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017년 성탄 2강(사7:1-25)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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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탄 제 2 강
말씀 | 이사야 7:1-25
요절 | 이사야 7:14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 말씀은 불안한 이 시대에 주시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어머니를 떠난 아이가 분리 불안을 느끼듯이 불안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안한 인간을 먼저 찾아오셔서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풍성해 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고 마음에 평화와 안정과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앗수르가 약해지는 것을 보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조공을 거부하며 남유다에도 이 동맹에 참여하기를 독려했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유다를 정복하여 아하스 왕을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유다를 침공했습니다(참조 왕하 16:5,6; 대하28:16-18). 아람 왕이 심히 많은 무리를 다메섹으로 끌어 오고, 베가는 12만 명을 죽이고 왕의 아들과 총리를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산 위에 있는 요새인지라 그들이 능히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이때가 1차 침공인데 아하스 왕 2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고 다시 2차 침공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시나무 떨 듯이 떤다고 말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서 불안감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집을 떠나야 하고 포로가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핵미사일을 서울을 향해서 쏘고 공격해 온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심히 불안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 이사야 선지자를 그 아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스알야숩은 이사야의 첫째 아들로서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속에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로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보호하고 소망 가운데 키우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세탁소는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아하스와 유다를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쟁 소식을 통해서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십니다. 지금은 깨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둘째, 삼가며 조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삼간다는 것은 신중하라는 뜻입니다. 곧 아하스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아하스는 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기혼 샘에서 물을 예루살렘 성 내로 반입하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사는 히스기야 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지금도 그곳은 관광코스로 개발되어 있습니다. 또 아하스는 앗수르와 연락을 하면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앗수르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그 신의 제단을 복사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세웠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대비하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잠시 연기를 피우다가 곧 꺼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세를 떨칠 수 없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누구를 의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유다 백성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앗수르는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이 굳게 설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26:3,4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가 주신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안전보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자신을 섬기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한마디로 뭐든지 다 구하라는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심고자 이런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요? 기드온은 두 번이나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큰 확신과 믿음을 갖고 전쟁에 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표적을 봐도 그 때뿐입니다.
하나님의 제안에 아하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의 말은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은 교만이요 불순종입니다. 불신과 냉소가 가득합니다. 그는 신명기에 나오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불신 가운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더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믿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대답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 아하스의 태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신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뜬 구름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상숭배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괴롭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라고 했을 때 코웃음을 치는 아하스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에라,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못 참겠다. 네 맘대로 살다가 죽어라”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일방적으로 그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이것은 아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변치 않는 성실이요 은혜입니다. 판단과 정죄를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하스와 같은 죄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14). 이 예언은 중첩예언으로 이사야 시대에 이루어졌고 나중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1-23).” 당시 한 아이의 탄생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아하스와 유다 왕국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징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수많은 징조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큰 징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동정녀를 통해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시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아하스의 눈 앞에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기 전에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예언대로 아람은 2년 후에 완전히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3년 후에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황폐해지고 12년 후에 망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보다 끝까지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길을 갑니다. 이렇게 끝내 믿음보다 불신에 기초해서 살았을 때 그들은 현실적으로 잘 되었습니까? 그들은 남북유다가 나누어진 이래 가장 큰 고통, 수치, 황폐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이 선택한 앗수르가 도와주는 척하다가 변심합니다. 앗수르가 디글랏 빌레셀 때, 산헤립 때 유다를 침공하여 국토를 유린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든지 벌에 쏘이는 것 같습니다. 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앗수르를 의지하였건만 결과는 이렇게 됩니다. 믿음 없이 선택한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런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된 평강을 얻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의지하고 현실적인 대책을 세웁니다. 그렇게 해도 불안과 두려움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두려움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언제 핵전쟁을 도발할지 모릅니다. 미국까지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개발한 북한은 한국은 수분 안에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을지, 졸업은 제 때에 할 수 있을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지, 결혼은 할 수 있을지, 가정은 잘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직장에서 정년 전에 명퇴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리지 않을까, 사기를 당하지 않을까, 낚싯배를 탔다가 익사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런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이 평안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강 같은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임마누엘의 은혜는 어떤 죄인도 참고 섬기는 사랑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참으시고 그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일방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던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참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성마태의 소망 가운데 키우셨습니다. 레위는 후에 이런 자신을 감당해 주신 분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더욱 감격했습니다. 그가 증거한 성탄 메시지의 한마디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하스처럼 수없이 불신에 빠져 지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 회의를 품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며 현실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참아 주십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한해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주시고 임마누엘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은혜로 동역자들을 감당하고 양들을 감당하고 자녀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365일 여러 모양의 근심과 염려 대신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6,7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임마누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볼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위기 상황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21,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여기서 암소와 양이 젖을 많이 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으로도 우유와 거기서 나오는 버터를 사람들이 풍성하게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꿀 역시 들꽃이 황야에서 자라나고 벌이 많이 날아다니므로 풍부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하스에게 준 징표가 실현되는 것입니다(사7:15). 그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또한 농부들은 파괴된 농토에서 수확물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23,24절입니다.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고 하십니다(25). 포도원은 황폐되었고, 단지 가시나무와 덤불이 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땅은 소와 양이 풀을 뜯기에 적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날’은 유다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아하스 왕의 불신앙으로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함으로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극복합니다.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그의 침공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썼을 때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하스나 히스기야가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는가, 신뢰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6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이번 성탄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심으로서 어떤 구원의 은혜가 임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오셔서 어떤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지 살펴보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이사야 7:1-25
요절 | 이사야 7:14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 말씀은 불안한 이 시대에 주시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어머니를 떠난 아이가 분리 불안을 느끼듯이 불안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안한 인간을 먼저 찾아오셔서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풍성해 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고 마음에 평화와 안정과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앗수르가 약해지는 것을 보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조공을 거부하며 남유다에도 이 동맹에 참여하기를 독려했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유다를 정복하여 아하스 왕을 폐위시키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유다를 침공했습니다(참조 왕하 16:5,6; 대하28:16-18). 아람 왕이 심히 많은 무리를 다메섹으로 끌어 오고, 베가는 12만 명을 죽이고 왕의 아들과 총리를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산 위에 있는 요새인지라 그들이 능히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이때가 1차 침공인데 아하스 왕 2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고 다시 2차 침공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시나무 떨 듯이 떤다고 말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서 불안감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집을 떠나야 하고 포로가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핵미사일을 서울을 향해서 쏘고 공격해 온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심히 불안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 이사야 선지자를 그 아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스알야숩은 이사야의 첫째 아들로서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속에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로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보호하고 소망 가운데 키우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세탁소는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서 아하스와 유다를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쟁 소식을 통해서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십니다. 지금은 깨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둘째, 삼가며 조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삼간다는 것은 신중하라는 뜻입니다. 곧 아하스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아하스는 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기혼 샘에서 물을 예루살렘 성 내로 반입하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사는 히스기야 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지금도 그곳은 관광코스로 개발되어 있습니다. 또 아하스는 앗수르와 연락을 하면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앗수르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그 신의 제단을 복사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세웠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대비하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잠시 연기를 피우다가 곧 꺼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기세를 떨칠 수 없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누구를 의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유다 백성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앗수르는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이 굳게 설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26:3,4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가 주신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안전보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자신을 섬기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한마디로 뭐든지 다 구하라는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심고자 이런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요? 기드온은 두 번이나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큰 확신과 믿음을 갖고 전쟁에 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표적을 봐도 그 때뿐입니다.
하나님의 제안에 아하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의 말은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은 교만이요 불순종입니다. 불신과 냉소가 가득합니다. 그는 신명기에 나오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불신 가운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더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믿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대답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 아하스의 태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신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뜬 구름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상숭배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괴롭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라고 했을 때 코웃음을 치는 아하스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에라,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못 참겠다. 네 맘대로 살다가 죽어라”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일방적으로 그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이것은 아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변치 않는 성실이요 은혜입니다. 판단과 정죄를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하스와 같은 죄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14). 이 예언은 중첩예언으로 이사야 시대에 이루어졌고 나중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1-23).” 당시 한 아이의 탄생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아하스와 유다 왕국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징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수많은 징조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큰 징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동정녀를 통해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주시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아하스의 눈 앞에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기 전에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예언대로 아람은 2년 후에 완전히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3년 후에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황폐해지고 12년 후에 망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보다 끝까지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길을 갑니다. 이렇게 끝내 믿음보다 불신에 기초해서 살았을 때 그들은 현실적으로 잘 되었습니까? 그들은 남북유다가 나누어진 이래 가장 큰 고통, 수치, 황폐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이 선택한 앗수르가 도와주는 척하다가 변심합니다. 앗수르가 디글랏 빌레셀 때, 산헤립 때 유다를 침공하여 국토를 유린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든지 벌에 쏘이는 것 같습니다. 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앗수르를 의지하였건만 결과는 이렇게 됩니다. 믿음 없이 선택한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런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된 평강을 얻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의지하고 현실적인 대책을 세웁니다. 그렇게 해도 불안과 두려움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두려움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이 언제 핵전쟁을 도발할지 모릅니다. 미국까지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개발한 북한은 한국은 수분 안에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대학에 잘 들어갈 수 있을지, 졸업은 제 때에 할 수 있을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지, 결혼은 할 수 있을지, 가정은 잘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직장에서 정년 전에 명퇴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리지 않을까, 사기를 당하지 않을까, 낚싯배를 탔다가 익사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런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징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이 평안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강 같은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임마누엘의 은혜는 어떤 죄인도 참고 섬기는 사랑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참으시고 그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일방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던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참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성마태의 소망 가운데 키우셨습니다. 레위는 후에 이런 자신을 감당해 주신 분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더욱 감격했습니다. 그가 증거한 성탄 메시지의 한마디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하스처럼 수없이 불신에 빠져 지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 회의를 품고 두려워하고 낙심하며 현실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참아 주십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한해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감당해주시고 임마누엘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임마누엘의 은혜로 동역자들을 감당하고 양들을 감당하고 자녀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365일 여러 모양의 근심과 염려 대신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6,7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임마누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볼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위기 상황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21,2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여기서 암소와 양이 젖을 많이 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으로도 우유와 거기서 나오는 버터를 사람들이 풍성하게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꿀 역시 들꽃이 황야에서 자라나고 벌이 많이 날아다니므로 풍부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하스에게 준 징표가 실현되는 것입니다(사7:15). 그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또한 농부들은 파괴된 농토에서 수확물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23,24절입니다.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고 하십니다(25). 포도원은 황폐되었고, 단지 가시나무와 덤불이 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땅은 소와 양이 풀을 뜯기에 적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날’은 유다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아하스 왕의 불신앙으로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함으로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극복합니다.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그의 침공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썼을 때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하스나 히스기야가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는가, 신뢰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6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이번 성탄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심으로서 어떤 구원의 은혜가 임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오셔서 어떤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지 살펴보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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