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21년 출9강(17,18장) 동역
페이지 정보

본문
2021 출애굽기 9 강
말씀 | 출애굽기 17,18장
요절 | 출애굽기 17:11,12
동 역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에서 만나를 체험한 후에 다른 광야인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르비딤은 ‘휴식처’라는 뜻이지만 결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단 물로 바꿀 수 있는 쓴 물도 없고, 아말렉이라는 대적의 공격을 피해 숨어 들어갈 도피처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들은 르비딤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는 의문과 함께 원망하고 다투고 시험할 것인지, 아니면 합심동역해서 원수와 싸울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동역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쓴 물조차 없었습니다. 주위는 바위투성이였고 그 열기로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은 화가 나서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다투었다는 말을 새 번역은 대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백성들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지만 마실 물을 찾지 못하자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도 목이 마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목마름은 차지하고 백성들의 대드는 말을 들을 때 속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그들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더욱 화가 났습니다. 이 화로 인해서 주변은 더욱 달아올랐습니다. 모세가 굉장히 다급했졌습니다. 이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갈 장소를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5,6).”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60만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호렙산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는가를 보여주도록 하셨습니다.
나일 강을 치던 하나님의 지팡이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먹을 수 있는 물을 먹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시원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물을 내려면 물기가 있는 땅을 찾아 그곳을 파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석 위에서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백성들을 책망하는 한 마디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확실히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원망하며 시험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불신의 백성을 참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근시안적인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런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믿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웠습니다. 신25:17,18에 보면 “너희는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라”고 했습니다. 적군은 이스라엘이 피곤할 때에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쳤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데 공동체의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말을 하지 않지만 연약해진 사람들을 우리는 깨어서 돌보아야 합니다. 아말렉의 공격 앞에 이스라엘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모세의 작전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여호수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의 작전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왜 모세는 전쟁터에 나아가 명령하지 않고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올라간 것일까요? 모세의 작전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 장군의 지휘 아래 군사들이 나가 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말렉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온 백성은 당황함이 없이 신속하게 준비하여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일사분란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고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모집된 군사들, 모세와 아론과 훌이 동역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모세는 산 꼭대기에 전투 본부를 설치하고 상황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자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는 영적인 전투입니다. 기도는 쉽지 않은 노동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습니다(눅 22:43,44). 기도 후에 예수님은 담대히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전투현장에서 아군이 승리를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 아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밀렸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를 동역하여 기도의 손을 들었습니다. 외줄은 쉽게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동안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은 혼자서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싸움의 승패가 갈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교사와 메신저를 위한 합심 기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한 하루와 기도하지 않고 바쁘게 뛴 하루를 돌아보면 열매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싸우는 것과 사람의 힘만으로 싸우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기도의 훈련을 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 나아가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자신과 양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사랑하고 섬기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20분 이상 기도해야 합니다. 왜 20분 이상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해 보면 알지만 기도가 터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양들은 목자의 눈물의 기도를 먹고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였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공급하는 사건에는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닛싸’인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의 깃발’의 의미하는 ‘닛씨’가 등장합니다. ‘닛싸’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닛씨’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승리한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것인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승리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합심동역하며 기도할 것인지, 지도자에게 대들며 하나님을 시험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충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확신이 들기까지 기도한 후에 말을 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합심하고, 영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합심 동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아말렉과 같은 세상의 모든 적들과 대대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고, 이 세상도 바꿀 수 있습니다.
18장에는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나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이방인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보지 못했고, 단지 귀로 듣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까지 함께 예배하고 하나가 됨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며 “세상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하여 복을 누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실현되어야 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국제여름수양회나 선교보고대회 등에서 각국의 참석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보고 감격하게 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이드로가 이 모든 일을 보고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17,18).” 그리고 모세에게 방침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중간 지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우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하고, 물질에 대한 자세에서 뇌물을 포함해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세우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고 합니다. 큰 일은 모두 모세에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모세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모세에게 쉬울 것입니다.
천지창조를 하실 때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돕는 배필과 함께함으로 좋았던 것처럼 모세에게도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드로는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신실한 사람들을 세우라고 조언합니다. 특히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조언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들의 통찰력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드로처럼 세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지금 세상이 이루어 놓은 수많은 업적들은 하나님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자원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술들과 물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로 나아간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스마트 폰과 줌 등 IT 기술, 의료기술, 음악과 예술, 미디어, 바닷물을 끌어다가 담수화하여 사막에 물을 대는 기술 등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스타그램과 줌과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학생들에게 전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았습니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사도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자기 역할을 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섬기는 사람, 권면하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롬 12:4-8).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교회에서 동역은 어디서부터 해야 합니까? 직분을 맡은 사람들부터 동역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형제자매들로 이어지고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교회에 주인의식을 갖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가운데 성장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4:11,12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다섯 가지 직분이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는 관사가 하나입니다. 즉 목사와 교사는 같은 사람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가 해야 할 직무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 그게 뭐예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그 다음에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다 목사의 일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일부만이 목사의 일인 것 같습니까? 이제까지는 세 가지 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니까 세 개 다 하는 거죠. 그런데 개역개정에는 “온전하게 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원어에 더 가까워요. ‘ㅁ’을 ‘ㅇ’으로 바꾸었어요. 엄청난 차이죠. 주석의 거의 다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의 주어는 목회자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의 주어는 성도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봉사의 일이다 하는 건, 집사라는 거하고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는 미니스트리로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를 미니스터라고 그러죠? 목양을 하는 것이 누구의 일인가요? 성도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하는 역할이 뭔가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은사를 발견해주고, 훈련시켜서 이분들로 하여금 목양을 하게하고, 이분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역 분담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일, 준비시키는 일, 기도, 말씀, 리더십 발휘하는 것,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이 뿔뿔이 되지 아니하고 공동 목표로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그래요 이거 빼고는 다 성도의 일입니다. 봉사하고 상담하고 양을 치고 구제하는 등 성도는 사역자들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훈련시키어 주고, 말씀전하고, 리더십 발휘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성도들이 사역을 다 뺏겨버립니다. 우리는 요회목자들을 세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요회도 작지만 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은사를 발휘해서 섬길 때 기쁨이 있고 주인의식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각 부와 부장들이 연합해서 교회를 섬길 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동역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합심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도를 주님은 들으시고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합심 동역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교회가 활기를 되찾을 것이고 그때 우리는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 속에 활기가 넘치고 웃음소리가 들리고 불신자들이 우리 모임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로 세움 받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역하여 공동체를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역하여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며 내적으로 성숙해 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17,18장
요절 | 출애굽기 17:11,12
동 역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에서 만나를 체험한 후에 다른 광야인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르비딤은 ‘휴식처’라는 뜻이지만 결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단 물로 바꿀 수 있는 쓴 물도 없고, 아말렉이라는 대적의 공격을 피해 숨어 들어갈 도피처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들은 르비딤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는 의문과 함께 원망하고 다투고 시험할 것인지, 아니면 합심동역해서 원수와 싸울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동역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쓴 물조차 없었습니다. 주위는 바위투성이였고 그 열기로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은 화가 나서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다투었다는 말을 새 번역은 대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백성들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지만 마실 물을 찾지 못하자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도 목이 마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목마름은 차지하고 백성들의 대드는 말을 들을 때 속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그들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더욱 화가 났습니다. 이 화로 인해서 주변은 더욱 달아올랐습니다. 모세가 굉장히 다급했졌습니다. 이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갈 장소를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5,6).”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60만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호렙산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는가를 보여주도록 하셨습니다.
나일 강을 치던 하나님의 지팡이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먹을 수 있는 물을 먹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시원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물을 내려면 물기가 있는 땅을 찾아 그곳을 파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석 위에서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백성들을 책망하는 한 마디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확실히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그들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원망하며 시험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불신의 백성을 참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근시안적인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런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믿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웠습니다. 신25:17,18에 보면 “너희는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라”고 했습니다. 적군은 이스라엘이 피곤할 때에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쳤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데 공동체의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말을 하지 않지만 연약해진 사람들을 우리는 깨어서 돌보아야 합니다. 아말렉의 공격 앞에 이스라엘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모세의 작전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여호수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의 작전은 좀 이상해 보입니다. 왜 모세는 전쟁터에 나아가 명령하지 않고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올라간 것일까요? 모세의 작전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 장군의 지휘 아래 군사들이 나가 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말렉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온 백성은 당황함이 없이 신속하게 준비하여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일사분란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고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모집된 군사들, 모세와 아론과 훌이 동역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모세는 산 꼭대기에 전투 본부를 설치하고 상황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자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는 영적인 전투입니다. 기도는 쉽지 않은 노동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습니다(눅 22:43,44). 기도 후에 예수님은 담대히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전투현장에서 아군이 승리를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 아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밀렸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를 동역하여 기도의 손을 들었습니다. 외줄은 쉽게 끊어지지만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동안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은 혼자서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싸움의 승패가 갈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교사와 메신저를 위한 합심 기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한 하루와 기도하지 않고 바쁘게 뛴 하루를 돌아보면 열매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싸우는 것과 사람의 힘만으로 싸우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기도의 훈련을 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 나아가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자신과 양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사랑하고 섬기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내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20분 이상 기도해야 합니다. 왜 20분 이상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해 보면 알지만 기도가 터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양들은 목자의 눈물의 기도를 먹고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였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공급하는 사건에는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닛싸’인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의 깃발’의 의미하는 ‘닛씨’가 등장합니다. ‘닛싸’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닛씨’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승리한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것인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승리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합심동역하며 기도할 것인지, 지도자에게 대들며 하나님을 시험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충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확신이 들기까지 기도한 후에 말을 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합심하고, 영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합심 동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아말렉과 같은 세상의 모든 적들과 대대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고, 이 세상도 바꿀 수 있습니다.
18장에는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나옵니다. 이드로는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이집트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이방인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보지 못했고, 단지 귀로 듣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까지 함께 예배하고 하나가 됨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며 “세상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하여 복을 누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실현되어야 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국제여름수양회나 선교보고대회 등에서 각국의 참석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보고 감격하게 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이드로가 이 모든 일을 보고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17,18).” 그리고 모세에게 방침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중간 지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우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하고, 물질에 대한 자세에서 뇌물을 포함해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세우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고 합니다. 큰 일은 모두 모세에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모세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모세에게 쉬울 것입니다.
천지창조를 하실 때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돕는 배필과 함께함으로 좋았던 것처럼 모세에게도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드로는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신실한 사람들을 세우라고 조언합니다. 특히 “네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네게 허락하시면 네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조언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들의 통찰력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드로처럼 세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지금 세상이 이루어 놓은 수많은 업적들은 하나님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자원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술들과 물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로 나아간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스마트 폰과 줌 등 IT 기술, 의료기술, 음악과 예술, 미디어, 바닷물을 끌어다가 담수화하여 사막에 물을 대는 기술 등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스타그램과 줌과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학생들에게 전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았습니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까요? 사도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자기 역할을 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섬기는 사람, 권면하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롬 12:4-8).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교회에서 동역은 어디서부터 해야 합니까? 직분을 맡은 사람들부터 동역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형제자매들로 이어지고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교회에 주인의식을 갖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가운데 성장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4:11,12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다섯 가지 직분이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는 관사가 하나입니다. 즉 목사와 교사는 같은 사람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가 해야 할 직무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 그게 뭐예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그 다음에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다 목사의 일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일부만이 목사의 일인 것 같습니까? 이제까지는 세 가지 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니까 세 개 다 하는 거죠. 그런데 개역개정에는 “온전하게 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원어에 더 가까워요. ‘ㅁ’을 ‘ㅇ’으로 바꾸었어요. 엄청난 차이죠. 주석의 거의 다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의 주어는 목회자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의 주어는 성도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봉사의 일이다 하는 건, 집사라는 거하고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는 미니스트리로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를 미니스터라고 그러죠? 목양을 하는 것이 누구의 일인가요? 성도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하는 역할이 뭔가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은사를 발견해주고, 훈련시켜서 이분들로 하여금 목양을 하게하고, 이분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역 분담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일, 준비시키는 일, 기도, 말씀, 리더십 발휘하는 것,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이 뿔뿔이 되지 아니하고 공동 목표로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그래요 이거 빼고는 다 성도의 일입니다. 봉사하고 상담하고 양을 치고 구제하는 등 성도는 사역자들입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훈련시키어 주고, 말씀전하고, 리더십 발휘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성도들이 사역을 다 뺏겨버립니다. 우리는 요회목자들을 세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요회도 작지만 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은사를 발휘해서 섬길 때 기쁨이 있고 주인의식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각 부와 부장들이 연합해서 교회를 섬길 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동역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합심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도를 주님은 들으시고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합심 동역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교회가 활기를 되찾을 것이고 그때 우리는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 속에 활기가 넘치고 웃음소리가 들리고 불신자들이 우리 모임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로 세움 받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역하여 공동체를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동역하여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며 내적으로 성숙해 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