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2018 요일5강(5:1-21) 세상을 이기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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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제 5 강
말씀 | 요한일서 5:1-21
요절 | 요한일서 5:4,5
세상을 이기는 믿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오늘 말씀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 사랑이 5번 나옵니다. 1-4장까지 주로 사랑에 관한 메시지가 흐르다가 5장에서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기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 승리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형제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4:19)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계명들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 사랑이 어렵다고 고백합니다. 왜 어려울까요? 나와 형제의 죄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업무상 부딪치기 때문에 동료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선교지에서도 동역을 해야 하는 분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싸우는 이유가 많이 있지만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이해 받으려고 하고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않고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말고 상대편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대화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섬김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스킨십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여기나요? 여러분의 남편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받기 원하나요? 여러분의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격려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섬기다보면 사랑도 자랍니다. 사랑할 때 어떤 의무도 힘겹지 않고 어떤 수고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데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세상을 이기는 근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죽음도 부활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을 세상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전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기업을 받기도 하고, 믿음으로 약속을 받고 죽은 것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교도관으로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별명이 ‘싸늘한 태양’, ‘지옥에서 온 박주임’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부모와 형수들을 죽인 사형수 ‘호성’이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살인마를 변화시켜 순한 양이 되게 했습니다. 사랑이 흉악범을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선을 행함으로 원수를 갚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고 실패도 하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환난과 각종 어려움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키고, 피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고, 성령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물은 씻는 것이요 피는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의 하신 일을 증거하고 우리로 믿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확실한 증거로 그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증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로부터 증거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입니다(10). 불신은 측은히 여길 불행이 아니라 개탄해야 할 죄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행 1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율법을 흠없이 지키셨고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려는 것입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삼겠습니까?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만큼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여러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의 뜻대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까, 안들으십니까? 당연히 들으십니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영생을 얻은 줄을 또한 알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아들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에게는 또한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깊이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씀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예화입니다. 교회가 옆에 있는 유흥업소로 인해서 시끄럽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유흥업소가 망하도록 기도했는데 정말 그 옆집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이 교회가 기도한 것을 알고 소송을 했습니다. 교회 대표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했을 뿐이다. 우리가 기도해서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그러자 업소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그렇게 되었다.” 판사의 판결은 이러했습니다. “교회는 믿음이 없다, 업소 측이 오히려 믿음이 있다.”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응답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기도합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한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방서식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급한 불만 끄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갑자기 열심히 기도하고 끝나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를 범하는 형제를 보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도록 그리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위해서는 기도해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위해서는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마지막 권면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공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잘 먹혀들어가는 승리주의, 번영의 복음, 성공의 복음을 추구합니다. 기독교는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세력 있는 자들 또한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이 한 사람의 일생의 목적이 되면 행복은 사라져버립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자신들의 행복이 아닌 다른 어떤 목적에 맞추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본주의 우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도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 우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이 시대의 우상은 소비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이런 현대판 우상들로부터 돌이켜야 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인간 문제의 주변에서 맴도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인간 문제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일서 5:1-21
요절 | 요한일서 5:4,5
세상을 이기는 믿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오늘 말씀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 사랑이 5번 나옵니다. 1-4장까지 주로 사랑에 관한 메시지가 흐르다가 5장에서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기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 승리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형제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4:19)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계명들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 사랑이 어렵다고 고백합니다. 왜 어려울까요? 나와 형제의 죄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업무상 부딪치기 때문에 동료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선교지에서도 동역을 해야 하는 분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싸우는 이유가 많이 있지만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이해 받으려고 하고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않고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말고 상대편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대화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섬김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스킨십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여기나요? 여러분의 남편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받기 원하나요? 여러분의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격려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섬기다보면 사랑도 자랍니다. 사랑할 때 어떤 의무도 힘겹지 않고 어떤 수고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데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세상을 이기는 근원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죽음도 부활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을 세상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전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기업을 받기도 하고, 믿음으로 약속을 받고 죽은 것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교도관으로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별명이 ‘싸늘한 태양’, ‘지옥에서 온 박주임’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부모와 형수들을 죽인 사형수 ‘호성’이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살인마를 변화시켜 순한 양이 되게 했습니다. 사랑이 흉악범을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선을 행함으로 원수를 갚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고 실패도 하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환난과 각종 어려움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키고, 피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고, 성령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물은 씻는 것이요 피는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의 하신 일을 증거하고 우리로 믿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확실한 증거로 그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증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로부터 증거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입니다(10). 불신은 측은히 여길 불행이 아니라 개탄해야 할 죄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행 1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율법을 흠없이 지키셨고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려는 것입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삼겠습니까?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만큼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여러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의 뜻대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까, 안들으십니까? 당연히 들으십니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영생을 얻은 줄을 또한 알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아들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에게는 또한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깊이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씀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예화입니다. 교회가 옆에 있는 유흥업소로 인해서 시끄럽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유흥업소가 망하도록 기도했는데 정말 그 옆집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이 교회가 기도한 것을 알고 소송을 했습니다. 교회 대표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했을 뿐이다. 우리가 기도해서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그러자 업소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그렇게 되었다.” 판사의 판결은 이러했습니다. “교회는 믿음이 없다, 업소 측이 오히려 믿음이 있다.”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응답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기도합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한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방서식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급한 불만 끄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갑자기 열심히 기도하고 끝나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를 범하는 형제를 보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도록 그리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위해서는 기도해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위해서는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마지막 권면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공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잘 먹혀들어가는 승리주의, 번영의 복음, 성공의 복음을 추구합니다. 기독교는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세력 있는 자들 또한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이 한 사람의 일생의 목적이 되면 행복은 사라져버립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자신들의 행복이 아닌 다른 어떤 목적에 맞추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본주의 우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도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 우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이 시대의 우상은 소비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이런 현대판 우상들로부터 돌이켜야 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인간 문제의 주변에서 맴도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인간 문제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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