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자(이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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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여름수양회 준비메시지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자
요절/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복음으로 인한 감격’입니다. 왜냐하면, 감격은 곧 차고 넘치는 에너지요, 끓어오르는 생명력이요, 최고의 기쁨이며,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복음으로 인한 감격’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며, 복음을 주신 목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복음의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힘차게 천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우리에게 맡기신 거룩한 사명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감격이 식을 때, 우리의 삶은 메마르게 되고, 삶의 행복을 잃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4절은 유명한 ‘예수님의 성육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육신 하신 이유, 둘째, 성육신 하신 목적, 셋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 받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자의 심령에 ‘복음의 감격’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육신 하신 이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은 누구지요? 요한복음 1:1-3절에 보면, 그 분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분은 곧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가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되시고, 권세와 영광과 성품과 생각과 뜻과 마음이 하나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신령한 영이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되, 비천한 처녀의 몸에서 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화려한 궁전의 황금요람에 누이신 것이 아니라, 강보에 싸여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흙속에서 기어 다니는 지렁이와 같이 살기 위해 지렁이가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하나님의 성육신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하다’는 동사는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살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겉모양만 같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와 힘과 존귀와 권세와 지존하심을 버리시고, 우리와 함께 느끼고, 공감하고, 아파하는 육체로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제가 한국대표직을 위임하고 68세에 실버 선교사로 짐바브웨에 파송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다 비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살면서 저의 무의식 속에 배어있는 사고방식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등, 비워지지 않은 것들이 드러났습니다. 일처리가 느리고, 합리적이지 못하고,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들을 반복하여 대할 때, 속에서 화가 치밀고, 판단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그 말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랜 시간이 필요 없이 단숨에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판단하는 대신에 깊이 이해하시고, 처음부터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성육신하신 이유가 사랑이며, 그 사랑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도 더 강한 사랑, 맹렬한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값비싸고 진실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 “아담아!” 부르시며 먼저 찾아오신 그 사랑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3:20절에서 애타게 죄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그 사랑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성경은 전체가 우리 죄인들과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래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잘 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기 때문에, 근 십년을 도망자 신세로 고달프게 살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전쟁에서 다 죽었습니다. 사울의 족속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는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다윗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울의 재산을 다 찾아서 그에게 줬습니다. 그리고 매일 다윗의 상에서 왕자들과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원수의 씨인 므비보셋을 황태자와 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의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았겠어요? 삼하 9:8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통일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재산 얼마를 줘서 먹고 살게 하면 되지, 혹은 좋은 집, 좋은 병거를 주고, 종들을 붙여줘서 편히 살게 하면 되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이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인간의 몸으로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게까지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제한적이고, 계산적이고, 여차하면 선을 빨리 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사랑,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 ‘그렇게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까지 왔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함께 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잠깐 같이 밥을 먹는 것은 괜찮지만, 함께 살기는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지만 제 동역자(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지요. 자기중심성과 자아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공감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만, 이기심, 정욕, 세상욕심 등으로 냄새가 펄펄 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까지 희생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지독한 죄인과 함께 하셨고, 지금도 매일 24시간 365일 함께 하십니다. 때론 기다리시며, 때론 책망하시고, 때론 격려하시고, 때론 깨우치시며, 그 사랑과 겸손을 조금이라도 알도록 도우셨고, 지금도 돕고 계십니다. 나의 영원한 아버지요, 구주요, 목자요, 경배의 왕이요, 참 남편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저의 참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고, 앞으로의 삶도 희망찹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을 감사 찬송합니다.
둘째, 성육신 하신 목적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끔찍한 상황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의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듣고 감격하여 애통하며 눈물로 회개했던 그 날의 감격과 자유를 잊지 못합니다. 그 자유는 창공을 맘껏 날아오르는 새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실낙원 되었던 이 문제 많은 세상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서 값진 피를 흘려 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이 땅에 천국을 세울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자격이 안 되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자격이 있으신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유는 사랑 때문이요, 이 길 밖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그 몸을 찢기고 보혈을 다 쏟으신 이 ‘십자가 복음’이 곧 복음의 감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은혜를 우리가 거듭날 때 한번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이러한 감격과 감동가운데 살며 참 자유를 누리라고 주셨습니다. 신자의 삶은 연륜이 쌓일수록 이 은혜와 감격이 더 새로워지고 더 사실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감격과 감동이 현재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습니까? 그러리라 믿습니다. 반면에, 혹 식어진 가슴을 부여안고, “나는 초 신자가 아니고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가슴이 식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자기를 위로하며 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에베소 교회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첫사랑을 버렸구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3:16).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격과 감동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그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믿되 처음 거듭날 때와 같이 겸손하고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거듭날 때 사람이 갑자기 성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은혜로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수년, 혹은 십 수 년을 목자로 살고 있는데도 이기심과 무정함의 뿌리가 팔수록 나올 때 절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치명적인 약점은 어쩔 수 없고, 고질병은 안 없어진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살기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이 불신이 우리가 사명인으로 힘 있게 살지 못하게 하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되게 하고, 때로는 원치 않게 복음의 말씀 대해 냉소적이 되게 합니다. 이는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죄 성과 고질병이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능력 앞에 현재적이고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저의 주된 관심이 역사를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본국에서 스탭목자로 40년을 그렇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짐바브웨로 가기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역사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예수님을 배우는 것임을 일깨워주시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분명한 소원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때마다 적나라한 모습으로 말씀 앞에 서게 되었고, 그동안 둔하게 여겼던 제 안의 죄악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속교만, 자기의, 자기사랑, 불신, 자기중심적인 생각, 판단, 사랑치 못하고 축복하지 못하는 죄들이 계속 드러났습니다. 성령님은 저의 죄들이 드러날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을 주셨고, 주님의 보혈이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요즘 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이전보다는 많이 성화됐지만, 그렇게 깨끗지가 않습니다. 이기심, 고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 자기사랑, 건강염려 등이 순번을 바꿔가면서 내면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릅니다. 찬송가 작사자의 고백처럼 저의 본성은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마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213장(새 423장)을 자주 부르며 삽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 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기준은 선교사인가, 목자인가 하는 타이틀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고, 얼마나 큰 역사를 이뤘는가? 도 아닙니다. 어떤 속마음과 어떤 믿음으로 사는 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큰 종, 사도 바울이 천국에 갈 날이 가깝고 사명을 거의 다 마친 인생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아니 성자가 된 바울이 어떻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가? 젊을 때에는 이 고백이 공감이 잘 안 갔는데, 지금은 공감이 갑니다. 성철 스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은 열반송에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 보다 더 높다.”산 속에서 일생을 고행만 한 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고백했는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절망 중에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는 또한 감격 가운데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24,25)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성자 칭호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많은 참회의 시를 쓴 다윗, 고백록을 쓴 어거스틴,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외친 바울처럼,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이 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회개가 없는 바리새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매 순간 예수님의 피의 복음에 대한 원색적인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감격 가운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복음의 감격을 충만케 회복시켜주시도록 분명한 기도제목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 년 중 최고의 생명의 말씀축제인 여름수양회는 양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리더들에게 더 필요한 것입니다. 부흥은 내 속의 복음의 감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성인 복음화라는 슬로건아래 자칫하면 머리신앙만 자라기 쉽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겠는데 실제로는 마음이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어느새 하나님 대신 자아를 우상으로 섬기며 불신앙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믿지 않고 자기의 경험과 한계적인 생각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도덕적인 행실보다도 무디어진 심령, 교만, 불신 등 영적인 죄가 더 심각합니다. 회개하되 마음 밑바닥까지 갈아엎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빈 마음에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공급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피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확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찬송가도 우렁차게, 싱어롱도 온 힘을 다해, 성경을 읽을 때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아멘, 아멘!’하며 가슴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가슴으로 받아야 생명이 되고, 살이 되고, 삶이 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지금도 주의 보혈이 흐릅니다. 강 같이 흐릅니다. 언제나 흐릅니다. 믿고 뛰어 나아가 씻김을 받으면 됩니다. 여러분, 날마다 밤낮으로 믿고 뛰어 나아가 그의 피로 씻음을 받읍시다. 그리하여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며, 그 감격 가운데 살아갑시다.
셋째,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고귀한 피를 쏟으신 것은 우리만 구원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이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회복되고, 본래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모든 사람과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고자 하십니다. 딤전 2:4-6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로마서 10:21절 말씀대로, 죄인들을 향하여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 사람 모두입니다. 여기에는 별별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처럼 잔인한 자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기회주의 자, 이기적인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도 가룟 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무슬림, 힌두, 공산주의자, 식인종,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필요한대로 지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지의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사람 중에도 문란한 사람, 세리 족, 사마리아 족, 중풍 족, 성실한 시몬 족,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우리는 지나친 세리 족, 사마리아 족을 영접하기 참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외시킵니다. 버릇없고,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제외시킵니다. 그러다 보면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분명히 캠퍼스 제자양성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절박하시면 요나를 니느웨 까지 보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잔인한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까지도 멸망치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성육신입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도로 나타나던지 기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요즘 한국 대학생들이 누구보다도 구원이 필요한 이방인들이 됐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서 전도를 하러 캠퍼스에 가기도 합니다. 당연히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하고 적대적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면 목자가 도리어 상처를 받고, 포기하거나,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과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면 힘들어도 이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하는 양이 있다면 남은 며칠 동안에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서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세상을 향해, 불신자들을 향해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담감을 기도로 풀어내야 합니다. 출퇴근 오가면서 이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본 받는 길입니다. 내가 감격이 회복되고 구원의 은혜가 회복될수록 기도제목이 많아집니다. 새벽에 10분 기도하고 기도할 말이 없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도할 것이 더욱 더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게 되겠습니까?
결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령님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리십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가슴에 흐르게 합시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수많은 캠퍼스 청년들, 우리 주변의 사람들, 세상 만민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고통이요 아픔으로 영접합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번 여름수양회를 모든 목자님들과 양들에게 복음의 감격이 새롭게 임하는 생명의 말씀잔치로 축복해주시도록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할렐루야! (2019.7.21. 이사무엘 선교사)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자
요절/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복음으로 인한 감격’입니다. 왜냐하면, 감격은 곧 차고 넘치는 에너지요, 끓어오르는 생명력이요, 최고의 기쁨이며,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복음으로 인한 감격’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며, 복음을 주신 목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복음의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힘차게 천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우리에게 맡기신 거룩한 사명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감격이 식을 때, 우리의 삶은 메마르게 되고, 삶의 행복을 잃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4절은 유명한 ‘예수님의 성육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육신 하신 이유, 둘째, 성육신 하신 목적, 셋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 받는 길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자의 심령에 ‘복음의 감격’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육신 하신 이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은 누구지요? 요한복음 1:1-3절에 보면, 그 분은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분은 곧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가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되시고, 권세와 영광과 성품과 생각과 뜻과 마음이 하나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신령한 영이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되, 비천한 처녀의 몸에서 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화려한 궁전의 황금요람에 누이신 것이 아니라, 강보에 싸여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흙속에서 기어 다니는 지렁이와 같이 살기 위해 지렁이가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하나님의 성육신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하다’는 동사는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살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겉모양만 같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와 힘과 존귀와 권세와 지존하심을 버리시고, 우리와 함께 느끼고, 공감하고, 아파하는 육체로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제가 한국대표직을 위임하고 68세에 실버 선교사로 짐바브웨에 파송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다 비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살면서 저의 무의식 속에 배어있는 사고방식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등, 비워지지 않은 것들이 드러났습니다. 일처리가 느리고, 합리적이지 못하고,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들을 반복하여 대할 때, 속에서 화가 치밀고, 판단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그 말들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랜 시간이 필요 없이 단숨에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판단하는 대신에 깊이 이해하시고, 처음부터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성육신하신 이유가 사랑이며, 그 사랑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도 더 강한 사랑, 맹렬한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값비싸고 진실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 “아담아!” 부르시며 먼저 찾아오신 그 사랑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3:20절에서 애타게 죄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그 사랑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성경은 전체가 우리 죄인들과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래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잘 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기 때문에, 근 십년을 도망자 신세로 고달프게 살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전쟁에서 다 죽었습니다. 사울의 족속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는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다윗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울의 재산을 다 찾아서 그에게 줬습니다. 그리고 매일 다윗의 상에서 왕자들과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원수의 씨인 므비보셋을 황태자와 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의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았겠어요? 삼하 9:8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통일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재산 얼마를 줘서 먹고 살게 하면 되지, 혹은 좋은 집, 좋은 병거를 주고, 종들을 붙여줘서 편히 살게 하면 되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이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인간의 몸으로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게까지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제한적이고, 계산적이고, 여차하면 선을 빨리 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사랑,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 ‘그렇게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까지 왔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함께 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잠깐 같이 밥을 먹는 것은 괜찮지만, 함께 살기는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지만 제 동역자(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지요. 자기중심성과 자아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공감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만, 이기심, 정욕, 세상욕심 등으로 냄새가 펄펄 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까지 희생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지독한 죄인과 함께 하셨고, 지금도 매일 24시간 365일 함께 하십니다. 때론 기다리시며, 때론 책망하시고, 때론 격려하시고, 때론 깨우치시며, 그 사랑과 겸손을 조금이라도 알도록 도우셨고, 지금도 돕고 계십니다. 나의 영원한 아버지요, 구주요, 목자요, 경배의 왕이요, 참 남편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저의 참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고, 앞으로의 삶도 희망찹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을 감사 찬송합니다.
둘째, 성육신 하신 목적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끔찍한 상황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의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듣고 감격하여 애통하며 눈물로 회개했던 그 날의 감격과 자유를 잊지 못합니다. 그 자유는 창공을 맘껏 날아오르는 새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실낙원 되었던 이 문제 많은 세상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서 값진 피를 흘려 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이 땅에 천국을 세울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자격이 안 되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자격이 있으신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유는 사랑 때문이요, 이 길 밖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그 몸을 찢기고 보혈을 다 쏟으신 이 ‘십자가 복음’이 곧 복음의 감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은혜를 우리가 거듭날 때 한번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이러한 감격과 감동가운데 살며 참 자유를 누리라고 주셨습니다. 신자의 삶은 연륜이 쌓일수록 이 은혜와 감격이 더 새로워지고 더 사실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감격과 감동이 현재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습니까? 그러리라 믿습니다. 반면에, 혹 식어진 가슴을 부여안고, “나는 초 신자가 아니고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가슴이 식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자기를 위로하며 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에베소 교회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첫사랑을 버렸구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3:16).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격과 감동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그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믿되 처음 거듭날 때와 같이 겸손하고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거듭날 때 사람이 갑자기 성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은혜로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수년, 혹은 십 수 년을 목자로 살고 있는데도 이기심과 무정함의 뿌리가 팔수록 나올 때 절망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치명적인 약점은 어쩔 수 없고, 고질병은 안 없어진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살기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이 불신이 우리가 사명인으로 힘 있게 살지 못하게 하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되게 하고, 때로는 원치 않게 복음의 말씀 대해 냉소적이 되게 합니다. 이는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죄 성과 고질병이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능력 앞에 현재적이고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저의 주된 관심이 역사를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본국에서 스탭목자로 40년을 그렇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짐바브웨로 가기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역사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예수님을 배우는 것임을 일깨워주시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분명한 소원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때마다 적나라한 모습으로 말씀 앞에 서게 되었고, 그동안 둔하게 여겼던 제 안의 죄악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속교만, 자기의, 자기사랑, 불신, 자기중심적인 생각, 판단, 사랑치 못하고 축복하지 못하는 죄들이 계속 드러났습니다. 성령님은 저의 죄들이 드러날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을 주셨고, 주님의 보혈이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요즘 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이전보다는 많이 성화됐지만, 그렇게 깨끗지가 않습니다. 이기심, 고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 자기사랑, 건강염려 등이 순번을 바꿔가면서 내면에서 스멀스멀 솟아오릅니다. 찬송가 작사자의 고백처럼 저의 본성은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마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213장(새 423장)을 자주 부르며 삽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 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기준은 선교사인가, 목자인가 하는 타이틀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고, 얼마나 큰 역사를 이뤘는가? 도 아닙니다. 어떤 속마음과 어떤 믿음으로 사는 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큰 종, 사도 바울이 천국에 갈 날이 가깝고 사명을 거의 다 마친 인생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아니 성자가 된 바울이 어떻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가? 젊을 때에는 이 고백이 공감이 잘 안 갔는데, 지금은 공감이 갑니다. 성철 스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은 열반송에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 보다 더 높다.”산 속에서 일생을 고행만 한 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고백했는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절망 중에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는 또한 감격 가운데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24,25)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성자 칭호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많은 참회의 시를 쓴 다윗, 고백록을 쓴 어거스틴,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외친 바울처럼,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이 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회개가 없는 바리새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매 순간 예수님의 피의 복음에 대한 원색적인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감격 가운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복음의 감격을 충만케 회복시켜주시도록 분명한 기도제목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 년 중 최고의 생명의 말씀축제인 여름수양회는 양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리더들에게 더 필요한 것입니다. 부흥은 내 속의 복음의 감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성인 복음화라는 슬로건아래 자칫하면 머리신앙만 자라기 쉽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겠는데 실제로는 마음이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어느새 하나님 대신 자아를 우상으로 섬기며 불신앙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믿지 않고 자기의 경험과 한계적인 생각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도덕적인 행실보다도 무디어진 심령, 교만, 불신 등 영적인 죄가 더 심각합니다. 회개하되 마음 밑바닥까지 갈아엎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빈 마음에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공급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피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확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찬송가도 우렁차게, 싱어롱도 온 힘을 다해, 성경을 읽을 때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아멘, 아멘!’하며 가슴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가슴으로 받아야 생명이 되고, 살이 되고, 삶이 됩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지금도 주의 보혈이 흐릅니다. 강 같이 흐릅니다. 언제나 흐릅니다. 믿고 뛰어 나아가 씻김을 받으면 됩니다. 여러분, 날마다 밤낮으로 믿고 뛰어 나아가 그의 피로 씻음을 받읍시다. 그리하여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며, 그 감격 가운데 살아갑시다.
셋째,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고귀한 피를 쏟으신 것은 우리만 구원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이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회복되고, 본래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모든 사람과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고자 하십니다. 딤전 2:4-6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로마서 10:21절 말씀대로, 죄인들을 향하여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 사람 모두입니다. 여기에는 별별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처럼 잔인한 자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기회주의 자, 이기적인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도 가룟 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무슬림, 힌두, 공산주의자, 식인종,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필요한대로 지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지의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사람 중에도 문란한 사람, 세리 족, 사마리아 족, 중풍 족, 성실한 시몬 족, 모든 사람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우리는 지나친 세리 족, 사마리아 족을 영접하기 참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외시킵니다. 버릇없고,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제외시킵니다. 그러다 보면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분명히 캠퍼스 제자양성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절박하시면 요나를 니느웨 까지 보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잔인한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까지도 멸망치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성육신입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도로 나타나던지 기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요즘 한국 대학생들이 누구보다도 구원이 필요한 이방인들이 됐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서 전도를 하러 캠퍼스에 가기도 합니다. 당연히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하고 적대적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면 목자가 도리어 상처를 받고, 포기하거나,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과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면 힘들어도 이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하는 양이 있다면 남은 며칠 동안에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서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세상을 향해, 불신자들을 향해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담감을 기도로 풀어내야 합니다. 출퇴근 오가면서 이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본 받는 길입니다. 내가 감격이 회복되고 구원의 은혜가 회복될수록 기도제목이 많아집니다. 새벽에 10분 기도하고 기도할 말이 없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도할 것이 더욱 더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게 되겠습니까?
결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령님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리십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가슴에 흐르게 합시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수많은 캠퍼스 청년들, 우리 주변의 사람들, 세상 만민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고통하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고통이요 아픔으로 영접합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번 여름수양회를 모든 목자님들과 양들에게 복음의 감격이 새롭게 임하는 생명의 말씀잔치로 축복해주시도록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할렐루야! (2019.7.21. 이사무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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