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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서 2018 요일4강(4:1-21)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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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회 작성일 18-10-14 13:19

본문

2018 요한일서 제 4 강
말씀 | 요한일서 4:1-21 
요절 | 요한일서 4:7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본문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이 30번, 사랑이 31번 나옵니다. 지난 3장에서는 사랑이 11번 나왔는데 4장에서는 그 세 배가 많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13장이 사도 바울의 사랑장이라면 요한일서 4장은 사도 요한의 사랑장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7-12절에서는 형제 사랑을 빛과 관련시켜 말씀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두움에 거한다고 말씀했습니다. 3:11-18에서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의 세계 속에 사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합니다. 4장에 와서는 형제 사랑을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시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더 친밀해지지만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다양하고 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사랑해야하는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축복이 있는지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4:1-6)

  우리는 이단들도 사랑하고자 힘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 키우기가 힘들자 어떤 이단들은 아기 엄마들을 위한 포섭 작전으로 아이 봐주는 일을 합니다. 그들도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신령하다고 해서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하라는 말씀은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즉 검사 후에 진짜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라고 다 돈이 아니듯이,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에도 위조지폐가 있습니다. 사랑을 해도 진실한 사랑,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거짓된 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들을 분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거짓의 영에 기초한 사랑은 받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다 믿는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되고 의로운 사람이신 그 중보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교묘한 전략과 속임수와 교세가 확장되는 것을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고 거짓말을 모략의 한 가지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 거짓은 잠시 잠깐만 통합니다. 진실과 진리는 영원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보다 크시고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II. 서로 사랑하자(4:7-21)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서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7,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저자 요한은 왜 이렇게 사랑을 강조할까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세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관한 시험, 사랑에 관한 시험,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믿는 진리에 대한 시험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난무하면 이를 이기기 위해서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해야겠지만 실제 생활에서 신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악한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교리적인 것은 정통인데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판단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사탄의 공격에 노출되고 맙니다. 사랑은 사람을 격려하고 서로를 끈으로 묶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의 공격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방어하고 그 다음에는 사랑으로 방어를 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보호하심을 깊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 안에 거하게 됨으로 추진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이 사랑이기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은사로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요, 셋째는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바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10).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빚을 지면 빨리 갚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져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진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영원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내 이웃을 차별하거나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적까지도 사랑합니다. 벗이냐 적이냐 하는 차별은 사랑의 대상을 두고서 하는 차별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인 이상 적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원수 사이인 경우에는 거의 마주 바라보는 것조차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대의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의 적도 그대의 이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눈을 감고 그대는 사랑해야만 한다는 계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에 따르는 유혹을 이김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1-9).”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대감 역시 차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믿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로써 보이는 것을 제거한다고 믿습니다. 이 둘이 다 믿음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보임에도 불구하고 제거됐다고 믿는 사랑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은 사랑을 받은 만큼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을 주고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역동성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았고 율법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파멸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고 그 율법을 파멸시키셨습니다. 또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마치 갈증이 충족되었을 때는 상쾌감만 존재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라는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의 시간이나 도움이나 봉사나 응답하는 사랑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요구한 것은 상대방의 이익뿐이고 오로지 상대방을 위해서만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법에 순종하려면 자기 부정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신을 부정할 때 자유로운 가운데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압니다(12). 즉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지만 때로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님께 듣습니다. 우리는 나의 상처와 감정을 넘어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도권을 내가 갖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지만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줌으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오뎃사의 이요한 선교사님은 선교지로 나아갔는데 하바롭스크에서 경찰에게 잡혀서 죽도록 맞고 돈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사랑하러 왔는데 이렇게 매를 맞고 나니 사랑할 마음이 사라지고 총을 사서 자기를 때리고 상처 준 사람들을 죽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말씀을 묵상하니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원수를 갚는 길은 그들을 사랑하여 복음에 순종하도록 돕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와 감정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함으로 그들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음을 간증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명의 양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은사에서 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형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여 친구로 삼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한계는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우리 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것은 무슨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을 믿을 때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감정은 뒤따라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접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심판도 이기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맺어지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5-37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죄와 허물을 드러내지만 용서하시고 감당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 인자가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4-40).” 반대로 저주를 받은 자들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시며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환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의 계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물밀듯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를 실제적으로 보완해줍니다. 서로에 대한 실제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씀은 매우 단순하지만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 이웃이란 적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눈을 감고 용서하고 사랑할 때 그들도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자 할 때 자기 부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의 이기심과 유익을 부정하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한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했다고 어떤 보상이나 칭찬을 들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담대하고 생명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는 자기부정이 필요하고 외면적으로는 사심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를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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