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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024년 성탄1강(사9:1-7)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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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36회 작성일 24-12-08 12:32

본문

2024년 성탄 1강 
말씀 | 이사야 9:1-7
요절 |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지난 주 대통령이 내린 비상계엄령선포 앞에 온 국민이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6시간 만에 해제가 되어 안도를 하였습니다. 통치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왕은 부족하고 죄악되어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왕이 되십니까? 영원한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평강의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은혜가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8장 19절부터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B.C734년에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반앗수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여기에 동참시키기 위해 친앗수르 정권인 아하스를 폐위 시키러 남유다를 침략합니다(7:1). 유대 왕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가 아람-북이스라엘 동맹군을 쳐부수는 과정에서 아람을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앗수르의 속주로 완전히 편입시키게 됩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 그 중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 백성들은 앗수르의 무서운 폭력과 압제 아래 신음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7장과 8장에서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임마누엘’을 예언하는데, 본문은 그 예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암울한 미래가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선지자는 한 아기로 태어나실 메시아가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이고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가져올 것을 예고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선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인데 완료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700년 뒤에 일어날 일인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스불론과 납달리는 앗수르의 속주가 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약 10여년 후에(B.C722)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백성들은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현재도 어둡고 미래는 더욱 암울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백성들은 큰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소망의 말씀을 믿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대 문제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평판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빌립이 그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1:46)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요7:52).“ 그리고 갈릴리 사람들을 매우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2).” ‘흑암’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흑암’과 같은 단어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는 말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선지자는 천지창조와 같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짙은 어두움 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심각한 무지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과 같이 의미나 어떤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만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흑암 속에 큰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1:9).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에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서 심판의 두려움과 정죄의식에 빠져서 불안하고 근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됩니다. 일생 감당할 사명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으니 사람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복수를 하지 않고자 결단을 하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즐거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창성하게 된다는 것은 백성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십니다.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즐거움’ 혹은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은 자연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것이고,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갖 즐거움 혹은 완전한 즐거움을 나타냅니다. 둘 다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입니다(신28:2-8).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우리가 어디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즐거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하나님이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기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꺾다’는 말은 영어 번역으로 ‘shatter’로, 조각조각 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이 승리와 자유를 ‘미디안의 날’에 비유합니다. ‘미디안의 날’은 단순히 기적적인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이스라엘 땅에 와서 그 땅을 황폐화 시키려고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궁핍할 때(삿6:5,6), 하나님은 므낫세 지파 출신의 두려움이 많은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셨습니다(삿6:12). 그리고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에서 싸우러 온 삼만 명 중에서 삼백 명만 남기시고, 그들을 통해 미디안의 십삼 만 오천 명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스불론 사람들과 납달리 사람들은 직접 이 구원을 체험하였고, 전쟁의 승리로 인한 즐거움을 경험하였습니다. ‘미디안의 날’은 무시 받고 연약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이루시는 큰 구원을 경험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스불론과 납달리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과거 미디안을 이기게 하셨던 것처럼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능히 구원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앗수르를 통해 멸시를 당하게 하시는 것은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살라지게 하십니다. 이는 더 이상 전쟁이 필요 없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넘어 전쟁이 완전히 종식된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쟁이 종식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전쟁이 종식되려면 근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갈등, 오해, 미움, 욕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갈등과 욕심, 싸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싸움과 전쟁이 끝날 수 있을까요?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하나님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불화를 해결해 줄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습니다. 병든 자들의 치료자이셨습니다.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기묘자요 모사이십니다. ‘기묘(奇妙)’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묘사하는 말입니다(시78:12). 예수님은 인격 자체와 존재에 있어서 놀라우신 분, 인간의 생각과 능력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그는 모사이십니다. ‘모사’는 ‘counselor’입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지혜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의 왕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왕은 끊임없이 요구하고 밀려오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자, 고통당하는 약자, 가난한 자들의 하소연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지혜도 있어야 하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이란 ‘גִּבּוֹר,깁보르’로, ‘전사’, ‘영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을 쫓는 애굽의 군대와 친히 싸우셨습니다(출14:24,25). 예수님은 우리를 위협하고 대적하는 세력과 친히 싸워주시는 용사이십니다.

  다음으로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보호자요, 공급자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을 영원히 책임져 주십니다. 

  그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은 손상되지 않은(intactness) 조화롭고(harmony) 온전한 상태(wholeness)를 의미합니다. 평강이 있을 때 그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신과 담대함을 줍니다. 평강은 문제나 어려움이 없어야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옵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이러한 평강을 주시는 분이며 이러한 평강으로 사람들을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을 때, 비록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의 지혜로운 상담과 문제를 해결해 나갈 능력과 평강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사해주신 구주이시오 나를 키우시는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개인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자녀 문제나, 교회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은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주님은 다른 누구보다 바로 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안보 등 모든 영역에서 망가지고 무너진 나라의 통치자가 되어서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가 이 나라에 임하도록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보통 세상의 정권은 무력과 전쟁으로 통치권을 확대해 갑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무력으로 통치권을 확보하려고 하다가 자충수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통치권과 평화가 같이 갑니다. 즉 평화를 통해 그의 통치가 확장됩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이 열흘 동안 붉게 피어있는 경우는 없다는 뜻으로 막강한 권력도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고, 권력누수 현상(lame-duck)을 겪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합니다.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을 정복하였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그의 시종 비서관인 ‘라스 카스’가 기록한 <세인트헬레나 섬의 회상>이라는 책에 보면 나폴레옹이 다음과 같이 구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 시저, 샤를마뉴 그리고 나도 위대한 제국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천재들이 무엇에 기초해서 이런 창조물들을 이뤄 냈는가? 무력이다. 하지만 예수만이 자신의 제국을 사랑에 기초해서 세웠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죽고 있다… 그 누구도 그분과 같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이상이었다….1800년의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그분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취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그것은 철학가가 종종 친구들의 손에 부탁한 것이며,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신부가 신랑에게,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요구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다. 곧 인간의 마음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바치도록 요구한다. 무조건적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그 요구는 즉시 수용된다. 놀라울 따름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모든 능력과 기능을 다해 그리스도의 나라에 합병된다 …엄청난 파괴자인 시간조차도 이 신성한 불꽃을 소멸시킬 능력이 없다. 다시 말해 시간도 그 힘을 고갈시킬 수 없고, 그 범위를 축소시킬 수 없다. 내게는 이것이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다. 자주 이 생각을 했는데, 결국 이 모든 사실이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설명하고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한 이유는 그 나라를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이번 성탄연합예배가 학생들을 초청해서 왕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돕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적 리더들을 세우고,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분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도는 가장 강력한 영적 전쟁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중보기도를 힘써 감당하는 가운데 새로 오신 분들이 왕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앗수르에게 멸시를 당하게 하신 것 또한 교만한 자기 백성을 겸손하게 하셔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 같고 도와주시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심판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기 백성을 다시금 영화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전쟁이 사라지고 정의와 공의가 지배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실 것입니다. 성탄절은 전쟁과 폭력, 불의와 죄가 난무하는 세상을 다스리러 하나님이 한 아기로 오신 날입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려는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신 날입니다. 누구든지 한 아기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겸손하게 영접할 때, 멸시 받던 인생이 영화롭게 되고, 어두운 인생이 밝아집니다. 성탄절에 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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