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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서 2017년 신년3강(요일3:1-24)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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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17-01-1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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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신년 제 3 강
말씀 | 요한일서 3:1-24
요절 | 요한일서 3:18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세상에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된 진리를 전파하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신자들이 욕을 먹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를 변증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믿는 진리를 가장 강력하게 변증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자녀의 두 가지 분명한 표식이 나옵니다. 그것은 의와 사랑입니다. 반면 마귀의 자녀들은 죄와 미움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1-12). 오늘 말씀은 사도 요한의 감격으로 시작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a)!”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며 감격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낯선, 이국적인 사랑입니다. 롬 5: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낯선 사랑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를 위한 사랑, 죄인을 위한 사랑, 경건하지 않은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분상승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오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인도하심과 사랑을 받으며 그와 사귐을 가지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인 우리를 아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훈련하여 그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외칩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 서로를 사랑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근거요 원동력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원수였던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은 법적으로 맺어진 양자가 아니라 실제로 낳은 아들이라는 뜻의 ‘친자’를 의미합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자마자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분뿐만 아니라 실존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거칠고 악한 것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약하고 죄악 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 빚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가진 소망이 무엇입니까? 2b절을 보면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병들고 썩어 없어질 몸이 그와 같이 변화되어 강한 몸,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요즘 돈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젊음을 유지하고자 불법 줄기세포치료를 받습니다. 태반주사, 감초주사, 마늘주사도 맞습니다. 이런 주사를 맞아도 늙고 죽습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늙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죄가 없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3).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죄를 즐겨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죄를 없이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합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자녀는 아비 마귀와 늘 교제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거짓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죄를 새롭게 짓고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즐깁니다. 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죄를 자연스럽게 짓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런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께 속해 있느냐 마귀에게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녀는 의를 추구하지만 마귀에게 속한 자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입니다(9). 이 말씀은 요일 1:8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잘못된 해석으로 영지주의는 육으로 죄를 지을 뿐 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과 육을 나눌 수는 있지만 영이 죄를 지었다, 육이 죄를 지었다는 표현이 성경에 없습니다. 전인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형으로서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 소감에서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보면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때로는 고의적으로 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바른 해석은 무엇입니까? 문맥을 볼 때 우리의 존재는, 본질은 죄를 짓지 않고 지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과 존재, 현상과 본질의 차이입니다. 새는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새가 날개가 부러져서 날지 못할 수도 있지만 새라는 존재는 날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씨란 하나님의 생명의 씨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있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자신의 신분,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죄를 짓밟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과 자신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주장하면서 죄 짓는 것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더러운 죄 속에서 뒹굴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시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믿는 자 속에 내주하셔서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에 죄를 품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히 4: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싫어하고 죄를 멀리하고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 존재, 소속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치 아니합니다. 불법을 행합니다. 끊임없이 범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미워합니다. 물론 불신자들도,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도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는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합니다. 형제를 희생적으로 사랑합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가인이 왜 그 아우를 죽였습니까? 여기서 죽였다는 것은 제사를 지낼 때 각을 뜨는 용어로서 잔인하게 죽였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악에서 나왔기 때문에, 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해서 죽인 것입니다. 마귀의 특징은 회개할 수 없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자 반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인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마귀의 자녀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든 마귀에게 속하든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어느 한쪽에 속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요한이 구분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구별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와 ‘사랑’입니다. 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의와 사랑을 추구하며 그런 공동체와 그런 나라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행함으로 사랑합니다(13-24).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압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흐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게 만듭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입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합니다. 미움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러나 사랑은 관계를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영적인 거성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습니다. 성숙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사랑하는 품이 깊고 넓어집니다.

  우리는 형제를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참 사랑을 알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 목숨을 버리신 사랑을 받은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내 삶의 일부분을 내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돈을 주고, 내 삶을 떼어주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 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내 시간을 써야 하고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는다는 것은 마음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도와줄 마음이 있었는데 무엇인가에 의해서 막힌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립을 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강하게 키우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다. 가난 속에서 은혜가 크다. 자족해야 한다. 내 코가 석자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닫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도 닫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오다가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돕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정말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랑한다면 그 진심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라고 재물을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형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와줄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마음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외면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공허한 사랑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물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과 혀로도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문제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않고 바로 행함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언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말과 혀의 힘은 매우 강해서 우리의 인생의 바퀴를 불태울 만큼 강렬합니다(약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하게 하시고, 혀를 주신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으로 항상 사랑의 말을 해야 합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격려하는 문자 메시지 하나, 작은 선물이지만 정말 힘이 되고 사랑이 느껴집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쌀이 떨어지고, 기름이 떨어져서 방에 불을 땔 수 없는데 말로만 식사 잘하세요, 보일러 온도를 올려서 방을 따뜻하게 하세요 라고 말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기 집의 쌀이라도 퍼다 주고 먹을 것을 사 중어야 합니다. 옷이라도 사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만 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하고,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또한 사랑에는 진실함이 따라야 합니다. 진실이 결여된 사랑은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사랑하되 우리의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을 담아 말하고 행함으로 구체적으로 쓸 것을 도와줄 때 그 형제는 참 사랑을 느낍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실제적으로 사랑할 때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물질적인 사랑을 많이 준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멸망에 빠질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정말 사랑이 많이 필요합니다. 형제를 위한 중보기도와 시간을 내서 말씀 공부를 해야 하고 실제적인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양을 섬기기 위해서 목자님들은 식사도 대접하고 시간을 내어 교제하고, 말씀을 가르쳐 주고 양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많은 애를 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양을 사랑합니다. 또한 우리는 동역자들끼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동지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난을 받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목자님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기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을 배우는 목자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녀들과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완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나님 아버지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자책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함을 얻고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형제들과 사랑의 관계로 이어지는 사람은 기도가 잘 응답됩니다. 주님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을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그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도 넘치게 주십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키면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신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닮기, 예수님처럼 되기입니다. 경건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읽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것이라면 외적으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자족하기를 배우고, 물질주의와 싸우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자라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기도 응답이 잘 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 주신 방향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형제를 사랑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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