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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25강(20:1-3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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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4회 작성일 21-09-12 16:12

본문

2021년 요한복음 제 25 강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2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증거로, 마리아와 사도들과 특별히 도마를 부활의 증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요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도 이런 증인들로 인해서 생명력을 얻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현재 우리도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 통해서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가운데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빈 무덤(1-9). 안식 후 첫날에 일찍이 어두울 때에 즉 3시에서 6시 사이에 여자들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의 무덤은 바위에서 파냈을 뿐만 아니라 입구를 가로지르는 경사진 홈을 따라 원반 모양의 돌을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굴려 넣어 인봉했습니다. 따라서 닫기는 쉽지만, 열기 위해서는 장정 서너 명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즉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이를 알렸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무덤에 달려왔는데 요한이 먼저 도착했으나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구부려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따라와서는 바로 무덤으로 직행했습니다. 그는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습니다. 도굴꾼이 시체를 훔쳐갔다면 세마포가 그렇게 놓여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마포는 마치 나비가 벗어버리고 나온 번데기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싸고 있던 천이 아직도 그것을 감싸고 있는 듯이 향료가 묻은 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리 수건과 함께 놓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는 누군가 수의를 벗겨 주어야 했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나중에 문들이 잠겨 있는데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과 달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아직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부활의 현장을 육신의 눈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렌즈를 끼고 보아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뉘었던 빈 무덤은 지금도 말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마리아(10-18).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떠난 후에 무덤 곁에 혼자 남아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빈 무덤가에서 우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눈이 눈물에 가려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떡을 뗄 떼에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시체를 어디로 가져간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져갔던 간에 일러만 주면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때서야 마리아의 눈이 떠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다루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황홀한 기쁨으로 응답합니다. “랍오니여!”( 친애하는 선생님이시여!) 마리아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과 경외감과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를 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볼 때 사랑의 관계가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헌신보다, 프로그램이나 방법보다, 건물이나 숫자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생명력은 용솟음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껴안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7,1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그를 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매달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부활 이후의 예수님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님을 통해 새로운 연합관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가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위임 명령을 주십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상심한 사람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해 죽음 권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임재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그분에게 매달리는 일보다 기쁜 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 안에 남아 있었다면 이후에 사도들과 교회가 부활의 진리를 성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무덤은 비어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유대 당국도 로마도 선교활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를 막을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제시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울고 있던 마리아, 괴로움에 가득했던 마리아를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그 분은 지금도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계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기쁨을 주시고 상심하고 슬퍼하며 두려움에 가득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사도들(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과 함께 성만찬을 한 곳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강을 주실 때 기쁨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문제가 해결되고, 조건이 좋아지고, 환경이 좋아질 때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구원의 은혜를 누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평강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초월적인 평강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다 힘들지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립니다. 우리가 축복의 때보다 고난의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 깊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들의 고백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말씀을 꿀같이 달게 받고 기도에 힘씁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예수님의 성품을 깊이 닮아갑니다. 고난의 풀무 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빚어집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이런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며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파송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도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 인구의 65%가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즉 진리에 대하여 증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제자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고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고난을 받으면서 제자 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창조 시에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주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선교를 행하십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일을 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위해 나아갈 때에 그 분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보내시고 동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교회는 사도적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에 의해 보냄을 받고 공인된 모든 그리스도인 증인은 주님의 사도직에 속합니다. 사도는 사신으로서 보내신 분과 같은 권위를 갖고 일을 합니다.

  두려움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토록 두려워하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잡히고 박해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행4:8-10). 베드로와 사도들이 공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5:29 새번역).” 제자들 대부분은 순교로 인생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 결과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기도 하고 죄를 그대로 두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이끌리고 어떤 사람들은 저주의 어두움 속에 내버려 둡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미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그 용서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거나 아니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죄 가운데 계속 남아 있거나 합니다. 우리는 서로 죄를 고함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공동체는 사랑과 신뢰로 뭉쳐서 서로의 죄를 감당해야 합니다. 죄 고백을 통해서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소감 모임과 요회모임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죄사함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겠습니다. 죄의 짐에 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언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해야 할까요?
 
  넷째, 도마(24-31). 열 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었을까요? 부엌에 있었나요? 그는 문제를 자기 혼자서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어, 주님이 부활하셨다니까”라고 말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분위기에 쓸려 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의심은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만 이레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였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에 도마가 한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이 주님은 지금도 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한 주가 지나서 주님은 도마를 위해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소원을 아시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어 보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에 도마는 굉장한 고백을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이 고백은 요한복음 서두에서 다루었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동시에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을 받으시고 한 마디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보고 믿는 것은 자연스럽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깊은 신뢰를 나타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주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복됩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한 분이십니다. 나를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확신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나중에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영광스러운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그 증거를 믿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 분에게서 모든 것을 들은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듣고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빈 무덤과 기록된 말씀이라는 역사적인 증거와 수많은 증인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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