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22년 출 19강 파기된 언약의 갱신
페이지 정보

본문
2022년 출애굽기 19강
말씀 | 출애굽기 34:1-35, 40:34-38
요절 | 출애굽기 34:6
파기된 언약의 갱신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사람과의 관계도 바르게 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관계가 풍성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파기될 위기가 있었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심판을 면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서먹서먹한 관계가 회복되도록 애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시고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가운데 들어와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하나님께서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보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여호와라 여호와라고 그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출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여호와라는 뜻과 동일합니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기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말미암으신 분’입니다. ‘스스로 말미암다’를 한자로 표현하면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즉 ‘자유’가 됩니다. 자유가 곧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반역할 수 있어야 자유다.”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인데,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악과 문제는 자유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까지 감수하고자 하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자비’의 원어가 ‘라훔’ 인데 이는 ‘모태’라는 뜻입니다. 즉 진통을 겪고 낳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극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젖먹이 아이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허물과 실수가 있지만 이를 감당하시는 포용력과 용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은혜롭다는 말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회개할 기회를 얻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가치 있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하고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금방 어기고 뒤집어 버립니다. 사람은 쉽게 배반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하지는 않고 삼사 대 까지 영향을 끼치게 하십니다. 이는 연좌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때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죄가 아니었지만 조상들의 죄로 인해서 타국에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죄 짓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자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간구를 합니까?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기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의지하여 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뒤집고 등을 돌린 자들임을 모세는 잘 알고 있으면서 간구합니다. 모세는 그들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담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악을 행했을지라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고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1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겠다고 하셨다가 마침내 다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관계성이 회복되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그들을 위해서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이런 것들만 해도 엄청난 이적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태양이 멈추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아낙 자손들을 이스라엘이 물리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든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언약을 세우면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어야 합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상황에 있을 때 미워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 특히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나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하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질투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때 생깁니다. 사랑의 속성은 독점성, 절대성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질투의 하나님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서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경배하고 섬긴다면 질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혼한 아내와 같이 생각하시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 같이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살 땅도 주셨고 집도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았으니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충실하듯이 그렇게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 남편이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까요? 만일 남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남편은 아내와 자기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아내에 대한 마음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마음과 사랑이 강할수록 다른 남자에게 가는 아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집착할수록 남편은 아내의 조그마한 부정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 사람이 많았고 민족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셨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셨고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오직 이스라엘을 ‘보배’로 삼으셨고 제사장 나라 삼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주지 아니하신 율법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신에게도 절하거나 무엇을 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만일 그런 이스라엘이 다른 신에게 절하고 무엇을 구한다면 여호와는 그런 이스라엘을 용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오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 관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해서 변함이 없으시고 확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기 소유요, 기업으로 삼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마치 호세아서에 기록된 것처럼 음란한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남편 호세아와 같습니다. 질투란 강렬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렬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일을 맡기신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 사람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할지라도 용서하시고 그 사람에게 두신 뜻을 이루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향해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할 일도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제물을 먹으며 사제들과 음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바알 우상 숭배 시에 남자 예배자들은 바알 신전에 여자 제사장과 몸을 섞고, 여자 예배자는 남자 제사장과 몸을 섞었습니다. 이런 악하고 음란한 쾌락의 의식을 철저히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의 풍요와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거룩한 삶과 성숙한 삶을 버릴 까봐 경계하셨습니다.
18-26절에서 하나님은 절기와 안식일 규례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일년에 세 번 즉 무교절, 칠칠절(맥추절), 수장절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때 집을 비웠기 때문에 이방 나라들이 침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 지경을 넓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도록 이런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기를 지키며 광란의 축제를 벌였기 때문에 이런 육신적인 우상축제를 벌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축제를 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문화를 바꾸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상대로 대화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간절한 심정으로 중보기도 했을 때에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모세에게 임재하셨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다시 확립된 그들과의 교제를 입증합니다. 고린도후서3:15,16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할 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발할 것입니다.
35장부터 40:33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방향에 따라 성막을 짓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드린 재료를 가지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을 완성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했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으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구름이 머무르는 날수가 짧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구름이 성막에 내려앉지 않아서 계속해서 사막 길을 걷습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을 달래며 나아가는 데 늦은 밤이 되어서 감사하게도 구름이 내려앉았습니다. 서둘러서 텐트를 치고 아이들을 눕히고, 주변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순간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른다면 어떻게 할까요? 순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인간의 육체적 욕구부터 채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떠오르는 짧은 휴식 시간에도 불구하고 행진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눈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대적이 도사리고 있고,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어디에서 알맞은 안식처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짧은 휴식 속에는 그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 지혜입니다. 각자 생각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될 때에 모두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드는 삶을 통해서 가나안 땅까지 가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 명이면 열 명의 생각, 백 명이면 백 명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몸의 건강 상태 또한 다양합니다. 사막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사람, 그에 반해 사막이 두려움 사람들인 약한 사람들, 즉 노인들, 임산부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들, 연령의 벽들, 건강과 신체 상태를 하나로 조율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결국 눈으로 확인하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놓칠 때 공동체는 분열과 흐트러짐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확인하며 나아간다면 든든한 믿음의 확신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광야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들 중에 강한 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돌보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 기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가득하여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출애굽기의 결론은 노예 백성들이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광야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수기를 통해서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저는 출애굽기 말씀 공부를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으로 노예백성을 감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하지만 하나님께서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며 구도자, 순례자의 길을 걷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34:1-35, 40:34-38
요절 | 출애굽기 34:6
파기된 언약의 갱신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사람과의 관계도 바르게 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관계가 풍성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파기될 위기가 있었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심판을 면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서먹서먹한 관계가 회복되도록 애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시고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가운데 들어와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하나님께서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보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여호와라 여호와라고 그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출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여호와라는 뜻과 동일합니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존재의 기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말미암으신 분’입니다. ‘스스로 말미암다’를 한자로 표현하면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즉 ‘자유’가 됩니다. 자유가 곧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반역할 수 있어야 자유다.”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인데,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악과 문제는 자유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까지 감수하고자 하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자비’의 원어가 ‘라훔’ 인데 이는 ‘모태’라는 뜻입니다. 즉 진통을 겪고 낳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극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젖먹이 아이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허물과 실수가 있지만 이를 감당하시는 포용력과 용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은혜롭다는 말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회개할 기회를 얻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가치 있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하고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금방 어기고 뒤집어 버립니다. 사람은 쉽게 배반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하지는 않고 삼사 대 까지 영향을 끼치게 하십니다. 이는 연좌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때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죄가 아니었지만 조상들의 죄로 인해서 타국에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죄 짓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자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간구를 합니까?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기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의지하여 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뒤집고 등을 돌린 자들임을 모세는 잘 알고 있으면서 간구합니다. 모세는 그들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담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악을 행했을지라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고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1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겠다고 하셨다가 마침내 다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관계성이 회복되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그들을 위해서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이런 것들만 해도 엄청난 이적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태양이 멈추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아낙 자손들을 이스라엘이 물리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든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과 언약을 세우면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어야 합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란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상황에 있을 때 미워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 특히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나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하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질투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때 생깁니다. 사랑의 속성은 독점성, 절대성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질투의 하나님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서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경배하고 섬긴다면 질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혼한 아내와 같이 생각하시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 같이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살 땅도 주셨고 집도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을 알았으니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충실하듯이 그렇게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 남편이 그럴 수도 있지 뭐 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까요? 만일 남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남편은 아내와 자기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아내에 대한 마음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마음과 사랑이 강할수록 다른 남자에게 가는 아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집착할수록 남편은 아내의 조그마한 부정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 사람이 많았고 민족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셨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셨고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오직 이스라엘을 ‘보배’로 삼으셨고 제사장 나라 삼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주지 아니하신 율법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신에게도 절하거나 무엇을 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만일 그런 이스라엘이 다른 신에게 절하고 무엇을 구한다면 여호와는 그런 이스라엘을 용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오직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 관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해서 변함이 없으시고 확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기 소유요, 기업으로 삼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마치 호세아서에 기록된 것처럼 음란한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남편 호세아와 같습니다. 질투란 강렬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렬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일을 맡기신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 사람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할지라도 용서하시고 그 사람에게 두신 뜻을 이루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향해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할 일도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제물을 먹으며 사제들과 음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바알 우상 숭배 시에 남자 예배자들은 바알 신전에 여자 제사장과 몸을 섞고, 여자 예배자는 남자 제사장과 몸을 섞었습니다. 이런 악하고 음란한 쾌락의 의식을 철저히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의 풍요와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거룩한 삶과 성숙한 삶을 버릴 까봐 경계하셨습니다.
18-26절에서 하나님은 절기와 안식일 규례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일년에 세 번 즉 무교절, 칠칠절(맥추절), 수장절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때 집을 비웠기 때문에 이방 나라들이 침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 지경을 넓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도록 이런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기를 지키며 광란의 축제를 벌였기 때문에 이런 육신적인 우상축제를 벌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축제를 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문화를 바꾸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를 보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상대로 대화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간절한 심정으로 중보기도 했을 때에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모세에게 임재하셨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다시 확립된 그들과의 교제를 입증합니다. 고린도후서3:15,16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할 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발할 것입니다.
35장부터 40:33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방향에 따라 성막을 짓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드린 재료를 가지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을 완성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했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으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구름이 머무르는 날수가 짧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구름이 성막에 내려앉지 않아서 계속해서 사막 길을 걷습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을 달래며 나아가는 데 늦은 밤이 되어서 감사하게도 구름이 내려앉았습니다. 서둘러서 텐트를 치고 아이들을 눕히고, 주변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순간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른다면 어떻게 할까요? 순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인간의 육체적 욕구부터 채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떠오르는 짧은 휴식 시간에도 불구하고 행진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눈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일 때가 대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대적이 도사리고 있고,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어디에서 알맞은 안식처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짧은 휴식 속에는 그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 지혜입니다. 각자 생각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될 때에 모두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드는 삶을 통해서 가나안 땅까지 가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 명이면 열 명의 생각, 백 명이면 백 명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몸의 건강 상태 또한 다양합니다. 사막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사람, 그에 반해 사막이 두려움 사람들인 약한 사람들, 즉 노인들, 임산부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들, 연령의 벽들, 건강과 신체 상태를 하나로 조율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결국 눈으로 확인하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놓칠 때 공동체는 분열과 흐트러짐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확인하며 나아간다면 든든한 믿음의 확신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광야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들 중에 강한 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약한 자들을 배려하고 돌보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 기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가득하여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출애굽기의 결론은 노예 백성들이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광야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수기를 통해서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저는 출애굽기 말씀 공부를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으로 노예백성을 감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하지만 하나님께서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며 구도자, 순례자의 길을 걷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