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21년출6강(12:1-13:16) 여호와의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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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출애굽기 공부 6 강
말씀 | 출애굽기 12:1-13:16
요절 | 출애굽기 12:27
여호와의 유월절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유월은 ‘넘어가다’라는 뜻인데,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사람의 집을 넘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 문에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이집트인의 집에서는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친히 제정하시고 인류 구원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위해 흘리신 것임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대대로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양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음으로 온 식구가 함께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 만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첫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이 말씀은 달력을 새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날을 기념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노예로서 죽도록 노동만 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노동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거듭난 날을 생일로 세는 분도 있습니다.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날을 BC와 AD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3-6절에서는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해야 합니다. 양은 너무 어리거나 늙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힘이 가득할 때 죽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에 대한 표현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 양, 그 어린 양, 너희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그것들’이 아니라 ‘그 양’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전체를 통해서 단 한 번도 ‘양들’이라는 복수를 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중에는 단 한 가지만 즉 갈보리의 어린 양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양은 열흘 째 되는 날에 선별되고 열나흗날 해 질 때에 잡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음을 위해 지목되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20)” 그는 30세가 되어서 즉 인간의 책임이 완전히 나타나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바로 그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어린 양을 잡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이요, 피를 뿌린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 믿음의 적용을 말합니다. 유월절의 핵심은 피에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여기에 “회중”이라는 말씀이 처음 나옵니다. 회중은 ‘모임, 공동체’를 뜻하는데 후에는 ‘교회’라는 말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부른 데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로 새로 태어납니다. 성전과 제사장이 있기 전인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어린 양은 각 가족의 가장이 드리는 가족 제사였고 아무도 그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회중이 제사장들이었고, 유월절 제사를 집례했습니다. 이와 같이 유월절의 기원은 신약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의 좋은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동체를 떠나서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각 가족대로 어린 양을 잡도록 했습니다. 식구가 너무 적으면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도록 했습니다. 보통 10명 정도에 어린 양 한 마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많게는 30명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은 자기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시작되었고 가정교회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정교회는 330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할 때까지 성령의 능력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자 사제와 평신도가 구분되고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이나 사역이 제한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부패하고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20세기가 되어 다시 가정교회가 각 대륙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우리도 코로나 기간 동안 가정예배를 회복하고 자녀들의 영적 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가정교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어야 합니다. 함께 먹으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힘을 얻습니다. 피를 문지방에 바르지 않은 것은 그 피가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피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피는 외부의 심판으로부터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분이 이스라엘 사람의 집의 피를 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에선 죽음이 이미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양이 죄 지은 자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습니다. 동일한 죄를 두 번씩이나 처벌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한 가지 빚을 두 번씩이나 갚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처럼 그 위에 피가 뿌려진 집은 안전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복되고 복된 진리입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찬양했습니다. 그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아파트든 문제가 되지 않고 피가 발라져 있는가를 보십니다. 교만한 이성은 피를 문에 발랐다고 해서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질문을 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고전 2:14)”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월절의 희생제물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그 밤에 그들은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삼음과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먹어야 했습니다.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탈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고기는 힘을 주고 생명을 주는 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오신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들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딱딱하고 맛이 없는 빵입니다.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은 죄의 누룩을 제거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안락과 쾌락의 누룩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 누룩은 팽창력이 강해서 쉽게 금방 퍼져 나갑니다. 고린도전서 5:6,7을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할 수 있는 대로 고생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쾌락과 돈 맛을 알고 거기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쓴 나물은 이집트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탐닉할 때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에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됩니다. 또한 쓴 나물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있는 양심의 가책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죄를 기억함이 없이는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받을수록 우리는 주의 율례를 행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얼른 보기에는 쓴 나물 같지만 실상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스피릿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내게 메우신 십자가를 질 때 우리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뚝 끊기고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섬길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자녀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살라야 합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이집트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 즉 공동체를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보통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와 사탄과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탄의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전쟁입니다.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합니다. 군대의 최소 단위는 분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요회 단위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기 위해서 우리는 사역을 분담해야 합니다. 전쟁을 위해서 각자 해야 할 일을 분담하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2).”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할 일을 일러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27).” 여호와께서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에 아들과 딸들이 묻습니다. 아빠 이게 뭐야?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베푸신 구원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린 양이 누구이고, 왜 양 고기를 먹고 피를 의미하는 잔을 마시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데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성만찬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 안에 이루신 구원입니다. 매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놀라운 구원, 그의 역사하심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가 자녀를 제자 양성하였습니다. 삼사 대까지 신앙을 전수할 때 가정에서 제자양성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방식으로 4천년 동안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그들은 머리 숙여 경배하고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을 그대로 영접하고 순종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그 날에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우리는 지나가버릴 이 세상과 그 정욕을 따르는 대신에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즉 가정에서, 요회 모임에서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43-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이방 사람과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그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를 먹을 수 없습니다. 손님은 간식만 먹고, 식구는 함께 식사를 합니다.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입니다.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할례를 받으면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잔치의 참여는 혈통, 지역, 계급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할례가 중요합니다. 할례가 신약시대에는 세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상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적으로는 이방인이요 언약으로는 타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로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엡 2:12,19)” 되었습니다. 권속이란 가족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옛 생활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고 그의 부활과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 가족으로서 함께 밥을 먹고 유월절 잔치인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꺽지 말지며” 유월절에 양이나 염소 고기를 먹는데 그 고기를 집밖으로 내가면 안 됩니다. 또 뼈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뼈를 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뼈가 꺾이고 부서졌다는 것은 잔혹하고, 비참한 저주받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 반대로 뼈가 꺾이지 않고 견고하다는 것은 평안하고 축복받은 상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 뼈가 꺾이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힘이라(요 19:36)”고 사도 요한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나 대신,우리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이집트 사람이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입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였습니다.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이집트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이집트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곡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었습니다. 아이와 여자들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지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서 도망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철저히 정복하고 승리한 군대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은 힘없는 노예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장으로 모신 막강한 군대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죽게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는 내 대신 흘리신 죽음이요,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우리를 얽어맸던 죄의 결박이 뚝 끊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늘 기억하고 오늘 구원을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매일 매일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12:1-13:16
요절 | 출애굽기 12:27
여호와의 유월절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유월은 ‘넘어가다’라는 뜻인데,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사람의 집을 넘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발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 문에 피가 발라져 있지 않은 이집트인의 집에서는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친히 제정하시고 인류 구원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위해 흘리신 것임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대대로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양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음으로 온 식구가 함께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 만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첫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이 말씀은 달력을 새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날을 기념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노예로서 죽도록 노동만 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노동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거듭난 날을 생일로 세는 분도 있습니다.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날을 BC와 AD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3-6절에서는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해야 합니다. 양은 너무 어리거나 늙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힘이 가득할 때 죽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에 대한 표현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 양, 그 어린 양, 너희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그것들’이 아니라 ‘그 양’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전체를 통해서 단 한 번도 ‘양들’이라는 복수를 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중에는 단 한 가지만 즉 갈보리의 어린 양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양은 열흘 째 되는 날에 선별되고 열나흗날 해 질 때에 잡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음을 위해 지목되었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20)” 그는 30세가 되어서 즉 인간의 책임이 완전히 나타나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바로 그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어린 양을 잡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이요, 피를 뿌린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 믿음의 적용을 말합니다. 유월절의 핵심은 피에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여기에 “회중”이라는 말씀이 처음 나옵니다. 회중은 ‘모임, 공동체’를 뜻하는데 후에는 ‘교회’라는 말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부른 데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로 새로 태어납니다. 성전과 제사장이 있기 전인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어린 양은 각 가족의 가장이 드리는 가족 제사였고 아무도 그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회중이 제사장들이었고, 유월절 제사를 집례했습니다. 이와 같이 유월절의 기원은 신약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의 좋은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동체를 떠나서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각 가족대로 어린 양을 잡도록 했습니다. 식구가 너무 적으면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도록 했습니다. 보통 10명 정도에 어린 양 한 마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많게는 30명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은 자기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시작되었고 가정교회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정교회는 330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할 때까지 성령의 능력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자 사제와 평신도가 구분되고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이나 사역이 제한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부패하고 힘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20세기가 되어 다시 가정교회가 각 대륙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우리도 코로나 기간 동안 가정예배를 회복하고 자녀들의 영적 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가정교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어야 합니다. 함께 먹으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힘을 얻습니다. 피를 문지방에 바르지 않은 것은 그 피가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피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피는 외부의 심판으로부터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분이 이스라엘 사람의 집의 피를 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에선 죽음이 이미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양이 죄 지은 자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습니다. 동일한 죄를 두 번씩이나 처벌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한 가지 빚을 두 번씩이나 갚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처럼 그 위에 피가 뿌려진 집은 안전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복되고 복된 진리입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찬양했습니다. 그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아파트든 문제가 되지 않고 피가 발라져 있는가를 보십니다. 교만한 이성은 피를 문에 발랐다고 해서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질문을 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고전 2:14)”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월절의 희생제물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그 밤에 그들은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삼음과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먹어야 했습니다.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탈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고기는 힘을 주고 생명을 주는 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오신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들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딱딱하고 맛이 없는 빵입니다. 무교병을 먹으라는 것은 죄의 누룩을 제거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안락과 쾌락의 누룩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 누룩은 팽창력이 강해서 쉽게 금방 퍼져 나갑니다. 고린도전서 5:6,7을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할 수 있는 대로 고생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쾌락과 돈 맛을 알고 거기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쓴 나물은 이집트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탐닉할 때 주님과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에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됩니다. 또한 쓴 나물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있는 양심의 가책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죄를 기억함이 없이는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받을수록 우리는 주의 율례를 행하게 됩니다. 십자가가 얼른 보기에는 쓴 나물 같지만 실상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스피릿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내게 메우신 십자가를 질 때 우리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뚝 끊기고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섬길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자녀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살라야 합니다.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이집트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켜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 즉 공동체를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보통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와 사탄과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신앙 생활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탄의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전쟁입니다.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합니다. 군대의 최소 단위는 분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요회 단위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기 위해서 우리는 사역을 분담해야 합니다. 전쟁을 위해서 각자 해야 할 일을 분담하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2).”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할 일을 일러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27).” 여호와께서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에 아들과 딸들이 묻습니다. 아빠 이게 뭐야?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베푸신 구원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린 양이 누구이고, 왜 양 고기를 먹고 피를 의미하는 잔을 마시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데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성만찬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 안에 이루신 구원입니다. 매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놀라운 구원, 그의 역사하심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모가 자녀를 제자 양성하였습니다. 삼사 대까지 신앙을 전수할 때 가정에서 제자양성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방식으로 4천년 동안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그들은 머리 숙여 경배하고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을 그대로 영접하고 순종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그 날에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우리는 지나가버릴 이 세상과 그 정욕을 따르는 대신에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즉 가정에서, 요회 모임에서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43-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이방 사람과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그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를 먹을 수 없습니다. 손님은 간식만 먹고, 식구는 함께 식사를 합니다.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입니다.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할례를 받으면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잔치의 참여는 혈통, 지역, 계급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할례가 중요합니다. 할례가 신약시대에는 세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상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적으로는 이방인이요 언약으로는 타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로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엡 2:12,19)” 되었습니다. 권속이란 가족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옛 생활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고 그의 부활과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 가족으로서 함께 밥을 먹고 유월절 잔치인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꺽지 말지며” 유월절에 양이나 염소 고기를 먹는데 그 고기를 집밖으로 내가면 안 됩니다. 또 뼈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뼈를 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뼈가 꺾이고 부서졌다는 것은 잔혹하고, 비참한 저주받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 반대로 뼈가 꺾이지 않고 견고하다는 것은 평안하고 축복받은 상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 뼈가 꺾이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힘이라(요 19:36)”고 사도 요한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나 대신,우리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신 것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이집트 사람이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입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였습니다.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이집트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이집트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곡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었습니다. 아이와 여자들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지 430년이었습니다.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서 도망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철저히 정복하고 승리한 군대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은 힘없는 노예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장으로 모신 막강한 군대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죽게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는 내 대신 흘리신 죽음이요,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우리를 얽어맸던 죄의 결박이 뚝 끊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늘 기억하고 오늘 구원을 경험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믿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매일 매일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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