 존재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신자라면 예수님이 베푸신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도,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도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는 세상의 무엇보다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소망하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으로 새롭게 난 자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세상에서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을 믿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성령으로 오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낮아짐,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로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임마누엘(22-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임마누엘이란 말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 말이 왜 좋습니까? 혹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신자를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주시고, 소원대로 이뤄주시고, 도와주시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사 7:14절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은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하나님이 유다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하스는 애당초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징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에 의해 침략의 위협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으로 인해서 유다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아하스는 그 어떤 대적이 공격한다고 해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여호와께 어떤 징조라도 구하라고 하였지만 징조 구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하스에게는 이미 앗수르라고 하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앗수르라는 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3,14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이 징조가 과연 유다를 복주시겠다는 의미의 징조일까요? 하나님이 직접 주신 징조인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를 복 주는 하나님을 생각할 뿐 심판하는 하나님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을 자신을 도우시고 복 주시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복 주고 세상의 삶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부인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에게만 복 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는커녕 반대로 자기 존재만큼은 세상에 굳건히 세우겠다는 욕망의 흔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일까요? 과연 굳게 세움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깊은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는커녕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은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의 오심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마땅한 자를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감사와 찬양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존재성이 부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루 세끼 먹고 살 자격도 없는 부패한 썩은 존재입니다’라는 자기 무너짐이 없기 때문에 하루 세끼 먹고 사는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는?’이라는 불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나를 향한 그러한 욕망들을 잘라내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마누엘입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자신을 굳건히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이기에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이 꿈꾸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과 욕망을 잘라내고 무너뜨립니다. 하나하나 무너뜨리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인되는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꽃피우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임마누엘 하심으로 그 은혜에 둘러앉아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인생이, 저주 아래 있던 인생이 심판과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부족함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죄로 인해 심판받아 마땅한 자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날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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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성탄 제1강_메시지 1.hwp (93.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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