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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시편 1강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윤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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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3회 작성일 19-09-0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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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특강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6
요절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을 처음 읽으면 반복되는 표현, 잘 이해되지 않는 감정적 표현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점점 읽어갈 수록 시편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선한 지혜가 가득한 책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죠? 오늘 첫 장인 시편 1편은 총 6절로 짧은데, 1-3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누리는 복에 대해서, 4-6절은 그러지 않는 자들이 당하는 비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시대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상황이 어렵고 조건이 안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푸르른 나무 같이 번성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한 삶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그러한 삶의 비밀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구약성경 칠십인 역은 이 절의 시작 부분을 "마카리우스 아네르"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뜻은 "얼마나 복되는가!" 하는 감탄문입니다. 오,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000 한 사람은!"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악인이라고 하면 살인자나 강도 같은 중죄인을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그런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KJV 성경은 악인을 "the ungodly” 곧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경건한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일만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도 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힘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러한 좋은 일을 하는 모든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다른 그 무엇을 높이는 동기이기 때문에 그 하는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 살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세상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요즘은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지난 1-2년 동안 부동산이 엄청 올랐습니다. 전세로 이사 가려고 하는데 집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말을 들으면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부러우면 진 것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서 애써 부러운 마음을 부인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부러운 마음이 조금 듭니다. 여유 있게 살면서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요즘 신문에서 정치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 우리도 정치적인 수단을 써서 뭔가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복 있는 자는 그런 세상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의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복이 있습니다.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앞에서 말한 악인, 곧 불경건한 자보다 조금 더 심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인데 반해 죄인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쾌락을 따릅니다. 디모데후서 3:2-5a절은 죄인들의 삶이 어떠한 가를 잘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사람들은 세 가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날은 거룩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미워하는 시대입니다.

미국의 많은 주들은 이미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였습니다. 한 유명한 동성애 옹호 운동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연설을 하며 동성애를 정죄하는 구약성경 레위기서 18장을 찢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찢어버린다고 그 계명의 말씀이 없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을 공공연히 대적하였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자신감이 넘치고 멋있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자는 그러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그러한 삶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을 확립합니다.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는 사람이 복됩니다. 오만한 자들이란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the scornful (KJV)"을 말합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안하무인입니다. 역사에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많은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큰 정복 사업 이후 교만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바벨론 왕궁 옥상을 걸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4:30).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했어야 하는데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마지막 말 한 마디가 달랐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말이 아직도 그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그러자 그는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수광병(lycanthropy)이 들어 짐승같이 칠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잠언서 16:18은 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 한다는 말은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어로 "delight"로 그 의미는 아주 큰 만족을 누리다 (extreme satisfaction) 또는 높은 수준의 기쁨 (a high degree of joy) 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디에서 기쁨을 누리나요? 요즘 젊은이들은 게임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에서 즐거움을 누립니다. 어떤 사람은 밤을 새워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은 TV 드라마를 보거나 스포츠를 봄으로 즐거움을 누립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버는 재미로 삽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압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즐거움은 참 즐거움이 아니며 단지 잠시의 낙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쾌락을 다 누린 전도자 솔로몬 왕도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참된 낙을 누려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덟 아들 중의 막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이 즉각적으로 그를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그 일 때문에 10년 이상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난의 날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고 말씀에서 기쁨과 인생 방향을 얻었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기 입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가 말씀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119:9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큰 낙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축복하사 그의 마음을 평강으로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세 세우셨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말씀을 즐거워하고자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읽고 재미를 못 느낍니다. 잡생각이 들어오고 졸음이 옵니다. 즐거움을 별로 못 누립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말씀의 맛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 미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패스트푸드로 입맛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햄버거, 피자 등 패스트푸드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고소한 맛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 입맛이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지면 건강한 음식에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소한 감칠맛이 없고 그냥 밋밋하게 느껴집니다.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느끼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인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시각적,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건강한 음식인 말씀에서 맛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좀 딱딱하고 맛이 없는 것 같아도 세상의 오락이나 인터넷 뉴스 같은 것을 멀리하고 자꾸 말씀을 가까이 하다보면 점점 맛을 느끼게 됩니다. 맛을 알게 되면 열심히 먹게 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이태리 로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오페라 하우스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식당은 당시의 유명한 테너 가수인 루치아노 파파로티가 자주 오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때는 무더운 여름이었고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는 왕새우 스파게티를 시켰습니다. 저는 전혀 먹고 싶지 않은 상태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스파게티를 한번 맛을 보자 와! 너무나 맛이 있었습니다. 그 맛을 보자 갑자기 입맛이 당겼고 3분 만에 한 그릇을 다 먹어 치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말씀의 맛을 알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밤낮으로 말씀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하가"(Haga) 라는 말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깊이 생각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입니다(시 119:99, 148). 여러분이 혹시 외국에 나가 비행기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 정통 유대인을 본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작은 성경을 보면서 입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암송하는 것입니다. 작은 소리로 중얼 중얼.. 그것이 바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단어의 의미는 먹이를 움켜잡고 있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입니다(시 2:2). 성경적 묵상은 중립적인 마음으로 단순히 생각하거나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자세는 맹수가 한번 잡은 먹이를 절대로 빼앗기기 않으려고 움켜쥐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그 말씀을 도모 또는 적용하는 것입니다(시 2:1). 곧 말씀을 깊이 마음과 생각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을 볼 때 묵상이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암송하여 마음 깊이 담아 나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소가 새김질을 하듯이 질근 질근 말씀을 먹고 다시 먹는 삶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요즘같이 바쁜 시대에, 무엇이든지 빨리 처리하는 스피드 시대에 시간을 들여 묵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몸에 익을 때까지 부지런히 훈련을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다윗도 말했습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 148). 아침 조용한 첫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묵상하고, 깨달은 바를 적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한다면 참으로 좋은 묵상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시간은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날 본문을 개인적으로 읽고 주님께서 주시는 한 말씀을 받는 시간입니다. 물론 본문의 주제를 잘 파악하여 그 포인트의 말씀을 묵상하고 깊이 새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꼭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 본문에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가 되는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묵상하고 적용하면 그것도 훌륭한 양식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할 때 새벽에 양식을 먹는 것이 억지가 아니고 즐겁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깊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매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변함이 없고 영원합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3:15-17).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밤낮으로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며 우리 자신도 가장 복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와 같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팔레스타인의 땅은 일반적으로 거친 땅입니다. 광야 같은 곳이 많습니다. 그런 땅에서 물이 풍부한 곳에 심겨진 나무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 나무는 가뭄 때에도 뿌리를 통해 물을 충분히 빨아들여서 잘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말씀은 우리가 비록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능력을 줍니다. 고난을 감당할 만한 힘을 주고 우리로 강한 사람들이 되게 해 줍니다. 슬픔의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해 줍니다. 두려운 순간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사 더욱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로 결코 낙망하지 않게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자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없습니다. 시편 119:165절을 보십시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사람들은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 속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문제 중심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문제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가 많은 가운데서도 말씀 중심이 될 때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주시고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하십니다. 시편 119: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고관들이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면 빨리 자신을 변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대로 두면 내가 무슨 해를 당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인은 그런 것에 말려들지 않고 그저 주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또한 시편 119:78절은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엎드러뜨렸으면 당장 일어나 복수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도 상대방을 쳐서 넘어뜨려야 분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더 이상 당하지 않도록 뭔가 액션을 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주의 율례를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그저 말씀을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원수가 나타나 나의 뺨을 때렸는데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그저 말씀을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시인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신을 도우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제 중심이 아니라 어떤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말씀 중심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대적이 나를 화나게 하고 공격한다 해도 우리는 그저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중얼중얼 거리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황폐한 이 시대로 인해 때때로 절망이 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캠퍼스에 가서 피싱을 하면 성경 공부에 응하는 양들이 거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점점 작은 모임이 되어 가는 것 같고 사람들은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들은 실제로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최고의 기회가 됩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일에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복 있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보통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새벽기도와 양식은 저의 하루 생활에서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또한 존 캘빈이 말했듯이 우리가 성경을 깊이 공부해 나가면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경이 정말 놀라운 책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성경에 있는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한 구절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년전부터 성경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나면 길을 걸으며 말씀을 암송합니다. 어떤 때에는 집 근처 공원에 나가 30분이나 한 시간 걸으며 성경 구절을 암송합니다. 이를 통해 말씀을 읊조리는 기쁨, 말씀을 먹는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은 제게 아주 큰 기쁨을 줍니다. 묵상할 때 말씀은 댕글댕글 살아 운동하며 때마다 놀라운 지혜를 줍니다. 이 위험한 세상을 항해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제가 다른 것을 다 잃어도 말씀을 묵상하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자 합니다. 우리 모임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자, 그러면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지 보겠습니다. 4절입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성경은 놀랍게도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자를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겨와 같습니다. 그들은 뿌리를 내리지 않아 처음에는 편하고 자유롭게 보입니다. 현명하고 융통성 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사람은 바람에 부는 겨와 같습니다. 결국 불에 들어가 타버리는 겨와 같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의인의 회중,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6절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사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세상에서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인정하십니다. 눈동자와 같이 그들을 보호하십니다(시17:8). 그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꾸준한 양식 생활과 신실한 말씀 공부, 성경 암송을 통해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늘 기쁨이 넘치고 모든 일에 형통한 삶을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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