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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010년 성탄2강(사9:1-7) 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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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946회 작성일 10-12-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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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 제 2 강                                                        말씀 이사야 9:1-7요절 이사야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탄절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없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배우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지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BC732년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병합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멸시를 당했고 환난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통치 하에 그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어졌습니다.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빌립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처음에는 조롱했습니다(요1:46).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를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깊은 상처를 씻는 길은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큰 빛이 흑암이 가득하던 곳, 죽음의 그늘진 땅에 비추이기 때문입니다. 큰 빛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태양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자연스럽게 물러납니다.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게 되면 어디가 길인지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탐구할 때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불교 철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고의 결과인데 결국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으로 결론이 지어집니다. 인간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인생도 허무한 존재로 귀결이 됩니다.  그런데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삶의 존재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살펴보면 멸시받고 흑암 가운데 있던 자들을 찾아가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특히 열두 제자 중에서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스불론과 납달리 출신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에 빛을 받고 인류의 스승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던 어부들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남들이 가는대로 가지 못하면 절망을 합니다. 서로 경쟁하느라 피곤한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평범한 학생인데 1등을 하기 원하는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죽어라 공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등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서를 썼습니다. “엄마, 나 일등했어. 일등한 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기뻐해줘. 나는 계속 일등할 자신이 없어.”라는 내용입니다. 1등의 비애입니다. 직장에서 항상 일등하던 삼성 부사장이 자살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등을 하던 사람이 2등을 하고, 자신의 위치가 추락하면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다양한 것입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하면서 산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십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3,4).” 추수하는 즐거움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약을 치고, 잡초를 뽑아내고 작물에 정성을 쏟아 가꾸면서, 가을에 추수함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추수할 때는 이제까지의 모든 수고와 눈물을 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서 태양 빛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심으로 씨가 자라서 싹이 트고 열매로 자라 추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사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5000천년 역사에서 지금같이 풍요롭고 나라의 위상이 높아진 때가 없었습니다. G20 회의를 개최하고 다른 나라들이 한국을 모델로 삼아서 성장하고자 합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 군사, 문화 분야에서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이렇게 창성하게 하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이런 모든 축복이 어떻게 주어지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는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시오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그 백성을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십니다. 모든 만물도 그의 통치 아래 굴복하고 만유의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는 이때까지 왕이요 통치자요 주권자로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그는 기묘자이십니다. 기묘자란 잘 이해할 수 없는 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초월자로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만 생각해 보아도 신비합니다. 그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의 역사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출생의 신비에 대해서 기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배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대 학자들과 어린 나이에 토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나셨는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간이신 그의 본체를 우리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기묘한 분이십니다. 

  둘째, 그는 모사이십니다. 모사란 왕이나 장군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를 때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많은 시험을 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세금문제로 옭아매고자 바리새인들이 나왔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은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22:17-22).

  바리새인들이 꼼짝을 못하고 물러나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상한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남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붙잡아 와서 이 여자가 간음 중에 잡혔는데 모세의 글에는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서 시험할 때에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고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 물러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모략과 재능의 영으로 충만하십니다. 그는 지혜자 중의 지혜자이십니다. 그의 지혜를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그는 상담자이십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코치이십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좋은지 모를 때 그에게 간구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그는 지혜가 충만하십니다. 약1:5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셋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요2:24). 그러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과 같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은 지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또한 그는 창조주로서 천지 창조를 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골1:16)”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도마는 지독한 회의주의자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그 손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셨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기록한 계시록에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기록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3-14).”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제는 우리 가운데서 재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무너진 창조의 역사를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지상에 계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믿고 올 해 건축 역사를 이루었고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울며 구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백성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하십니다. 한 목자님은 학생시절 바쁜 의과대학 공부를 하면서도 소감 모임과 말씀 공부를 절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의사 국가고시를 앞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학과 친구들은 공부 진도가 자기보다 한참을 나가고 있는데 공부하다 말고 일어서서 팀과 소감 모임에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국가의사고시에서 찍었던 문제들이 다 맞아서 전국 1등으로 의사고시를 패스했습니다.   
  넷째,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여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몰라서 가정을 이루고 나서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의 외도와 그로 인한 상처로 고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권위적이어서 대화를 하지 못하고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령 아버지가 오랫동안 살아 계시다 해도 깊은 대화와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버지 학교가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버지 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신부를 파더(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3:9절에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영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왕, 전사, 스승, 친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필요를 공급하고 안전하게 해야 합니다. 전사는 악으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하고 영역을 넓히는 것입니다. 스승은 훈련하고 교육하는 역할입니다. 친구는 대화하고 교제하며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합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아버지를 7살 때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나서 밤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별들을 보았습니다.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섬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또 저는 목자님들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목자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그런 위치가 되었습니다. 제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잘 배우고 목자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자는 아버지 상을 가장 많이 닮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울 때 아버지 역할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탕자를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 탕자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아버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달려 나가 영접해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는 엄한 듯하면서도 다정하고, 어려운 듯하면서도 편안한 아버지, 자랑스럽고 마지막 보루처럼 든든하면서도 언제든 투정부릴 수 있는 여유가 보이고, 무심한 듯 초연해도 돌아보면 언제나 곁에 와 있는 푸근한 그림자.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꿈입니다. 성경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344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거듭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그의 형상을 닮기까지 훈련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다섯째, 그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먼저 그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근심하고 염려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리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그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되 환란 가운데서 평강을 누리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평강이 남북한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나라의 여야 사이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슬픈 마음이 있는 분들의 마음에도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아기의 모습으로 보내셨는지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죄인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 편에서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늘 자기 생각, 자기 판단만 최고라고 여기는 착각에 빠져삽니다. 죄인들은 서로 아기의 위치에 서고자 하지 않고 어른의 위치에 서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에 겸손과 평화의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아기는 약하지만 그 본체는 엄청나게 강합니다. 죄인들 사이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해결 방안은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없이 약하신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심으로 도움을 청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사 함께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기자고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일을 다 하시지 않고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연약함이 능력이 되는 역설을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한 아기 예수님은 사실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아십니다. 그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성장하십니다. 그의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듯이 그의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는 다윗이 왕좌와 그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열심을 내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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