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123서 2018 요일1강(1:1-10) 성도의 사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1회 작성일 18-09-23 13:24

본문

요한일서 제 1 강 
말씀 | 요한일서 1:1-10 
요절 | 요한일서 1:3 
 
성도의 사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지난 주 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두 정상 간에 사귐을 깊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두 정상이 올랐고 청명한 날씨로 인해서 천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게 드러났습니다. 두 정상 간의 사귐을 기점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가 찾아오고 진정한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말년에 소아시아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지역의 교회들이 큰 시련을 겪을 때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5:13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권면합니다. 본문에 사귐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요 우리 서로 간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을 통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이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죄인데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사귐이 더 깊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서신의 배경이 된 영지주의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을 아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헬라철학의 기초인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영혼은 외부의 세계에서 왔기에 거룩하고 선하지만 육은 악하고 저차원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원론에서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나왔습니다. 영지주의의 문제점은 구원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알고 내가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됨으로 얻는다고 가르침으로 기독교 구원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참신이 육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란 참신이 예수란 인간이 세례를 받을 때 임했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가현설(도케니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와 대속의 진리를 흔드는 사탄적인 교리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에 미혹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와 싸웠고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이 어떠합니까?

 첫째, 성도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합니다(1-4) : 1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에 나타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자기를 비어 구유에 어린 아기로 오셨고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는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세례 요한을 따랐는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또 이튿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길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대답하였더니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함께 그 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대화를 하며 그를 지켜보았고 그가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말씀을 공부할 때에 그의 마음에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도마는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전해지고 보였고 만져졌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합니다. 사도 요한과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와 함께 살았고 그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뒤에 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선포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 이야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을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사귐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귐의 원어는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교제, 서로 나눔, 공유, 공동체의 뜻이 있습니다. 사귐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나눔으로 사귐이 깊어집니다. 대화를 나누고 지식과 정보를 나눌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음으로, 기쁨과 아픔을 나눔으로 사귐이 깊어집니다.

  우리의 사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귐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귐은 완전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함을 누리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질서가 있으면서도 평등하고 역동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원형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할 때 우리 사이에도 진리와 사랑으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존재인 사람이 사람과 사귀어야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고 현재 한 남자친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로웠고 고독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불만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사귀어야만 하는 행복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원을 모를 때 결국 허무와 무의미 가운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창조주를 알아야 하며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적이고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구주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하고 그 분과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막힌 담을 십자가에서 허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이 반드시 있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이 너무나 의무적이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외롭고 고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잘 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귐이라는 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고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를 가까이 하는 자, 그를 찾는 자는 반드시 그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매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귐을 갖는 첫 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만져본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생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요15:1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 대한 통찰이 생길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아하!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이 올 때 기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기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은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둘째, 성도의 사귐은 서로 간에 이루어집니다(5-7) :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할 때 의로움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모를 때 우리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또 죄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고 있는 사귐보다 더 높은 사귐을 자기네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불의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되고 끊임없는 거룩함의 추구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의 사귐은 비밀스럽고 이중적인 삶에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으로 나아오게 합니다. 벧전 2: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수양회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처음에는 분위기가 어색하지만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나면 사람들의 얼굴 빛이 밝아지고 말이 많아지고 기쁨이 넘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담대해지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넘침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어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하고 소통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함께 일하게 하고, 서로 존중하게 하고, 강력한 협동심을 이끌어냅니다.

  오래 전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서 어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골 교회의 따뜻한 분위기 대신에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마 일 년 가까이 출석을 했는데도 아무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그들의 인내가 한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결판을 내자.”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자신이 먼저 누구에게든지 말을 걸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다음 주일 날 한 친구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자 그것으로 교회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리차드 백스터라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교제를 찾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소감을 써서 나눔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형편을 형제자매들과 나눔으로 하나가 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처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들의 모든 숨겨진 갈등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숨겨진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영하셨고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7절에서 가장 놀라운 약속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숨겨진  갈등들로부터 열려진 빛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가 됩니다. 죄의 무거운 짐들은 풀려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독소들은 제거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삶에 효력을 끼칩니다. 죄의 모든 세력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순수하고 깨끗해집니다.

  셋째, 죄 사함을 통해서 계속 새롭게 되는 성도의 사귐(8-10) : 우리가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빛 가운데 걷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죄가 없다’는 말은 특정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죄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도 죄인이 아니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프로이드 심리학을 통해서 서구에서 만연한 것입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은 죄의식의 객관적인 근거를 부정합니다. 또한 이 말은 특정한 개인은 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죄를 가진 적이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 속에는 진리가 그 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살피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범한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수평적인 것은 성도 상호간의 사귐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죄를 고백하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한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죄를 자백하고 새롭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면 할 수 있는 한 그냥 버티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는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에도 연회에 오기를 거절하는 형과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죄책감을 가진 죄인들은 그 영혼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낍니다. 우리는 더럽고 구토가 남을 느낍니다. 우리는 내가 의롭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오래 간직하고 있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내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 민감하게 회개하고 고백하십시오.

  죄로부터의 자유는 아버지와 그 아들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우시고 항상 열려 있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구주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께 가까이 가도록 격려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잘 해결할 때 부족함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과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주장은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외로움과 고독, 우울증이 치료됩니다. 시름시름 앓던 생명이 소생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귐을 갖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죄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영적 가족인 형제자매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의 사귐 속에 있을 때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또 형제자매님들과 더욱 깊은 사귐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