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22년 출13강(22:18-23:19)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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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출애굽기 제 13 강
말씀 | 출애굽기 22:18-23:19
요절 | 출애굽기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계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 성경도 많이 알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으면 나는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시는데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갖춘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십계명을 주시고 그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해설해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씀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가끔 그런 분들이 있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그러면서 이웃하고 관계가 엉망인 분들이 있죠. 그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삶에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지 생각해보며 어제보다는 좀 더 하나님의 백성답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마라(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18-20).” 살려두지 말라. 반드시 죽일지니라. 멸할지니라는 강경한 말씀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무당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악령의 힘과 주술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보이는 여자이고 남자 무당은 박수라고 부릅니다. 무당은 샤머니즘의 제사장입니다. 샤머니즘은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신에게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이사를 잘 하기 위해서, 결혼을 잘 하기 위해서 점을 치고, 굿을 하고, 사주를 보고,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들은 악령의 신비적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자기의 목적 달성, 복 받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인간의 성취가 제 일 순위가 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당을 두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그 영역을 침범합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데 다른 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인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무당을 찾고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울 왕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회개하지 않았을 때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결국 그와 그 자녀들,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들이 거의 몰살을 당하는 처참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내가 교만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고, 죄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구하며 그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로 응답하십니다. 허락한다(Yes), 안돼(No), 기다려(Wait).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은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환경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성행위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확대요, 정욕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신앙 문제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보고에 의하면 이집트를 여행할 때 멘데스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고 있는데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는 수산양과 여자가 성적인 교합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괴한 결합은 분명 종교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간을 통해서 동물이 갖는 힘과 왕성한 생식력을 자신이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이 짐승과 행음하는 자들을 반드시 죽임으로써 인간의 고귀함을 지키고자 하십니다. 오늘날도 변태적인 성행위. 근친상간, 동성애 등, 소수의 성애자들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가증한 일입니까!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도 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 세 가지 죄는 십계명 중에서 제일, 제이 계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우상 숭배가 왜 그렇게 강하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단 한 가지 즉 우상숭배를 행함으로 완전히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숭배하는 이방신 예배가 이스라엘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고, 하나님의 법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가 있기에 이런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과 우상을 따라가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과 우상들의 이념과 가치관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우상 종교냐, 여호와 신앙이냐의 차이는 결국 탐욕과 직결된 소유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존재가 되느냐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따라가는 우상종교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소유에 집착하게 합니다. 반면에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 그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경배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이웃과의 관계도 바르게 됩니다.
둘째, 나그네, 과부, 가난한 자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21-27).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1-24).” 하나님은 과부나 고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자비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약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도 한 가족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그들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악에 받히게 되고 그들이 악에 받히면 생활 범죄가 늘어나게 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야고보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3-17).” 코로나로 어려운 때에 직장을 잃고 어려움을 겪은 선교사님들과 현지인 목자들, 한국의 가정들을 위해서 구제를 했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신들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하고 희생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공동체 안에 사랑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랑이 강물 같이 흐를 때 생명이 살아나고 기쁨이 넘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은 원금을 갚기도 어렵습니다. 카드 빚을 내서 생활을 하다보면 월급을 타서 빚을 갚는 생활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빚은 눈덩어리 굴리듯이 커져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난한 자의 형편을 고려하여 이자를 면제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실 돈을 빌려 줄 수 있을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가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자신도 나그네로서 설움과 아픔을 당하였음을 기억할 때 가난한 자, 나그네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정으로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셋째, 사회적인 강자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재판장을 엘로힘으로 썼고 한글 성경에서도 각주에 하나님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재판장과 지도자에 대한 자세는 곧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도 연결됩니다. 지도자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영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저주가 왜 나올까요? 마음의 교만과 인간적인 야망이 있을 때 그러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지도자를 저주한다면 사탄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여러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리더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맡은 업무의 무게는 말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증언을 할 때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23:1-3)”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말은 잠깐이지만 진실은 영원히 빛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사적 감정으로 정의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방치하여 죽게 하거나 나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져 있는데 원수에 대한 미움 때문에 모른 체 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보복의 천재들입니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복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힘으로 원수 갚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나와 그와의 관계이지 나귀는 밉지도 미움 받지도 않아야 합니다. 나귀가 짐이 무거워 엎드러져 괴로워하는 것은 미움과 상관없는 것이니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원수도 친구로 만들 수 있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무죄로 풀려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명예에 손상을 입고 그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는 경우를 이 땅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불의와 부정의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부당한 판결로 사람이 목숨을 끊었으나 그 가족들은 어디에 호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감정이입까지 다스려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판결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판결하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나라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여섯 해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 백성 중에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합니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사회복지를 실현하고, 자연보호를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일중독, 노동 착취 등을 낳습니다. 사사시대나 왕정시대에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간에 땅이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대하36:21).
넷째, 축제 절기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라. 매년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무교절은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요, 오순절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합니다. 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초막절은광야에서 40년간 지냈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광야생활 할 동안 먹여 주시고 샘물을 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집 마당이나 들판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하나님께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일년에 세 번씩 모임으로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축제를 통해서 긴밀한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겨울 수양회, 부활절 수양회, 여름 수양회, 추수감사절 등을 통해서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 넣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과 법규를 주심으로 그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39,40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와 둘째가 같이 중요하다, 같다는 뜻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같은 걸 말하는 것입니다. 별개가 아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을 수가 없고. 거꾸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점검하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인애가 강물 같이 흐르는 나라를 이루도록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시내산 율법은 에덴으로 돌아가기 위한 출발선입니다. 율법은 끝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22:18-23:19
요절 | 출애굽기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계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 성경도 많이 알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으면 나는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시는데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갖춘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십계명을 주시고 그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해설해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말씀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가끔 그런 분들이 있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그러면서 이웃하고 관계가 엉망인 분들이 있죠. 그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삶에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지 생각해보며 어제보다는 좀 더 하나님의 백성답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마라(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18-20).” 살려두지 말라. 반드시 죽일지니라. 멸할지니라는 강경한 말씀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무당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악령의 힘과 주술로 초인간적인 능력을 보이는 여자이고 남자 무당은 박수라고 부릅니다. 무당은 샤머니즘의 제사장입니다. 샤머니즘은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신에게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이사를 잘 하기 위해서, 결혼을 잘 하기 위해서 점을 치고, 굿을 하고, 사주를 보고,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들은 악령의 신비적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자기의 목적 달성, 복 받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인간의 성취가 제 일 순위가 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당을 두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그 영역을 침범합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데 다른 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인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무당을 찾고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울 왕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회개하지 않았을 때 악령에 사로잡혔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다가오는데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결국 그와 그 자녀들,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들이 거의 몰살을 당하는 처참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내가 교만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고, 죄가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구하며 그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로 응답하십니다. 허락한다(Yes), 안돼(No), 기다려(Wait).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은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환경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성행위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확대요, 정욕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신앙 문제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보고에 의하면 이집트를 여행할 때 멘데스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고 있는데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는 수산양과 여자가 성적인 교합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괴한 결합은 분명 종교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간을 통해서 동물이 갖는 힘과 왕성한 생식력을 자신이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이 짐승과 행음하는 자들을 반드시 죽임으로써 인간의 고귀함을 지키고자 하십니다. 오늘날도 변태적인 성행위. 근친상간, 동성애 등, 소수의 성애자들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가증한 일입니까!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도 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 세 가지 죄는 십계명 중에서 제일, 제이 계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우상 숭배가 왜 그렇게 강하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단 한 가지 즉 우상숭배를 행함으로 완전히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숭배하는 이방신 예배가 이스라엘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고, 하나님의 법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가 있기에 이런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과 우상을 따라가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과 우상들의 이념과 가치관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우상 종교냐, 여호와 신앙이냐의 차이는 결국 탐욕과 직결된 소유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존재가 되느냐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따라가는 우상종교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소유에 집착하게 합니다. 반면에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 그 부르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경배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이웃과의 관계도 바르게 됩니다.
둘째, 나그네, 과부, 가난한 자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21-27).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1-24).” 하나님은 과부나 고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자비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약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도 한 가족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그들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악에 받히게 되고 그들이 악에 받히면 생활 범죄가 늘어나게 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야고보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3-17).” 코로나로 어려운 때에 직장을 잃고 어려움을 겪은 선교사님들과 현지인 목자들, 한국의 가정들을 위해서 구제를 했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신들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하고 희생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공동체 안에 사랑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랑이 강물 같이 흐를 때 생명이 살아나고 기쁨이 넘치고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은 원금을 갚기도 어렵습니다. 카드 빚을 내서 생활을 하다보면 월급을 타서 빚을 갚는 생활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빚은 눈덩어리 굴리듯이 커져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난한 자의 형편을 고려하여 이자를 면제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이 열심히 일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실 돈을 빌려 줄 수 있을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가 성공하기까지 수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자신도 나그네로서 설움과 아픔을 당하였음을 기억할 때 가난한 자, 나그네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정으로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셋째, 사회적인 강자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재판장을 엘로힘으로 썼고 한글 성경에서도 각주에 하나님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재판장과 지도자에 대한 자세는 곧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도 연결됩니다. 지도자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영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저주가 왜 나올까요? 마음의 교만과 인간적인 야망이 있을 때 그러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지도자를 저주한다면 사탄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여러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리더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맡은 업무의 무게는 말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증언을 할 때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23:1-3)”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말은 잠깐이지만 진실은 영원히 빛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사적 감정으로 정의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방치하여 죽게 하거나 나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져 있는데 원수에 대한 미움 때문에 모른 체 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보복의 천재들입니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복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힘으로 원수 갚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것은 나와 그와의 관계이지 나귀는 밉지도 미움 받지도 않아야 합니다. 나귀가 짐이 무거워 엎드러져 괴로워하는 것은 미움과 상관없는 것이니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원수도 친구로 만들 수 있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무죄로 풀려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명예에 손상을 입고 그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는 경우를 이 땅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불의와 부정의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부당한 판결로 사람이 목숨을 끊었으나 그 가족들은 어디에 호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감정이입까지 다스려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판결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판결하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나라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여섯 해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 백성 중에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합니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사회복지를 실현하고, 자연보호를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일중독, 노동 착취 등을 낳습니다. 사사시대나 왕정시대에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간에 땅이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대하36:21).
넷째, 축제 절기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라. 매년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무교절은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요, 오순절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합니다. 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초막절은광야에서 40년간 지냈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광야생활 할 동안 먹여 주시고 샘물을 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집 마당이나 들판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하나님께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일년에 세 번씩 모임으로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축제를 통해서 긴밀한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겨울 수양회, 부활절 수양회, 여름 수양회, 추수감사절 등을 통해서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 넣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과 법규를 주심으로 그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39,40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와 둘째가 같이 중요하다, 같다는 뜻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같은 걸 말하는 것입니다. 별개가 아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을 수가 없고. 거꾸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점검하기 위해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인애가 강물 같이 흐르는 나라를 이루도록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시내산 율법은 에덴으로 돌아가기 위한 출발선입니다. 율법은 끝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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