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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서 2018요일3강(3:1-24)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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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18-10-08 15:56

본문

요한일서 제 3 강 
말씀 | 요한일서 3:1-24 
요절 | 요한일서 3:18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한번 해 보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에 ‘죄’라는 단어가 10번, ‘사랑’이라는 단어가 11번 나옵니다. 죄는 사랑을 막습니다. 죄와 사랑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I. 범죄에 대한 경계(1-12)

  1절을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감격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불순종하고 각종 죄를 짓고 두려움 가운데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건하지 않고, 죄악 되고,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위대하기에 감탄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사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은 참된 위로요,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압니다. 우리의 몸이 구속되어 강하고 썩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죄의 소원이 없어지고 세상에 악이 없어집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죄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요1:29). 그는 모든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사53:11,12; 히9:28; 벧전2:24). 8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들고 죄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그와 사귐을 가짐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게 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3). 이는 현재형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깨끗하게 살고자 힘을 씁니다. 성결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신분상으로, 영적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의 요소, 죄악 된 속성과 끊임없이 싸우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2:20 말씀대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심을 믿고 살 때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무한정 죄에 머무르지 않는다,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도 그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시험하고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데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삼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고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입니다. 하나님의 씨는 말씀이요 성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항상 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의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죄, 자기중심적인 죄, 정욕, 거짓말, 탐심, 태만, 안일, 무책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죄를 계속 지으면 괴롭습니다.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매우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뒤로 물러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떻게 다릅니까? 무릇 의를 행하며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의와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닮아야 하는 성품입니다. 마귀의 자녀는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살인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미워하는 것과 살인은 동일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를 보십시오. 가인이 왜 그 아우를 죽였습니까?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비교의식과 미움에 시달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하였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아벨의 마음에는 진실 되고 의로운 씨가 있었습니다. 결국 아우의 행위가 자신의 악한 행위를 드러내기 때문에 아우를 들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자 회개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제거한 것입니다. 때로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을 이유 없이 미워합니다. 회식자리에 가면 술을 먹이고자 결사적으로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함께 술을 먹고 떠들며 타락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차별을 하고 노골적으로 미움을 드러냅니다. 이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왕따를 당할 때 나는 왕을 따르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에 우리 신자들은 초대교회와 같이 구별된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과 행동과 실제적인 필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고 먹을 것을 사주고 그 영혼을 돌보는 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II. 진실한 사랑(13-24)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망에서 옮겨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열매를 보면 그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에 속한 사람은 사망에 속한 미움, 거짓, 투기, 탐욕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망의 세계는 예수님을 알기 전 자연인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허무와 무의미,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온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거듭난 사람은 생명의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그는 믿음과 사랑과 감사와 생의 의미를 느끼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입니다.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흥미를 두었는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형제를 사랑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움의 문제를 이렇게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자기가 어둠에 있고 빛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빛 속에 있다면 결단을 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사랑은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요 주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참된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빚을 형제를 사랑함으로 갚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핍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일생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핍한 형제를 보고 도와 줄 마음을 닫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행함이 없는 믿음,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것입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본다는 것은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형제의 형편을 잘 알면서 최소한의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내 형편이 어렵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지만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은 전달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행함과 함께 진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in truth”로써 진리 안에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진실되게, 더 진리로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 영혼을 병들일 수 있습니다. 양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맛있는 것만 사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해서 그 영혼이 건강해지고 살찌도록 해야 진리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시카고에서는 ‘냉수사역(cold water ministry)’를 했습니다. 이는 자매 선교사님들이 미국 양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대접하는 대신에 냉수만 먹이고 말씀을 가르치고자 힘쓴 데서 나온 말입니다. 

  지금 미국으로 가신 한 선교사님은 동료 선교사가 가정의 파탄을 겪고 돌아왔을 때 그 분이 미국공인회계사 시험을 치도록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에서 자립하면서 가정도 꾸려서 행복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형제가 어려움에 처하자 거금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이런 형제의 사랑으로 인해서 궁핌함에 처한 형제가 어려움을 견디며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외에도 여러 목자님들이 어려운 동역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섬김과 희생을 일일이 다 말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은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로 인해서 이 세상을 살맛이 납니다.

  일본 복음주의 문학의 대가 미우라 아야코는 1959년, 37세 나이로 2년 연하의 미우라 미쓰요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미우라 아야코가 크리스천 작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 그녀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에, 조그마한 잡화점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너무 잘돼서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와야 할 정도로 번창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분주히 일하는 아야코에게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줄이라고 부탁합니다. “저쪽은 애들도 많고 가게를 성공시켜야 하지만 우리 가게야 망해도 가족은 아야코 혼자라 내 월급만으로도 먹을 수 있어.” 남편의 말을 들은 아야코는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였고. 그때부터 주류(酒類)와 같은 물건들은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그 물건을 찾으면 다른 가게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틈틈이 글을 쓴 것이『빙점』이라는 작품이며, 이 소설은 1964년 일본 아사히신문의 1천 만 엔 현상 소설 공모에 당선됨으로써 당시의 일본 문단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당당히 1등 하게 됩니다. 그녀는 1966년부터 40도가 넘는 고열과, 직장암, 말년에는 파킨슨 병까지 많은 병마가 그녀를 덮쳤지만, 오히려 그녀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난의 시간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은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하루하루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작가활동에 전념합니다. 고통 속에 있었지만, 오히려 이 고통을 통해 주님의 구원의 빛을 더 잘 나타낼 수 있었다는 그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며, 자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러 모양으로 형제를 사랑 할 때 무엇을 알게 됩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21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렵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또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기도가 잘 응답받으며 주님의 사랑을 친밀히 누리게 합니다. 사랑을 주는 자가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복됩니다.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나 자신이 감동을 받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이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이겠습니까? 오늘날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쳐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는 사랑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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