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011년 이사야 5강(6:1-13)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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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사야서 제 5 강
말씀 이사야 6:1-13
요절 이사야 6:8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택하심을 받아서 쓰임 받는 것이야말로 은혜입니다. 그 일은 고귀합니다. 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일은 고결하고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말씀을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또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말씀을 듣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은 참으로 복된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 시간 이사야의 부르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성전에 갔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 나라의 경제, 국방, 외교는 튼튼해졌습니다. 이웃 나라들이 유다에 조공을 바치고 애굽 변방에까지 그의 이름이 미쳤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는 온통 조종 소리로 무거웠습니다. 이때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이사야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까? 그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보좌는 왕좌를 의미하는데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초월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가 보좌에 앉았다는 것은 재판장으로서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은 성전에 영광과 위엄이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웃시야 왕이 죽어서 유다의 미래가 암담해지게 되었지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이사야의 마음에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세상 나라와 역사를 움직이고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인간에 의해서 역사와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됩니다. 역사는 사람을 통해서 진행되지만 사람을 세우시고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십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진실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일생동안 선지자로서 살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 때 시대가 어려워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열매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또 본 것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면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스랍이란 문자적으로는 “불타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지니고 있고, 얼굴과 발을 가진 것을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며 찬양했습니다. 당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회도 타락하고 종교도 부패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인간의 죄악을 볼 때에 낙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이 세상을 정화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 세상 속에서 청빈한 삶,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참되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인생의 참다운 회개와 결단이 이뤄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언제 변화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 앞에 주눅 들기보다 주의 존전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참 왕이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국가의 운명, 자신의 장래가 지상 왕과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담대하게 이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갖게 될까요?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이사야는 자신을 깊이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회개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정은 거룩함과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부정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죄와 악함이 입술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종은 말의 사람입니다. 그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낙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고결하고 살아 있는 말, 영적인 말, 성령 충만한 말을 하기 위해서 성령의 불로 부정한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사회의 비리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사회의 흐름을 따라 살면서 부정하게 되었음을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푸른 초원에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로이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황소들은 잠을 잘 때나, 풀을 뜯을 때도 꼭 붙어서 지냈습니다. 가끔 맹수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서로 몸을 붙이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초원의 사자 한 마리가 호시탐탐 황소를 노렸습니다. 황소 네 마리를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황소를 흩어 놓으면 차례차례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느 날 사자가 무리에서 조금 이탈한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 그러자 표정이 싹 변했습니다. 사자는 다른 황소들의 귀에 같은 내용으로 속삭였습니다. 그 때부터 황소들은 아주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 마리가 자신을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소들은 이제 풀을 뜯을 때도 서로 멀찍이 떨어졌습니다. 잠을 잘 때도 네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황소들의 마음에는 불신의 씨앗이 점점 커졌습니다. 사자는 우정에 금이 간 황소들을 한 마리씩 공격하여 네 번의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의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도우실 때에 다른 것 보다 입술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1장에서 진홍같이 붉은 죄를 희게 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이 이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하십니다. 그는 판단과 정죄가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변화가 되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긍휼의 마음을 가진 성경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회복의 메시지를 40년에 걸쳐서 증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백성들에게 책망과 함께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도 믿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을 통해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그 죄와 악이 사함을 받고 나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일방적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심으로 이사야의 자발적인 헌신을 원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죄사함을 받으니 이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가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의 영이 살아나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렸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 속에서 들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말을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의 말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듣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자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비롯하여 양심의 소리까지 들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적들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찬성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도 듣고 반대하며 부정하는 자들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듣고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다방면으로 분석합니다. 진리와 진실을 분별하여 말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일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열정이 생기고 어려운 시대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을 때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될 때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공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청년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에로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는 계산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지 않고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청년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발적으로 또 충성스럽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한국 캠퍼스에는 복음을 전하고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맡길 일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형태는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목자님을 통해서 부르시기도 합니다. 마음에 성령의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군 제대를 코앞에 두고 팀 스피릿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대하고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인생을 주님께 맡긴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전요한 목자님을 통해서 인턴 훈련을 받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대하자마자 바로 센터로 와서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을 받다가 캐나다 선교사로 나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당시 공산권에 선교사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해서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내가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계속해서 개척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우리 UBF는 선교사의 52%가 북미 개척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센터는 주일 예배보다 선교사가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목자님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길을 열어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쓰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지금 초등학생의 5%만이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응답했습니다. 선교 역사를 볼 때 50년 이내에 한국은 영국과 같이 선교사 파송국가에서 피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라도 CBF, JBF 역사가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이때 복음을 확실하게 심지 않으면 대학에 가서 조용히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CBF, JBF 들도 전도해서 친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동교 UBF는 올해 더욱 3000명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캠퍼스가 영적으로 황무한 상태임을 직시하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제자 양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 다 같이 이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백성이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겼습니다. 이사야가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할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무지하고 완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어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못 깨닫는다고 하면 더 열심히 깨닫고자 합니다. “너는 깨닫기 어려울 거야, 너희들은 예수님을 모를 것이야”라고 말하면 더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마음을 분하게 하여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가서 말씀을 전하라.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우리는 가야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기와 가족에게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의 상태에 대해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했습니다. 존 캘빈이 말한 바와 같이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심판의 제 일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탄식조로 물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했습니다. 백성들의 완악함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이 땅이 황폐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영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대학생들을 제자 삼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일을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100명에게 복음을 전해서 한 명이 남을 지라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니 천명에게 전해서 한 명이 남을 지라도 제자양성을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자를 세울 때 그 한 명이 천명의 몫을 할 것입니다. 남은 자,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다고 그 수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사람, 충성된 사람, 소망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해서 친히 자신의 일을 하신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세계만민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남은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이 시대의 희망은 남은 그루터기들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이 땅의 남은 자들이요 그루터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제 다음 주에 졸업식과 입학식이 있고 나면 캠퍼스에는 신입생들로, 새로운 얼굴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말씀 이사야 6:1-13
요절 이사야 6:8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택하심을 받아서 쓰임 받는 것이야말로 은혜입니다. 그 일은 고귀합니다. 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일은 고결하고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말씀을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또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말씀을 듣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은 참으로 복된 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 시간 이사야의 부르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성전에 갔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 나라의 경제, 국방, 외교는 튼튼해졌습니다. 이웃 나라들이 유다에 조공을 바치고 애굽 변방에까지 그의 이름이 미쳤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는 온통 조종 소리로 무거웠습니다. 이때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이사야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까? 그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보좌는 왕좌를 의미하는데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초월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가 보좌에 앉았다는 것은 재판장으로서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은 성전에 영광과 위엄이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웃시야 왕이 죽어서 유다의 미래가 암담해지게 되었지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이사야의 마음에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세상 나라와 역사를 움직이고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연약한 인간에 의해서 역사와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됩니다. 역사는 사람을 통해서 진행되지만 사람을 세우시고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십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진실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일생동안 선지자로서 살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 때 시대가 어려워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열매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또 본 것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면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스랍이란 문자적으로는 “불타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지니고 있고, 얼굴과 발을 가진 것을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며 찬양했습니다. 당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회도 타락하고 종교도 부패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인간의 죄악을 볼 때에 낙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이 세상을 정화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 세상 속에서 청빈한 삶,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참되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인생의 참다운 회개와 결단이 이뤄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언제 변화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 앞에 주눅 들기보다 주의 존전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참 왕이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국가의 운명, 자신의 장래가 지상 왕과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담대하게 이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는 사람은 어떤 자세를 갖게 될까요?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이사야는 자신을 깊이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회개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정은 거룩함과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부정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죄와 악함이 입술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종은 말의 사람입니다. 그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낙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고결하고 살아 있는 말, 영적인 말, 성령 충만한 말을 하기 위해서 성령의 불로 부정한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사회의 비리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사회의 흐름을 따라 살면서 부정하게 되었음을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푸른 초원에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로이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황소들은 잠을 잘 때나, 풀을 뜯을 때도 꼭 붙어서 지냈습니다. 가끔 맹수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서로 몸을 붙이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초원의 사자 한 마리가 호시탐탐 황소를 노렸습니다. 황소 네 마리를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황소를 흩어 놓으면 차례차례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느 날 사자가 무리에서 조금 이탈한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 그러자 표정이 싹 변했습니다. 사자는 다른 황소들의 귀에 같은 내용으로 속삭였습니다. 그 때부터 황소들은 아주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 마리가 자신을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소들은 이제 풀을 뜯을 때도 서로 멀찍이 떨어졌습니다. 잠을 잘 때도 네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황소들의 마음에는 불신의 씨앗이 점점 커졌습니다. 사자는 우정에 금이 간 황소들을 한 마리씩 공격하여 네 번의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의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도우실 때에 다른 것 보다 입술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1장에서 진홍같이 붉은 죄를 희게 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이 이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하십니다. 그는 판단과 정죄가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변화가 되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긍휼의 마음을 가진 성경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회복의 메시지를 40년에 걸쳐서 증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백성들에게 책망과 함께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도 믿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을 통해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그 죄와 악이 사함을 받고 나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일방적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심으로 이사야의 자발적인 헌신을 원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죄사함을 받으니 이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가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의 영이 살아나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렸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 속에서 들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말을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의 말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듣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자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비롯하여 양심의 소리까지 들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적들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찬성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도 듣고 반대하며 부정하는 자들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듣고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다방면으로 분석합니다. 진리와 진실을 분별하여 말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일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열정이 생기고 어려운 시대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을 때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될 때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공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청년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에로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는 계산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지 않고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청년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발적으로 또 충성스럽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한국 캠퍼스에는 복음을 전하고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맡길 일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형태는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목자님을 통해서 부르시기도 합니다. 마음에 성령의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군 제대를 코앞에 두고 팀 스피릿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대하고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인생을 주님께 맡긴다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전요한 목자님을 통해서 인턴 훈련을 받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대하자마자 바로 센터로 와서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을 받다가 캐나다 선교사로 나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당시 공산권에 선교사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해서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내가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계속해서 개척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우리 UBF는 선교사의 52%가 북미 개척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센터는 주일 예배보다 선교사가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목자님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길을 열어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쓰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지금 초등학생의 5%만이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응답했습니다. 선교 역사를 볼 때 50년 이내에 한국은 영국과 같이 선교사 파송국가에서 피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라도 CBF, JBF 역사가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이때 복음을 확실하게 심지 않으면 대학에 가서 조용히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CBF, JBF 들도 전도해서 친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동교 UBF는 올해 더욱 3000명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캠퍼스가 영적으로 황무한 상태임을 직시하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제자 양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 다 같이 이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백성이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겼습니다. 이사야가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할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무지하고 완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어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못 깨닫는다고 하면 더 열심히 깨닫고자 합니다. “너는 깨닫기 어려울 거야, 너희들은 예수님을 모를 것이야”라고 말하면 더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마음을 분하게 하여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가서 말씀을 전하라. 그들이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우리는 가야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기와 가족에게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의 상태에 대해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했습니다. 존 캘빈이 말한 바와 같이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심판의 제 일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탄식조로 물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했습니다. 백성들의 완악함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이 땅이 황폐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영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대학생들을 제자 삼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일을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100명에게 복음을 전해서 한 명이 남을 지라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니 천명에게 전해서 한 명이 남을 지라도 제자양성을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자를 세울 때 그 한 명이 천명의 몫을 할 것입니다. 남은 자,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많다고 그 수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사람, 충성된 사람, 소망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해서 친히 자신의 일을 하신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세계만민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남은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이 시대의 희망은 남은 그루터기들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이 땅의 남은 자들이요 그루터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제 다음 주에 졸업식과 입학식이 있고 나면 캠퍼스에는 신입생들로, 새로운 얼굴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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