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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서 2018요일2강(2:1-29) 빛 가운데 거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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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4회 작성일 18-09-30 03:47

본문

2018 요한일서 제2강 
말씀 | 요한일서 2:1-29 
요절 | 요한일서 2:10 
 
빛 가운데 거하는 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우리는 1장에서 성도의 사귐을 배웠습니다.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요 성도 간의 사귐으로 이루어집니다. 죄 사함을 통해서 성도의 사귐은 새롭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이 어떻게 가능한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안다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통해 그를 더욱 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기초해서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가 빛 가운데 거합니다(1-11). 요한이 이것을 쓰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대언자란 ‘파라클레토스’로서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뜻은 내 옆에서 나를 보호해 주고 변호해 주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빠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 변호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십니다. 화목제물이란 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는 것이요, 그의 피 공로로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의 죄를 눈처럼 희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그는 우리가 죄를 들고 나갈 때마다 무시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이 죄를 다 들고 나가도 전혀 부담스러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흘리신 피가 더욱 가치있게 됨을 보시고 기쁨으로 우리 죄를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눈과 같이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신자들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형제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if we keep his commands). 이는 곧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합니다. 그 중에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압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실생활 가운데서 경험하는 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기회는 일생에 한 번 올 수도 있지만 나와 항상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사랑으로 실천할 때 사랑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미움이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미움을 품은 자신의 마음을 파괴합니다. 미운 마음을 품으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미움으로 인해서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함정을 파고 거기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았을 때 미움의 종이 되었고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을 팔았습니다. 나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합니다.

  벤허는 자기 가족을 비참하게 만든 메살라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에게 듣는 말은 “당신이 바로 메살라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이런 고백을 듣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갔다고 고백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남을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형제를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넘어지게 하는 올무를 놓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비록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평강이 넘칩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려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이해하고 그의 연약함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온유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때로는 형제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을 하면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에게 베풀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받습니다. 아낌없이 퍼주어도 가난해지지 않고 더 풍요해집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형제의 죄를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위로부터 덧입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부탁하였습니다(롬 6:13).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죄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기에 힘쓰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춥니다. 북한에서는 아내를 ‘안해’라고 부릅니다. 아내가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함으로 가정을 환하게 비춥니다. 반대로 남한에서는 남편을 바깥에서 남의 편을 들어준다고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남을 사랑함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12-17). 사도 요한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자녀, 청년, 아비로 나누어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떠한지를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늘 구원의 문제에 얽매입니다.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죄 사함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정죄감에 시달립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음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알고 신앙의 경륜이 깊어 중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처럼 웬만한 문제로 인해서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자녀들을 돌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분들입니다.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청년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흉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청년들은 순수하고 열정이 넘칩니다. 그들은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만들어 나갑니다. 청년들이 살아 있을 때 그 공동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청년들 안에 말씀이 살아 있고 그들은 흉악한 자들과 싸워 이깁니다. 세계선교도 청년들이 앞장서서 이루어왔습니다. 청년은 젊기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15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모두 아가페로서 최고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필요한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 힘써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것에 우선권을 두고 내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해서 애쓰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을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일시적이고 곧 시들고 추하게 사라져버립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다 소유하고 누렸던 솔로몬의 고백이 어떠합니까?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1:2,3).” 그러면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고 권면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은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과도한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욕망은 성적 방종과 탈선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횡령과 사기 도둑질 등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의 정욕이 제어되지 않으면 한 순간에 웅크린 사자가 먹이를 향해 튀어 오르듯이 그 본성이 그를 사로잡게 됩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종으로 알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타락하여 죄에 빠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를 향한 사랑이 변질될 때 정욕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영상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안에 있는 탐심과 욕망을 자극할까 연구를 합니다. 패션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옷을 만들면 그 옷을 입는 사람들의 은밀한 욕구를 채워주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까 연구합니다. 그 결과 눈만 뜨면 내 마음을 흔들고 유혹하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집을 자랑하고, 좋은 차를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자기의 권력을 자랑하고 자기가 한 일을 과대평가하여 업적을 자랑합니다. 다 제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아담 이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받았고 예수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용함으로 이런 유혹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는 자신은 죽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자랑은 곧 잊혀지게 됩니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를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합니다. 또한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의 수고는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나에게 주신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을 통해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18-29).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또는 보혜사라고 합니다. 43명이나 되는 이단의 교주들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합니다. 이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만 봅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정확한 판단여부가 정통과 이단을 구분합니다. 오늘날은 세속주의가 기독교 세계를 점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문화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에 선포된 복음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 복음 안에 거하면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5:7).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후 2:24)과 상치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이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합니다.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요14:26).

  28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게 됩니다(29).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은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조건과 형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함께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일대일 말씀 공부입니다.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리려 죽게 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사모님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모임을 섬기고, 목자님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과 양들을 섬깁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다. 학생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몸과 시간을 드려 헌신합니다. 저는 목자님들의 사랑의 수고를 인해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말씀이 충만한 사람이요 말씀이 충만한 사람은 사랑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기에 힘쓰는 사람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힘씀으로 세상의 빛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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